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했다는점이 기대가 됩니다.
영화의 흥행 이런 것보다는
홍상수나 김기덕이 보여준 합리성과 부조리와의 대결이
저예산 독립영화 수준이 아니라
주류에서도 통하는 공식이 만들어지는가입니다.
선악대결로 가면 문학작품을 영화화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이미 80년대 이전에 다 해먹었고 재료가 바닥.
고수와 하수의 대결로 가는 것은 최동훈 감독이 좀 보여주고 있는데
요즘 좀 뜨는 영화들을 살펴보면 이런 구조가 있습니다.
근래에 매드 맥스가 그런데 잘 나가다가
선악구도 + 지략대결로 퇴행했습니다.
선악구도로 가면 포맷이 만들어져 있어서 작가나 배우의 재량권이 없습니다.
지략대결로 가면 악당이 유리한 점이 있어요.
악당이 뛰어난데 주인공은 더 뛰어나다는 이상한 설정.
악당이 너무 부각되어서 영화가 이상해지는 거죠.
매드 맥스와 같은 컨셉으로 가고도 매끄럽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면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조론에서 말하는 감각이입(감정이입이 아니라)
돌발상황+뒤뚱입니다.
룰이 없는 상황에서 룰을 만들어가는 거죠.
한 줄 정리
: 성공하려면 남들 안 하는 것을 하라.
조금 풀면
: 비경쟁 분야에서 놀아라.
강단그룹들로서는 죽다가 살아나도 구조론의 깊이를 모른다.
정부의 지원으로 푸로잭트를 수행하는 작금의 관행 하에서는 연구다운 연구가 불가능합니다.
어려운 경쟁을 뚫고 푸로잭트에 선정이 되기도 힘든 일이지만 계획한 연구를 온전히 수행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현실입니다.
분야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하겠지만 연구비를 지급하는 기관들이 집행하는 관행은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연구를 시작하기가 무섭게 결과를 보고하라는 독촉이 빗발치지요.
진행보고소, 중간보고서, 기말보고서, 최종보고서, 등등.
계속해서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서는 그럴듯하게 작품을 만들어야 하고,
연구 결과를 전문학술지 등에 실어야 하고.......
차라리 자비로 본인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하고, 그 연구의 결과물을 제시하고, 제시된 결과물을 심사하여 연구비를 정산처리하는 것이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연구를 위해 필요한 듯 합니다.
오죽하면, 연구비를 지원받고 시간과 요구에 쫒기는 연구는 절대 안하겠다는 연구자들이 나올까요.
조만간 세종시로 일하러 갈지 모르는데요. 또 우연찮게 지인들이 세종시를 다녀왔다는데 다들 아파트라던가 공사중인 건물들 청사규모등이 엄청나더라고 약간 흥분하면서 말하더군요. 그때 저도 든 생각이 그렇게 해주면 뭘하나....배신이나 하고 ㅎㅎ..
욕망이라는건 거짓말입니다.
그런 단어 자체가 원체 국어사전에 없습니다.
다 적들의 음모에 의해 꾸며낸 사기죠.
음모론자의 논리로 말하면. 보나마나 이게 다 노론 때문이죠.
부족민의 자연스러운 삶을 관찰해보면
실제로 인간에게 원래 욕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성욕조차도 없습니다.
벌거벗고 살면 밤낮으로 그 짓을 할거라는건 문명인의 선입견.
부족민에게 유일하게 욕망이 있다면 죽음에 대한 욕망인데
모의전쟁으로 서로 머리를 때려서 40살 넘은 남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일부 부족이 그렇다는 거죠. 물론 다 그런건 아니고.
그럼 욕망이라는 거창한 대인류 사기극이 왜 생겼느냐?
언제라도 그렇듯이 구조론은 '의하여'가 정답.
집단이 부추겨서 그런 겁니다.
군중의 움직임에 휩쓸리면 전진해야 하며
제 자리에서 버티다가는 압사당합니다.
자기만 죽는게 아니라 다 같이 죽어요.
패스가 오면 공을 재빨리 넘겨야 합니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태클 당합니다.
그건 욕망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손흥민이 패스욕망에 사로잡혀서 공을 찬 것은 아니라는 거.
한국남자들은 미녀와 결혼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다가
그게 환상임을 깨닫고 좌절해서 일베충이 되어버렸는데
그런 사회적 압박은 여러 복잡한 요인에 의해 생기죠.
군중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흐름에 휩쓸린 겁니다.
물론 지혜있는 남자는 월 120만원이면 시골에서 편안히 살 수 있다며
여자의 째려보기를 무시하고 혹은 개념있는 여자와 의기투합해서
욕망의 정글을 피해 본래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무개념 초보선수들은
내게도 로또당첨의 기회가 있을 걸로 믿고
욕망이라는 정글에 휩쓸려 들어가 결국 자신의 신체장기를 팔게 되죠.
욕망은 사회적 임무의 산물이며 원래 없는 겁니다.
잔잔한 호수에 바람이 불어 욕망을 일으킨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불난 집에서 불구경하다가 불길에 휩쓸린다는게 맞습니다.
사회적 에너지는 원래 존재하는 것이며
맞불을 질러서 에너지를 소진시켜야 합니다.
사회는 원래 동적존재이며
그 동의 불길이 내게 옮겨붙으면 그게 욕망이라는 거죠.
원문의 불교스님이 하는 개소리는 전형적인 인식론-귀납의 오류입니다.
욕망이 내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바통이 주어진 건데
외부의 누군가에게 바통을 돌려주지 않고
명상으로 욕망을 잡는다는건 거짓말입니다.
결국 인간은 원래 동적 존재, 에너지의 존재, 사회적 존재,
집에 불이 나 있는 존재, 전쟁 속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깨닫고
그 에너지를 정당하게 분출하는 집단으로 들어가는 것이 해답이며
혹은 정당한 불길을 일으켜 그 에너지를 합리적으로 소진하는 것이 해답이며
그건 제 자리에 앉아서 되는게 아니라
외곽으로 시선을 돌고 타자와 폭넓게 연대해야 가능합니다.
개인끼리 치고받다가 죽어가는 고립사회의 정글게임을 버리고
열린 세계로 나아가 모두가 사는 윈윈게임을 조직하는게 정답입니다.
인간은 원래 욕망의 존재가 아닙니다.
욕망은 사회적 불안, 스트레스, 압박, 경쟁심 이런 겁니다.
영웅호색이란 말이 있다는 것은
영웅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불안한지를 입증하는 겁니다.
이 여자는 나를 칼로 찌르지 않을 것이다 하는 안도감을 원하는 거죠.
근데 혹시 독을 탔을지 모르므로 겁이 나서 여자를 바꾸는 거죠.
영웅은 없고 영웅 역할을 맡은 배우가 있는 거죠.
그 배우는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거죠.
하여간 한국남자들이 아내에게는 닭을 오리라고 하고
엄마한테는 오리를 닭이라 해서 결국은 싸움붙이는 결과가 되죠. 고부갈등
감독 남편, 공동주연 시에미, 며느리, 조연 시누이,
구조론의 정답.. 닫힌 공간 안에는 절대로 답이 없다, 외부와 연결하라.
연역의 반대가 욕망이 아니라, 귀납이라는 거.
"귀납하지 말고 연역하라"가 정답. "고립되지 말고 연결하라"가 정답.
목숨 걸고 무대뽀로 불구경에 몰입하는 자들이 있지요.
바람 방향도 보고, 유사시 튈 공간을 확보하고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 상책!
욕망을 즐기는 자가 있다.
노태우 정권 말에도 이런 일이 있었고 새파란 고등학생들도 이런 얘기를 알 정도니 사학비리가 끝이없겠다 싶었고 재단설립자 전재욱도 후에 사법부의 심판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교육과 복지 분야종교는 공공의 견제, 사외이사를 통한 견제를 받지 않고선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사학법 개정, 이제는 이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