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이 부끄러운 이유는 한국놈들 공부 진짜 안한다는 거. 영화감독조차 이순신이 누군지 모름.
아래는 페북에서 김동휘님글 인용.. 제발 공부 좀 합시다. 한국 진보의 문제는 싸가지가 없는게
아니고 무식한 겁니다. 공부를 안해서리 아는게 없음. 실력이 없음. 일할줄 모름. 이순신을 모름.
https://www.facebook.com/tigermsk?fref=nf
김동휘
20시간 · 부산광역시 · 수정됨 ·
솔직이 그놈의 <명량>을 보고나서 열받아서 근 한 달 동안 16세기 한국, 일본, 중국과 관련된 책과 자료들만 죽어라고 찾아봤다. 심지어 도서관에서 일본 근세사 관련 논문과 책들까지. 덤으로 일본 대하드라마들까지도. 아무리 영화라는 놈이 사실에 기반한 <허구>라고는 하지만, 허구도 허구 나름이다. 명품과 싸구려의 차이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이순신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는 오로지 두 가지 접근법만이 존재한다. 춘향전과 비슷한거다. 첫째는 묵직하게 정공법으로 나가는거다. 원작 혹은 원래 고전의 스토리와 플롯을 그대로 들고 나가면서 디테일에서 승부를 거는 것이다. 둘째는 소설 <칼의 노래>나 영화<방자전>처럼 개개인의 심리에 감정이입하면서 현대식으로 재구성 하는 것이다. 물론 이순신의 경우는 춘향전과는 달리 상당한 수준의 고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당연한 말씀이다.
감독의 전작 <최종병기 활>에서 호평 받았던 점은 사실과 허구를 잘 버무려서 재미있는 활극을 잘 만들어 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제는 거의 사어가 되어버린 만주어 대사까지 나오고 말이지. (흔히들 우리가 중국말 흉내라고 내는 "울리샬람 ~~~해"라는 말 자체가 만주어 흉내. 물론 현대 표준중국어도 원래는 한족들의 말이 아니라 만주족들이 구사하던 한어 비스무리한 것) 물론 영화에서 사망하는 청나라 왕자 이름이 도르곤(태종 홍타이지 사후 순치제의 섭정으로 산해관을 돌파해서 중원을 정복하는 중원입관을 성취한 인물과 이름이 같음)이라는건 다소 개그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영화 명량의 해전씬은 비장하고 그럴싸하게 시작해서 코메디로 끝나버렸다. 특히나 마지막의 충파공격씬은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진지함을 가장한 끔찍한 저질 개그코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슨놈의 명량해전이 그 2000년 전의 살라미스 해전인가? 판옥선을 그리스 애들이 쓰던 트리레메(삼단노선)처럼 사용? 명장 이순신의 주특기가 시대를 앞질러간 근대식 함포사격인데 말이지. (이미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 애들이 다우해전에서 비슷한 숫자의 비율로 이슬람 함대와 붙어서 비슷하게 쳐바른 경우도 있고.)
뭐 디테일을 더 씹어 보자면 끝도 없지만, 적장 구루시마의 투구도 역시나 어디선가 봤던듯한 모양이었는데, 그 유명한 다케다 신겐의 투구를 색상만 바꾼것. 이정도는 어느 정도 각색해도 얼마든지 용서가 가능. 물론 명량해전의 총대장 격인 도도 다카도라의 투구와 갑옷도 다른 것으로 나온 것이 지적이 되기도 했지만, 이것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측의 기록에만 봐도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 역시도 화살에 맞아서 부상을 입을 정도였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군감으로 파견한 모리 다카마사가 물에 빠져 죽을뻔한 것을 겨우 건져서 살아나올 정도였다는데 그런 점까지 영화에서 살려서 보여주는게 영화적으로 더 극적인 재미가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도도 다카도라나 협판안치(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쫄아서 꼬리말고 토낀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후군의 대장선 주변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물론 불멸의 이순신에 보이던 망할놈의 철쇄는 안나와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이순신 장군의 일기나 장계에도 허구헌날 그놈의 철(금속의 총칭. 화포의 주재료는 청동) 부족을 호소했는지 말이다. 그놈의 철쇄를 만들 금속이 있으면 차라리 총통을 더 만들었지. 당시 일본은 세계적인 구리의 주 산지였고, 은의 경우는 남아메리카 포토시와 더불어서 중국으로 흘러드는 은의 주 산지 중의 하나였는데, 그놈의 구리의 공급이 전쟁기간 동안 상당히 딸렸다고 하지.
곁으로 새는 말이지만, 참전했던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도 임진왜란은 끔찍한 재난에 가까왔다. 사츠마(현재의 큐슈 가고시마)의 시마즈 가문의 경우는 임진년에만도 있는것 없는것 통털어서 20,000이라는 인원이 조선에 건너왔는데, 그 대다수는 고향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이어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의 주력으로 다시 500여척이 참전해서 살아 돌아온건 50척. 대부분은 남해섬의 관음포의 수중고혼이 되고, 2년후 세키가하라 전투에 시마즈 가문이 겨우 1,000명이 참전한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도사번의 쵸쇼카베 가문의 경우는 상당히 인구가 적은 영지에도 불구하고(일본에서도 가장 낙후된 시고쿠에서도 가장 벽촌) 히데요시에게 할당받은 인원이 10,000명이었다. 불행히도 그렇게 무리해서 출전한 쵸쇼카베 가문의 병력은 수군으로 출전.(왜군이지만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조선에서 기다리고 있는 적장을 생각한다면....) 조선에서 악명높은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에도 조선에 상륙한 20,000의 군세가 1년도 안되어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귀환할 때는 5,000도 안되는 3,000~4,000정도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일본에서는 절대로 경험못할 함경도 동장군의 위세) 19세기 이전의 병참보급이 근대화되기 전의 전근대 군대의 특성상 엄청난 비전투손실로 무더기로 쓰러져 갔던거다. 거기다가 쳐들어간 동네가 20세기에 미해병대도 피똥을 쌌던 겨울의 함경도였으니.....
만약 배설이 정말로 전쟁공포증으로 참전할 수 없었다면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 시켰을 것입니다.
혹 배설이 전투 전에 도망갔다면 명량해전 직후에
반드시 찾아내 죽였을 것입니다.
충무공이 배설을 직접 죽이지 않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