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둘이 공유하는 토대다. 어떤 둘이 하나를 공유한 채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면 그것은 구조다. 바로 그곳에서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세상은 의사결정의 집합이다. 갈림길과 같다. 두 길이 한 길과 만난다. 두 길이 한 길을 공유한다. 행인은 두 갈래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의사결정이다. 바른 의사결정은 이렇듯 선택이 가능한 구조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옳은 길과 그른 길 중에서 옳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배운다. 틀렸다. 우리는 선택이 가능한 길과, 선택이 불가능한 길 중에서, 지속적으로 선택이 가능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중에서 어느 쪽이 옳은가를 생각하지 말고 어느 쪽이 내게 선택권을 보장해 주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언제라도 유권자인 내게 선택권을 주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을 선택하는게 아니라 선택의 나무를 키워가는 것이어야 한다. 작은 선택들을 모아 큰 선택을 일구어야 한다. 하나의 선택이 또다른 선택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선택해야 한다. 사육되고 있는 동물원의 곰은 선택하라면 건빵을 선택한다. 곰에게 건빵은 옳은 선택이지만 그것이 결코 옳은 선택은 아니다. 적을 제압하는 방법은 이 원리를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적이 옳지 않은 길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면 된다. 적에게 건빵을 주면 된다. 적은 언제나 건빵을 선택한다. 혹은 적이 건빵이 아니라 선택권을 선택한다면 마치 그곳에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기만하는 방법을 쓸 수 있다. 선택권을 주는 척 연출할 수 있다. 그것은 가게 주인이 ‘손님 이 옷은 비싼데요?’ 하고 떠보는 것과 같다. 이때 손님은 자신이 선택권을 가졌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 옷을 산다. 옷을 살지 말지는 돈있는 사람이 결정한다. 손님은 옷을 사야만 자신이 돈있는 사람임을 입증할 수 있다. 구매를 해야만 선택의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선택이 가능한 구조로 세팅하려면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리더로 선택하려고 하지만 실은 어떤 팀을 선택해야 한다. 그 사람이 좋은 팀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유권자가 어떤 정치인을 선택한다는 것은 특정한 정책을 선택하는게 아니라 그 선택의 나무를 키워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부터 선택권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선택권은 존재하는게 아니라 지금부터 팀플레이를 통해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야구단이 팀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선택은 길 바닥에 떨어진 금을 줍는 것이 아니라 밭에다 씨앗을 심는 것이다.
건빵과 호빵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키워서 먹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다음 선택을 보장하는 선택을 선택해야 한다. |
집단이 형성되어 리더가 되면 선택하기가 쉬운데, 개인이 되면 선택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을까요?
집단은 오히려 선택권이 제한되고, 개인은 선택권이 무한대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집단에서의 선택은 가능하고, 개인으로서의 선택은 불가능하게 되어서
결국 개인일 때는 다른 선택에 기대게 되더군요. 혹은 남의 의견을 듣게 되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