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인가? 학문에서 과학을 빼면 남는 것이 철학이다. 집에서 집을 빼면 집터가 남는다. 그것에서 그것을 빼면,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남는다. 그리고 그 남는 그것은 애초의 그것과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주종관계가 다르다. 과학은 분명한 학문의 대상이 있다. 문학이면 문이 있고, 의학이면 의가 있고, 수학이면 수가 있으나, 철학은 철이 없다. 철학은 학문의 대상이 없다. 철학은 대상이 아닌 주체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체도 대상화 된다. 철학을 철학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가 아니다. 남의 시를 읊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고, 남의 노래 부르는 사람은 가수가 아니고, 남의 철학을 주워섬기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자 입에서 다른 철학자 이름이 나오면 곤란하다. 창피하지 않은가? 그것은 철학자의 자기부정이다.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으나 자동차 안에는 운전이 없다. 과학과 철학은 근본적인 방향의 차이가 있다. 존재는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은 주체와 대상의 에너지 교환이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대상을 과학한다. 그 대상이 의학이면 의, 화학이면 화, 문학이면 문, 수학이면 수다. 그것이 있다. 철학은 철이 없다. 철이 있으면 철학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불을 켜면 어둠이 없는 것과 같다. 여전히 어둠이 있다고? 그렇다면 그대는 아직 불을 켜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철학은 철학이 아니며 지나간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자에게 다른 철학자에 대한 평가를 부탁한다면 조용필에게 이용의 음악을 평가해달라는 주문과 같다. 그것은 무례하다. 어떤 철학자가 다른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거나 극찬한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가짜다. 존재는 주체와 대상의 상호작용이다. 대상이 과학이면 그 맞은 편에 무엇이 있는가? 인간이 있다. 그렇다면 철학은 인간학인가? 그렇다. 그러나 그 인간을 넘어선다. 무엇인가? 인간의 의사결정권이다. 인간이 학문의 대상이면 과학이다. 인간이면서 대상이 아닌 것은 의사결정권이다. 회사라면 법인이 있다. 법인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다. 그 인격이 가진 권리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법인은 하나의 의사결정 단위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부단한 의사결정권의 건설이며, 남의 의사결정은 해당없고, 지나간 의사결정 역시 해당사항이 없다. 그것은 시효가 만료된 특허와 같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인류를 대표한 자신의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그래야 철학이다. 그 의사결정은 세상의 반응을 끌어내는 팔팔하게 살아있는 의사결정이어야 한다. 남의 특허를 자기 특허인양 말하면 곤란하다. 남의 소유를 자기 소유인양 말하면 곤란하다. 철학자가 공자나 노자나 석가를 팔면 곤란하다. 철학자가 들뢰즈나 라캉이나 소쇠르를 팔면 곤란하다. 철학자가 김용옥짓 하면 곤란하다. 어떤 철학자가 장자를 해설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다. 화가는 남의 그림을 베껴그리지 않는다. 소설가는 남의 소설을 베껴쓰지 않는다. 문하생이나 지망생이라면 몰라도 작가라면 말이다. 철학은 구체적인 사실에 종속되는 지식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지금 이 순간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능동적으로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바 살아있는 지식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둔다. 그 지식은 사회로 나아가 큰 세력을 일구어 인류의 대표성을 획득하고 마침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한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철학하라. 그렇지 않다면? 철학은 없다. 모든 권한은 신에게 있고 인간에게 의사결정의 권한이 없다면? 철학은 신학이 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신학을 부정한다. 굳이 니체를 빌지 않더라도 철학은 신을 때려죽이고 시작한다. 철학은 인간의 의사결정권을 해명하며 한편으로 건설한다. 그리고 행사한다. 철학의 시선에서 인간은 대표성을 가지며, 그러므로 존엄하다. 그것은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행복의 추구나 고난의 극복이나 도덕의 함양을 넘어선다. 철학은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진보의 지식이다. 산의 정상에서 굴러내려가는 눈덩이가 점점 커지듯이 말이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단일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 눈덩이가 쪼개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지나간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눈덩이가 굴러가는 길은 언제라도 새 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나간 이야기 밖에 할 말이 없다면? 떠나야 한다. 그릴 것이 없으면 화가도 붓을 꺾어야 하고, 쓸 것이 없으면 작가도 펜을 꺾어야 한다. 산의 정상으로부터 내려온 그 눈덩이가 가는 길은 대승의 길이다. 그 눈덩이는 남의 구역을 관통하여 가기 때문이다. 자기 집 마당에 가만이 서 있는 눈사람은 철학하지 않는다. 진보하지도 관통하지도 않는다. 철학의 진보는 인류가 환경에 대해 우위에 선다는 의미다. 철학은 개인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위대해지는 것이다. 인간 아닌 존재는 철학이 없다. 의사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환경에 대해 우위에 서지 않기 때문이다. 노예에게는 철학이 없다. 의사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에는 철학이 없다. 신이 대신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인간의 상호작용 대상인 환경, 그 환경이 놓여있는 자연, 그 자연의 힘인 에너지를 탐구한다. 반대로 그 환경에 맞서는 인간, 그 인간이 결집한 사회, 그 인류의 의사결정권을 탐구한다. 철학은 기어이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실현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간다. 눈덩이처럼 굴러서 남의 구역을 관통하여 간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거침없이 나아간다. 그러므로 보수는 철학이 없다. 보수주의 철학은 없다. 그것은 철학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소승의 철학은 없다. 개인은 권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집 마당에 가만이 서 있는 눈사람은 대표성이 없다. 환경과 상호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우위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거나 혹은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거나 간에 그것은 권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염소가 하품을 하거나 원숭이가 나무를 타는 것과 같다. 권은 사회 안에서 대표성 개념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행복을 논하는 소승에는 철학이 없다. 자동차에는 철학이 없고 운전자에게 철학이 있다. 선원에게는 철학이 없고 선장에게 철학이 있다. 그러므로 철학하려면 브릿지를 찾아가서 팀에 들어야 한다. 집단의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세상에 대한 발언권을 획득해야 한다. 철학은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에서 인간이 우위에 서는 것이며, 그러므로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며, 그 상호작용의 핑퐁은 지금도 부단히 오가고 있다. 부단한 의사결정을 필요로 한다. 새롭게 결정한 사람이 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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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철학자를 인용하지 않는 철학자?는 아마 없는줄로 압니다.
들뢰즈든 푸코든 데리다든 ..
들뢰즈는 니체빠이고, 푸코는 들뢰즈빠이고
이진경은 들뢰즈 해설서나 쓰고
예수가 누굴 인용했는데요?
석가는 누굴 인용했는데요?
공자는 누굴 인용했는데요?
물론 자기 철학을 용이하게 설명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남의 주장을 끌어들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게 당연시 되면 곤란합니다.
관객들에게..
"니들이 초딩이라 내 말을 이해를 못하니 불가피하게 니들이 잘 아는 예수 말로 해주겠다"..
이런 거지요.
노자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사실은 공자도 내 말을 인정했지 크하하'.. 하고 구라친적 있지만
이건 사실 누가 나중에 날조해낸 거짓말이고.
그럴 리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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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동의합니다.
모든 유식한 분들이 빠지는 함정 ,유혹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조는 관계이고 관계는 사실 정 반대쪽의 시선인데
자꾸 자기가 알고있는 기존의 지식과 연계시켜 이해할려고 드는 자세
그것이 구조에서 멀어지게 만드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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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가 없죠. 무슨 딜레마가 있겠소?
내 이야기는 간단히 철학이 불필요한 지점들 그러니까.
종교인이라면 내 손에 성경이 있는데 무슨 철학이 필요하겠소?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고 자유의지가 없다면 역시 철학은 불필요
노예에게도 철학은 불필요. 고립된 인간에게도 불필요.
무인도에 혼자 산다면 그냥 벌거벗고 히히덕거리며 살아도 됩니다.
허무주의, 염세주의자에게도 철학은 불필요. 유물론자에게도 철학은 불필요.
이렇게 범위를 좁히면 철학은 매우 좁은 영역을 가지게 됩니다.
철학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철학을 떠드니 별 시덥잖은 이야기가 다 나오는 거죠.
철학은 철학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모든 조건들,
노예상태, 예속과 고립, 허무와 염세와 유물, 자유의지의 부정. 무한경쟁. 적자선택,
차별과 분리. 이런 모든 환경의 억압을 극복할 무기를 갖춘 사람에게 필요한 겁니다.
총이 있는 사람에게 전략이 필요하고 바둑판이 있는 사람에게 기보가 필요한 거죠.
컴퓨터가 없다면 OS도 필요가 없겠죠. 컴퓨터도 없는 주제에
나는 사파리가 있는데 이게 윈도 익스플로러보다 존건데 이런 말은 불필요.
환경과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이 갑이 되지 못하면 철학은 불필요.
제게 딜레마가 있는게 아니고 구조론이 없는 사람에게 딜레마가 있는 거죠.
철학이 필요없다는 원초적인 딜레마. 강신주에게 무슨 철학이 필요하겠소?
차가 있는 사람에게 운전이 필요한 거. 구조론이 있어야 철학이 필요한 거.
환경에 대한 보편적 지성의 우위가 있어야 철학이 필요한 거.
그래서 옛날부터 철학은 배부른 사람이 했습니다.
석가는 왕자였죠. 공자도 돈 많고 칼 좀 쓰는 무인 자로를 만난 다음에 패가 붙었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매국노 귀족의 자제들이었죠.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람에겐 철학이 없습니다. 호랑이 등에 탄 사람에게 철학이 있죠.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람에겐 철학이 없습니다. 호랑이 등에 탄 사람에게 철학이 있죠" ,
100만톤의 헤머로 저의 머리를 치는군요...
10대가 되면서 고민했던, 삶이란 세상이란 문제를 20대에 까뮈를 통해서 조금 해소했고 30~40대에 김용옥과 노무현을 만나 업그레이 됐는데 동렬님을 만나 차분해지고 있습니다.
철학 그리고 삶이란 나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화두 그러나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면 꽝!
그 구조를 알지 못하면 또 꽝!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