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지식의 출발점은 관점의 설정에 있다. 어느 위치에서 대상을 바라보느냐다. 흔히 저지르는 오류는 대상에 보는 자신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는 주관적 관점의 오류라 하겠다. 마땅히 객관으로 가야 한다. 주관적 관점의 오류는 상대방에 대해서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셈으로 되는 것이다. ‘나는 짜장면이 싫어.’ 하면 짜장면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자기 성격의 과시가 되는 식이다.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며, 관측자인 자신은 그 사건의 바깥에 있어야 한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버스가 달리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부분은 전체를 볼 수 없다. 사건과 자신은 1 대 1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공간의 설정이며, 시간의 설정도 고려해야 한다. 시간으로 보면 원인에서 결과를 볼 수 있으나, 결과에서 원인을 볼 수 없다. 시간이 원인에서 결과로 흐르기 때문이다. 원인측에 포지셔닝해야 한다. 부득이하게 결과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추론의 방법을 써야 한다. 추론은 절대적 확신이 없으므로 재현되어야 한다. 재현한다는 것은 다시 원인에서 결과를 일으켜 보는 것이다. 관측은 에너지 작용측에서 수용측을 보는 형태여야 한다. 작용측이 원인측이다. 에너지가 있는 쪽이 원인을 구성한다. 관측은 에너지가 있는 사건의 원인측에서 에너지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어야 한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의 위상은 대등해야 한다. 이는 상호작용이다. 빛으로 빛을 보고, 소리로 소리를 보며, 냄새로 냄새를 본다. 정靜을 보려면 자신이 정이어야 하며, 동을 보려면 자신이 움직여야 한다. 관측자와 관측대상 사이에서 위상의 균일에 의한 수평적 상호작용을 이루려면 한 층위 위에 있어야 한다. 그 지점에서 이 모든 조건들이 한 점에 맞물려 있어야 한다. 그 한 점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지점을 제어하여 이 모두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일의성이다. 그 시공간의 지점은 단 하나 뿐이며 그 하나의 지점을 찾을 때 지식은 보편성을 가지고 무한히 복제된다. 이를 철학적 지혜라 한다. 관점을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인식론은 이러한 관점의 설정 절차 없이 그냥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다. 이를 그대로 받으면 주관의 오류에 빠진다. 이는 비판되지 않은 비과학적 지식이다. 인식론의 방법으로 얻은 데이터를 추출하고 그 데이터를 분석하여 추론을 할 수 있다. 귀납적인 지식을 연역적 지식으로 바꿀 수 있다.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바꾸어 재현할 수 있다. 그래도 한계가 있다. 물리학과 같은 극한의 경우 어떤 방법으로도 재현할 수 없다. 태양이 처음 만들어지는 장면을 인위적으로 재현할 수 없다. 다만 비슷한 것을 재현하여 그 둘이 같은 것임을 입증하는 방법을 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학문적인 주장을 할 때 먼저 이러한 관점의 설정 절차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쓰더라도 설정부터 하고 쓰는데 지식의 창출에 설정이 없다는건 말이 안된다. 관점의 세팅절차가 없으면 도입부가 어색해진다. 논어는 바로 ‘학이시습지’로 쳐들어가고, 도덕경은 ‘도가도비상도’로 시작하고 불경은 ‘여시아문’으로 시작하고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하는데 어색한 거다. 다만 서양수학은 유클리드의 원론으로 시작하는데 관점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실패다. 옳게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인문분야는 관점의 설정이 없으면 전래설화의 형식을 따르게 된다. 전래설화는 주인공이 악당을 만나 고생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본주의 체제를 설명하는데 가렴주구, 착취, 압제, 소외 따위 감정적인 용어가 등장한다. 관객의 주목을 끄는 설화의 수법이다. 전래설화의 수법으로 독자의 심리를 격동시켜 그것으로 동기를 부여하여 이를 학문의 논거로 삼고자 한다면 과학이 아니라 사기다. 그러나 21세기 이 개명한 시대에도 학자들은 대개 그렇게들 하고 있다. 관점은 모르는 사람이 만나 인사를 트는 것과 같고, 손님이 주인의 집을 방문하여 대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고, 손님이 식당을 방문하여 메뉴판을 펼쳐드는 것과 같다. 이는 반드시 밟아야 할 절차다. 모르는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인사할 수 없다. 대문을 두드렸는데 마침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면 그 집을 방문할 수 없다. 메뉴판을 펼쳤는데 자신이 원하는 요리가 없다면 먹을 수 없다. 밟아야 할 절차가 있고, 그 절차는 지켜져야 하며 사전에 충분히 공지되어야 한다. 학이시습지든, 도가도비상도든, 여시아문이든, 창세기든 그러한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 어설프나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절차는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야 한다. 결대로 가야 한다. 공간적으로 바깥쪽에 서야 하고, 시간적으로 원인측에 서야 하며, 상호작용으로는 균일측에 서야 하고, 합쳐서 일의성을 성립시켜야 한다. 귀납이 아닌 연역추론, 인식론이 아닌 존재론이어야 한다. 피해자의 수동이 아닌 가해자의 능동에 서야 하고, 주관이 아닌 객관의 관점에 서야 한다. 그 방법으로 사건 자체에 완결성을 부여해야 한다.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완결된 사건이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자가 되며 그 완결된 존재자가 완결된 인식을 낳기 때문이다. 반대로 완결성이 없는 부스러기 존재는 파편적 인식을 부를 뿐이다.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불완전한 존재라면 그것을 옳게 인식할 수 없다. 먼저 그것을 완성시켜 주고 난 다음에 그것을 조사하더라도 조사해야 한다. 범인이 부상을 입었다면 치료부터 해야 한다. |
인식론 이전에 존재론이
결과 이전에 원인이
가을 이전에 봄이
계란 이전에 닭이
진화론 이전에 창조설이
식탁의 쌀밥 이전에 봄철의 파종이
말하기 이전에 듣기가
쓰기 이전에 읽기가
치료 이전에 진단이
회복 이전에 치료가
치료 이전에 예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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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우선인 것을 안다면
관점설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