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맹점 우리는 빨강과 파랑이 어떻게 다른지는 잘 설명하지만, 빨강과 파랑이 어떻게 같은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빨강과 파랑이 같다는 점을 납득시키려면 컬러와 흑백이라는 상부구조의 대칭을 보여줘야 한다. 인간은 추상적 사고에 약하다. 추상은 개별적인 사실에서 공통요소를 뽑아낸다. 추상은 ‘다르다’가 아니라 ‘같다’이다. 인간은 사물의 다름을 쉽게 인식하지만 같음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이에 모형적 사고가 필요하다. 다름과 같음 곧 대칭과 비대칭을 베틀의 씨줄날줄처럼 조직하여 돌아가는 판도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모형적 사고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관점이다. 문제는 추상적 사고에 약한 인간이 정상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다름은 비교하고 분별하여 대칭시키는 짝짓기 방법으로 파악된다. 흑과 백, 남과 여, 좌파와 우파로 짝지어 비교함으로써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상은 외로워서 짝이 없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도 알아채지 못한다. 노무현을 알아보지 못하고, 김기덕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흐를 알아보지 못하고, 소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정상을 납득하려면 정상과 짝지어 비교할 또다른 정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완전성이다. 모형적 사고는 완전성에 대한 감각을 필요로 한다. 완전성이라 하면 신神의 전지전능함을 떠올리기 쉽다. 더 많은 것, 더 큰 것, 더 센 것에서 완전성을 찾기 쉽다. 이는 플러스적 사고다. 틀렸다. 그곳에 정상이 없다. 플러스로 가면 무한의 수렁에 빠진다. 아무리 큰 숫자를 말해도 더 큰 숫자가 있다. 완전성은 마이너스에 의해 달성된다.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더 이상 제거할 수 없는 0에 이르러 완전하다. 완전한 것은 방해자가 제거된 것이다. 이야기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방해자가 제거되어 둘의 만남이 완전해질 때 씨앗은 열매를 맺는다. 아기는 태어난다.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완결된다. 사건은 종료된다. 정상은 뾰족하다. 바늘끝처럼 가늘다. 마침내 0에 이른다. 방해자가 사라져서 0이 된 지점에서 손뼉은 마주쳐 소리를 내고, 견우와 직녀는 만나 하나가 된다. 몽룡과 춘향의 방해자인 변학도는 제거된다. 금이든 은이든 다이아몬드든 어떤 고립된 개체에는 완전성이 없다. 완전성은 둘의 만남에 있다. 씨줄날줄로 조직된 것에 있다. 방해자가 제거되어 둘의 거리가 0일때 완전하다. 바이얼린의 활과 현이 만나 멋진 소리를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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