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란 무엇인가? http://me2.do/xzZuV7Mw 하버드에서 영어강의보다 스트레스받는건 점심시간이다. 도살장 같은 교수식당에서 알지 못하는 교수들과 합석해야 하고, 그들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석학이다. 미리 준비되지 못한 상황은 불편하다. 무슨 대화가 테이블 위에 오를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특정한 수학문제가 나오면 그들이나 나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입시로 단련되어 있어서 문제풀이는 경쟁력이 있다. 그들과 나의 차이는 문제를 만들어 내고, 정의하는 능력이다. 평상시 간과하던 자연현상들, 기술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문제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회의 부조리, 비효율, 고비용 이슈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고 가끔 기막힌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오해하지 말자. 문제를 정의하는 것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다르다. '복지를 늘려야 한다', '성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문제제기이지 문제정의가 아니다. 문제를 정의하려면 무엇을 목표로, 어떤 방법을 취할지, 부작용에 대한 대응,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들을 짚어내야 한다. 문제정의 과정에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딜레마의 돌파가 관건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를 해결하는 능력이 창의성의 핵심이라고 본다. 창의성의 열쇠는 인문학과 예술이 쥐고 있다. 하버드 교수식당으로 돌아가보자. 보스턴 교통문제를 논의하는데 그리스 신화, 애덤 스미스, 찰스 다윈, 영화 러브스토리가 등장한다. 이런 소재들로부터 러시아워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이에 대한 공학적 해결책이 제시된다. 문제정의의 중심에 인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경험이 있다. (한국일보 원광연 칼럼) ‘구조론적 사고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에 적당한 칼럼이다. 문제제기는 진중권이나 박노자도 한다. 선진국과 비교하면 된다. 독일은 이런데 한국은 어떻다거나, 스웨덴은 저런데 한국은 어떻거나 하는 상투적인 레파토리가 있다. 하던대로 울궈먹으면 된다. 무뇌좌파의 역할은 문제제기로 끝난다. 상대가 풀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해놓고 의기양양해 하는 꼴이 우습다. 꼴통우파는 문제를 풀어낸다. 그들이 문제를 푸는 방법은 성장만능주의다. 무뇌좌파와 꼴통우파의 방법은 후진국에서 먹힌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좌파들은 선진국과 비교하여 차별하지만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이제는 오히려 그들이 한국을 배우려 드는 판이다. 우파들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는 성장담론이다. 고도성장시대는 끝났다. 좌든 우든 둘 다 시효가 끝났다. 지금 문제제기가 아니고, 문제해결도 아닌 문제규정이 필요하다. 좌우의 패거리를 나와서 진리의 팀에 가담해야 한다. 문제해결 좋아말라. 문제해결에 몰두하면 평생 남의 집 하수도나 고친다. 현장에서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실무자다. 확실히 배트맨 보다 집사가 더 유능하다. 나으리보다 운전기사가 더 뛰어나다. 우파들은 사실이지 집사 아니면 운전기사다. 몽구나 건희가 제법 금전을 챙겼지만 본질에서 그들은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하인에 불과하다. 그들은 30년째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집의 하수구를 고치고 있다. 그들의 박근혜 찬양은 신분상승을 포기한 자의 오기다. 오기로 버티게 해주는 힘은 두둑한 현찰에서 나온다. 현찰만 뿌리면 다들 고개숙이는데 꿀릴게 뭐냐다. 사실이지 그들은 꿀릴게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30년 전부터 계속 '꿀릴게 없잖아!' '꿀릴게 뭐 있어!' '꿀릴게 없다구!'를 외치고 있다. 뼛골에 사무친 열등감이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은 몽구집사와 건희기사의 실무능력 덕에 여기까지 왔다. 인정할건 인정한다. 기특한데 집사다. 그들이 그네를 섬기는 한 그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워렌 버핏과의 점심과 같은 재치있는 이벤트나 스티브 잡스에게 쏟아지는 상찬을 그들은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진리의 팀에 들지 못한다. 지금은 문제규정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문제제기에 골몰하면 위선자가 되기 쉽다. 다들 시작할 때는 불만에 가득찬 백수 캐릭터로 시작한다. 그들의 패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수록 호주머니가 두둑하게 채워지기 때문이다. 결혼한 양영순은 세계적인 웹툰 아색기가의 연재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총각의 상상은 꽃 피지 않는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어제의 상상이 오늘의 현실로 되었다. 성적 불만이 없으니 성적 판타지를 소재로 만화를 그릴 수 없다. 배부른 이현세는 더 이상 외인구단을 내놓지 못한다. 이제는 이현세도 외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부른 허영만의 식객은 그나마 솔직하다. 돈 벌어서 하는 짓이라곤 먹어조지는 짓 뿐이라 만화를 그려도 배 터져 죽을 식객이다. 조중동의 시사만화가는 괴롭다. 낮에는 골프를 치고 밤에는 룸살롱을 헤매지만 그들의 주인공은 단간방에 세들어 사는 서민이다. 중앙일보의 왈순 아지매는 50년간 줄기차게 마루만 닦았다. 60년대에 딱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더 이상 추해질 수 없는 위선의 극치다. 배부른 서태지는 더 이상 노래하지 못한다. 반항아 캐릭터는 죽었다. 강남좌파 캐릭터가 차라리 솔직하다. 이 시대가 그런 시대이다. 정답은 따로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진짜는 아니다. 대칭적 사고를 벗어나서 비대칭으로 도약해야 한다. 왜 문제를 해결해서 기어코 없애려고 하지? 문제도 생명인데 죽이려 한다면 너무 잔인하지 않나? 정답은 사건의 맥락 안에서 문제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아노의 조율사와 같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도 같다. 문제를 해결하여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연관된 것을 이어서 커다란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기다. 한국스타일은 이런 것이다 하고 널리 복제될 모형의 원형을 제시하기다. 우승하지 못한 도전자들은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고 도전하여 문제해결에 나선다. 우승을 밥먹듯이 해치운 타이거 우즈는 그 제거되어야 할 문제가 없기 때문에 망가졌다. 우승한 다음에 무엇이 필요한가? 그림 좋은 자기 스타일을 선보여야 한다. 그래야 광고주가 붙는다. 마이클 조던처럼 끝까지 가식을 떨면 자본주의 아이콘 된다. 자본주의 배트맨에게 부름받는 성실한 집사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진정성의 힘이다. 영화 변호인의 노무현 캐릭터를 통하여 깨닫는 것이 그렇다. 세계시장에 풀어놓을 한국의 상품은 진정성 뿐이다. 한국 스타일 완성으로 가야 한다. 원강연의 '딜레마를 돌파한다'는 표현에 주목하자. 대칭과 비대칭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딜레마는 상부구조의 개입을 통한 시간지연으로 해결된다. 가족 안에서 한달 사이에 일어난 사건 속에서 교착된 딜레마는 부족, 혹은 국가 안에서 10년 단위 문제로 시간지연이 된다. 그것이 답이다. 우리는 너와 나 사이에서, 혹은 여와 야 사이에서, 혹은 좌와 우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의 내부의 교착상태를 대한민국모델의 세계무대 데뷔라는 백년대계로 용해시켜 낸다. 음악이라면 음계 안의 갈등이다. 갈등은 가까운 사이인 도와 레, 레와 미, 미와 파 사이에서 일어난다. 도와 솔의 먼 사이에는 갈등이 없고 대신 화음이 있다. 친함이 있다. 연주자는 그것을 교향곡이라는 한 시간짜리 커다란 연주 안에서 용해시켜 낸다. 회화라면 빨강과 파랑의 갈등, 파랑과 노랑의 갈등을 작품이라는 커다란 용광로 안에서 용해시켜 낸다. 그것은 문제의 제기도 아니고 문제의 해결도 아니다. 전혀 다른 것이다. 문제의 제기나 해결은 초보자의 수업이다. 처음 건반을 익히는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법을 찾는다. 손가락이 짧아서 문제이면 상체를 크게 움직이는 격정적인 연주법으로 해결한다. 바둑이라면 기어코 상대방 말을 잡으려는 문제해결의 관점이 하수의 것이다. 고수는 그곳에 둘 수 있지만 슬쩍 들여다 볼 뿐 두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운용한다. 고수는 예술한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런 부분을 알아챈다. 원강연은 하버드에서 그거 배웠다고 자랑하지만 하버드 안 가도 안다. 수학의 뿌리는 집합론이다. 그것은 이미 집합된 것이 아니라 이제 집합하려는 것이다. 집합론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고, 문제를 내는 것도 아니며, 문제를 바르게 규정하는 것이다. 동양의 산학과 서양수학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동양은 문제를 내고 한편으로 문제를 푼다. 그 뿐이다. 그러므로 그 문제가 건축이나 군사나 산업이나 다른 분야로 옮겨붙지 않는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문제의 제기는 완전한 것은 이렇다 하는 전제를 깔아놓고 거기서 부족한 부분을 찾아낸다. 문제의 풀이는 물량을 동원하여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운다. 문제규정은 그 과정에서 숨은 가정과 전제들을 들춰낸다. 선진국과 비교하여 이 점이 잘못되었다는 좌파의 문제제기가 있다. 선진국은 완전하다는 가정을 깔고 들어간다. 그 깔고 들어가는 가정을 들춰내는 것이 문제규정이다. 경제성장으로 문제를 덤으려는 우파의 문제해결이 있다. 과연 경제성장해서 행복해졌는가? 블로그에서 본 어떤 통계에 의하면 한국과 스웨덴의 구매력 차이는 3만2천불과 4만불의 근소한 차이라고 한다. 통계만큼 한국은 스웨덴에 근접하게 행복해졌는가? 천만에. 행복은 사회관계의 긴밀도에 의해 얻어진다. 확실히 경제성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친하게 돕는다. 아빠 어디가의 성동일과 아들 성준은 방송국이 후원하는 호화여행에 의해 친해졌다. 둘의 사이는 긴밀해졌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배운 것은 친해지는 것이 진짜 목적이라는 것이다. 돈은 친해지게 돕는 방법 중의 하나다. 모두가 돈의 방법으로 달려갈 때 오히려 그쪽의 경쟁률만 높아진다. 방향을 바꿔 경쟁률이 낮은 쪽으로 달려가서 독식하는 현명함을 발휘해야 한다. 행복은 상호작용 총량증대에 의해 얻어진다. 음악이라고 치자. 음과 음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다. 그 사이에 관계의 긴밀도가 걸려 있다.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긴장의 총량을 정량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을 구현해 내는 사람은 베토벤과 모차르트다. 그들은 음과 음을 친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최대한 밀어붙인 사람은 라흐마니노프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돈을 일구어 음들을 마련했으나 그 음들이 친하게 하는 데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문제제기도 아니고 문제해결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른척 하고 넘어가는 숨은 가정과 전제들을 들추어낼 때의 진정성으로 달성된다. 성준은 아빠의 비리를 폭로한다. 가부장적인 완고함으로 연극하지만 사실은 멋쩍어서다. 성동일은 아들과 같이 놀아주기에 익숙하지 않다. 자기가 잘하지 못하니까 부끄러워서 안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가부장의 위엄으로 은폐한다. 교활하게도 말이다. 그렇게 낱낱이 들추어낼 때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진정성은 획득된다. 변호인 노무현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하고 들추어냈듯이 말이다. 그럴때 악기는 팽팽하게 조율된다. 오케스트라는 물흐르듯이 지휘된다. 인상주의 이전의 전통적인 그림은 정교한 붓질로 색과 색 사이의 미묘한 다름들을 낱낱이 구분했지만 고흐는 굵은 선으로 떡칠해서 그 미묘한 경계들을 지워버렸다. 고흐는 강한 에너지를 투입하여 색과 색을 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바그너의 느리고 장중한 음악이 미세하게 분별되던 음과 음의 다름들을 단숨에 밀어버렸듯이. 문제풀이에는 기술자가 필요하다. 하수구 고치는 사람에게 전화하면 와서 수리해준다. 편리하긴 하다. 점차 서로간에 역할이 나누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생긴다. 부부간에 계급이 생기고, 친구간에 서열이 생긴다. 부자 간에도 균열이 일어난다. 아버지 성동일은 명령하고 아들 성준은 복종한다. 그들은 친하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여 없애버리려고 하므로 관계의 긴밀함이 끊어져서 서로 불행해진다. 문제제기에는 헛바람 든 계몽주의 지식인이 역할한다. 그들은 핀란드가 어떻네 노르웨이가 어떻네 하며 낯선 사람들을 소개한다. 분위기는 어색해지고 파티는 겉돈다. 매너와 교양이라는 가식이 판친다. 지식인이 문제를 제기할수록 우리는 점차 위선자가 된다. 퇴계선생의 부인이 ‘당신은 간밤에 온갖 요란을 떨더니 낮에 제자들 앞에서는 왜 개폼을 잡죠?’ 하고 이의제기 했을 정도다. 우리의 진짜 목적은 서로 친밀해지는 것이다. 우파의 차별과 좌파의 위선은 답이 아니다. 문제풀이에 집착하면 익숙한 길로만 다닌다. 문제제기에 집착하면 가식놀음에 빠진다. 바른 문제규정이 멋진 화음을 끌어낸다. 진정성의 힘으로 힘차게 연주한다. 구조로 돌아가보자. 세상은 세상을 세상이게 하는, 의사결정의 단위들이 집합되어 이루어졌다. 우리는 그것을 입자로 가정한다. 그렇게 그냥 먹고들어가는 숨은 가정과 전제들을 들추는 것이 집합론이다. 우파의 가정은 차별로 먹고들어가고, 좌파의 가정은 가식으로 먹고들어간다. 부끄럽지 않나? 고백하라. 성동일이 아들 앞에서 고백했듯이 당신도 고백하라. 그리하여 그들처럼 손 꼭 잡고 친해져라. 과학의 그러한 가정은 틀렸으며 자연에 입자는 없다. 실제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구조다. 각각의 음이 아니라 음과 음의 사이에서의 화음과 불협화음이다. 문제는 너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서 춤추어야 할 긴장의 흐름에 있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것은 쳐부술 도적이 아니라 완수하여야 할 임무다. 그것은 구조다. 구조는 에너지 작용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나타낸다. 구조를 의사결정단위로 볼 때 음과 음 사이에 숨은 화음이 고개를 내밀듯이 일제히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형이며, 완전성이고, 일의성이고, 복제이고, 성장이다. 무대에는 장막이 쳐지고 가정들은 은폐된다. 세상을 온갖 가정으로 장막이 쳐진 시공간의 무대 안에 내던져진 입자의 원맨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이전단계로 거슬러 올라가서, 입자 이전의 양자로 본다. 보이는 것을 보는게 아니라 그것을 보는 절차와 과정을 본다. 장막을 들추고 무대 뒤를 본다. 물질이 입자라는 형태를 획득하기 이전 단계의 상부구조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우리는 물질의 형태가 원래부터 갖추어져 있다고 가정하지만, 숨은 가정을 들춰내지 않았으므로 실패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이 노력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인양 속이는 것과 같다. 건희가 성공한 이유는 병철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누구의 아들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들춰낼 것을 들춰내야 어색함은 사라지고 서로는 친해진다. 관계는 긴밀해진다. 진정성으로 돌아간다. 국가든, 조직이든, 가족이든, 생명이든, 팀이든 그것은 이미 형태를 얻은 것이며, 그 존재가 형태를 얻기 전에 이미 많은 것이 결정되어 있으며, 부모로부터 뒷구멍으로 상속되어 있으며, 그렇게 은폐된 부분을 감안해서 판단해야 한다. 지구는 돌고 있지만 사격선수가 표적을 맞힐 때는 그 점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지구가 돌든 말든 사수는 방아쇠를 당긴다. 그래도 된다. 그러나 우리가 달나라에 우주선을 보내려면 지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지런히 돌고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중요한 판단에 임하여 뜻밖에 고려할 변수가 많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일견 복잡해 보이더라도 낱낱이 조율을 마쳤을 때, 오히려 대량복제에 의한 증폭으로 더 쉬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쉬운 길을 가려고, 형태를 얻기전에 미리 결정해 둔 가정들을 은폐한 것이다. 나중에는 그것이 더 어려운 길임을 알게 된다. 털고 갈 것을 미리 털고 가는 진정성의 길이 진짜임을 깨닫게 된다. 친해야 진짜다. 긴밀해져야 진짜다. 상호작용이 증가해야 진짜다. 홀딱 벗고 원점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문제규정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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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부구조에 매달리지 않고 상부구조를 점유하여
전체를 나누되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원광연 이분의 케이스가 바로 7인의 사무라이..
가짜가 진짜속에 섞여 있다가 진짜가 되어버리는 상황..
진짜속에 섞여서 스트레스를 견딜때 진정한 변화가 다가옴..
왜 노숙을 할까? 진짜를 만나지 못해서..
배부름이 풍요가 가져온 마비를 떨치고 본래 모습을 다시 돌아보고 싶어서..
가식을 떨치고 규제를 떨치고 고향으로..진짜에게 조금 더 가까워지려고..
그렇게해서 자신을 치유하려고.. 가짜가 싫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가짜와 진짜는 절대적 상태가 아닙니다.
상대적 윗등급이 진짜.. 상대적 아랫등급이 가짜 입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크건 작건,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실전에서 써먹어 제 걸로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