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 철학의 의미는 동기부여에 있다. 물질의 근본이 에너지라면, 인간의 에너지는 사회적인 동기다. 동기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얻어지며, 여기에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더하면 사건의 완결성이 된다. 인간은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려고 하며, 사회에서는 사건을 완결시키려고 한다. 인간에게 그것은 의사결정원리로 작동하며, 개인에게는 깨달음이 되고, 사회적으로는 권權을 형성한다.
◎ 자연 : 에너지≫시공의 완전성≫사건의 완결성 존재는 상호작용이며, 상호작용은 환경과 인간의 맞섬이다. 여기서 인문학의 전제는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우위다. 소극적으로 환경에 적응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환경을 통제하는데 인문학의 의미가 있다. 자연에서는 공간만 보지 말고 시간까지 보아야 하고, 인간에게서는 개인만 보지 말고 사회까지 보아야 한다. 거기에 자연의 생장점이 있고 사회의 방향성이 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철학이다. 상호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 탈레스
◎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알렉산드로스
◎ 레오나르도 다빈치
◎ 예수
◎ 석가
◎ 대승불교
◎ 공자
◎ 맹자
◎ 동중서
◎ 주희
◎ 왕양명
◎ 노자
◎ 장자
◎ 아우구스티누스
◎ 칸트
◎ 니체
◎ 샤르트르
◎ 마르크스
◎ 마오
◎ 프로이드 찾아보면 인물이 더 있겠지만 대략 이 정도로 정리하겠다. 예의 열거한 인물들이 실제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이는 필자의 구조론적인 해석이다. 철학의 중핵은 동기부여다. 물질은 에너지가 답이다. 에너지가 자동차도 굴리고 전구도 켜고 건물도 세운다. 밥이든 옷이든 집이든 다 에너지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삶의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완전성에서 온다. 인간은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고자 하며 거기서 에너지를 조달한다. 추한 것을 미하게, 악한 것을 선하게, 약한 것을 강하게, 느린 것을 빠르게, 죽은 것을 살아나게, 쓰러진 것을 일으키게 하는 데서 동기를 얻는다. 그것은 개인에게서 깨달음이고 사회에서 이상주의다. 예의 철학자들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근원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엔진이다. 단순히 미학적 완전성에 그친다면 약하다. 소승이 아닌 대승으로 나아가야 한다. 불완전한 것을 완성시키려는 의도가 개인적 취향이나 예술가의 근성이나 동물의 성충동이 아니라 사회의 불온한 공기에서 얻어질 때 힘이 있다. 집단의 스트레스가 진정한 동기를 부여한다. 에너지를 태워야 하는 것이다. 한 명을 움직이는 개인의 완성이 아니라 만명을 움직이는 집단의 이상주의라야 한다. 그것은 본래 자연에 있고 다시 인간에게 가져오며,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연역하고 다시 과학으로 일반화 시킨다. 엔진은 완전성이며 완전성은 공간의 대칭성을 시간의 비대칭성으로 바꾸어, 척력을 인력으로 바꾼다.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면 척력이다. 일정한 조건에서 만인대 만인의 사랑으로 바뀐다. 예수가 강조한 것을 다빈치가 입증했다. 그러나 불완전하고 석가의 아이디어를 보태야 완전하다. 처음 탈레스가 자연에서 완전성을 찾고자 했고,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인간에게로 가져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완전성을 묻고 다녔으며, 플라톤이 완전한 자연과 불완전한 인간의 관계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 곧 질료와 형상의 관계로 바꾸어 연역의 엔진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지식의 대량복제에 써먹었다. 지식은 졸지에 포드시스템으로 대량생산 되었다. 그러나 불완전하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가정법의 남용이다. 수학적 장치로만 유의미하다. 플라톤은 막연하게 그런게 있다고 치고, 일단 채워야 할 공란을 비워놓고 과감하게 사유의 모형을 만든 것이다. 이데아를 실물로 보여준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그것은 하나의 영감에 지나지 않지만 그 충격파가 거대한 맥놀이를 일으켜 이후 근대가 일어났다. 학문의 계보는 탈레스≫다빈치≫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여야 한다. 순서가 바뀌었고 불완전하지만 그런대로 포지션이 채워져서 그럭저럭 철학은 여기까지 굴러왔다. 동양에서는 석가가 다빈치다. 석가의 깨달음은 군주의 통치목적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와 군주의 불편한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에서 다빈치는 주역이다. 그러나 주역은 영감을 줄 뿐 점괘가 틀려서 쓸모가 없었다. 유교는 최종근거를 공란으로 비워놓고, 누가 꼬치꼬치 따지면 음양이니 오행이니 하면서 대충 둘러대곤 했다. 음양은 공간의 대칭성만을 강조하므로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오행은 비대칭적이나 음양과 맞지 않아 겉돈다. 한의사나 풍수사들은 음양과 오행의 논리를 그때그때 편한대로 가져다 쓴다. 엔진을 공란으로 두고 하부구조만 발달시키다 보니 어색하게 되었다. 음양론의 순환논리에 빠져 과학의 대량복제에 실패하였다. 굳이 말하자면 석가≫공자≫맹자여야 한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철학을 기독교가 가져다 쓰는 바람에 철학이 기독교와의 싸움이 되었다. 샤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모호하게 말했지만 그냥 교회 가지마라는 말이다. 본질은 영혼이고 구원이고 천국이다. 그런거 없다. 인간의 삶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영혼에 해당하는 깨달음, 구원에 해당하는 진보, 천국에 해당하는 이상주의는 현실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 샤르트르는 점잖게 포지션만 말했고 니체는 노골적으로 핵심을 짚었는데 마르크스가 옳았다. 강자의 권력의지가 아니라 약자의 저항정신이 진짜다. 더 완전성에 가깝다. 마르크스도 틀렸다.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 보다는 깨달음에 따른 순수한 열정이 더 강력하다. 그러므로 장자의 영향을 받은 마오가 더 진리에 근접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마오는 학교공부를 제대로 안했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불신이 있어서 지나친 정신주의로 기울었다. 이들을 각기 떼놓고 보면 모두 오류가 있고 한계가 있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커다란 지식의 나무 안에서 일정한 포지션이 있다. 각자 가지 하나의 역할은 해내고 있다. 그러나 탈레스≫다빈치≫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가는 패턴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 포지션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상 필자가 해석한 철학의 계보를 한 줄로 이으면 답은 명확하다. 존재는 상호작용이며, 그것은 환경과 인간의 맞섬이고,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우위로부터 인문학은 출범하며, 먼저 탈레스의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가서 다음 다빈치와 석가에게서 완전성의 엔진을 찾고, 소크라테스의 역설, 플라톤의 연역, 아리스토텔레스의 복제로 시스템을 돌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부단한 상호작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답을 아는 것은 과학이고 환경에 대한 인문정신의 우위에 서서 상호작용을 계속하는 것이 철학이다. 이 길로 가면 소승의 미학을 넘어 대승의 열정에 이른다. 상호작용은 추를 미로, 악을 선으로, 불의를 의로, 불신을 신으로, 무지를 지로 바꾸는 데서 에너지의 낙차를 일으켜 동기부여하며, 그 동기는 부단히 발전하고 진보하고 성장하는 조직, 팀, 자본, 국가, 세력, 사회에서 실현되며, 사회적인 권의 획득으로 구체화 되고, 그 권은 강자가 아닌 약자, 지배가 아닌 저항, 탐욕이 아닌 복수, 패권이 아닌 복원에서 참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며,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대칭적 분노가 아니라, 그런 오염이 없이 순수한 사람의 비대칭적 열정에서 더 강력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개인의 신념이나 충동, 욕망이 아니라 사회의 스트레스에 감염되고 동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큰 세상으로 나아가 호연지기를 얻어야 한다. 다빈치의 의미 밀로의 비너스상은 완전성을 반영하지만 약하다. 그 안에 에너지의 순환이 없다. 에너지가 들어가는 입구와 빠져나가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소승적인 미학에 불과하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13인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소실점에 잡혀서 전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비대칭, 그에 따른 팽팽한 긴장이 있다. 대승적인 미학이 있다. 비너스상을 보고 최후의 만찬을 봤는데도 머리에 총맞은 흔적이 없다면 실패다. 머리가 쾅 하고 뚫려서 구멍이 나야 하며 찬바람이 그 속을 왕래해야 한다. 세상을 통일적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제공한 거다. 이후 그 충격으로 근대가 불붙듯이 일어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공간의 대칭이고 사건의 완결이 아니라는 거다. 시간 속의 기승전결에도 찾아야 할 소실점이 있다. 그것은 석가가 해냈다. 다빈치와 석가를 합치면 구조론의 일의성이 포착된다.
밀로의 비너스상은 소승적인 내재적 완결성이 있다.
원근법이 적용되어 대승적인 사건의 완결성이 있다. 비너스상의 내적으로 닫힌 완결성이 아니라 거기에 관측자의 시선까지 포함하여 외적으로 열린 완결성이다. 예수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지구의 창조에서 심판까지, 13인에서 하느님까지가 통일성을 이루며 별개의 여럿의 집합이 아니고 원래부터 한 덩어리, 한 사건, 통째로 하나임을 역설하고 있다. 인간은 통합된 존재다. 잘 보면 예수님 머리 뒤에 후광이 있다. 그것이 없는 데도 그것이 있다. 이 두 그림을 뻔히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면 할 말이 없다. 8만 4천 법문이 이 안에 다 있다.
비너스상과 최후의 만찬을 합친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다. 천지창조는 약하지만 다빈치+석가로 가는 작은 단서를 제공한다. 공간의 대칭성과 시간의 비대칭성이 만나 일의성을 이룬다. 물론 비너스상과 최후의 만찬을 둘 다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세상을 통일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기초를 세운 사건이다. |
완전성은 에너지에 의한 상호작용에 따른 소통,
다빈치의 공간적인 소실점과, 석가의 시간적인 인과법에 따른
기승전결을 아우르는 일의성을 찾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추를 미로, 불의를 의로, 악을 선으로, 위를 진으로, 암을 명으로 바꾸는 것이며
이 둘을 차별하여 하나를 배척하고 하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성을 적용하여 밸런스 하나로 제어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그냥 수학적인 포지션만 지정한 건데 이 경우 에너지를 태울 수 없습니다.
에너지를 태우지 못하면 사회의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공리공론이고.
대승은 석가의 완전성에 에너지를 태웠고
맹자는 공자의 가르침에 에너지를 태웠고
둘은 실제로 사회의 문제를 해결했지요.
다빈치와 석가의 만남이 진짜입니다.
물질의 근본은 에너지이고, 인간의 에너지는 사회적 동기다. 물질과 인간은 설명이 되었으나, 시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요? 시간은 공간의 이동이라고 하였으나, 탈레스의 "시간과 공간과 그리고 물질의 삼위일체다"라는 설명에서 여전히 시간이 정의되지 않습니다. 시간에 대한 연구가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될수 밖에 없는 이유를 좀 알것도 같기는 합니다. 시간이 없으면 낙차도 없고, 완전성도 없어지는 건데, 혹시 이를 잘 설명한 철학자는 없는건가요?
김동렬/감사합니다. 시간은 무한하며, 과거 현재 미래가 통짜로 엮여져 있지요. 공간에 있어서 상호작용의 대칭성이란 말은 이해가 되는데, 시간의 비대칭성이란 말이 정확하게 안들어와서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시간은 운동이었고, 갈릴레오에게는 측정가능한 양으로 다가왔고, 뉴턴이래로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이 정립되었고, 아인슈타인에 의해 유연한 시간관으로 설명되다가 다시 시간은 과거나 미래가 구별없으며 흐르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동렬님의 비대칭성이 확 들어오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통짜로 엮여져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으로 쓰셨는지 몰라도 뭔가 함정이 있는듯 합니다.
시간의 비대칭성이 아니고 정확하게는 공간의 비대칭성입니다.
공간의 대칭성에서 시간의 대칭성으로 넘어가는 것이
공간에서는 비대칭성이라는 말입니다.
공간의 대칭성이 물질의 운동에 의해 비대칭으로 붕괴하는 것이
시간이라는 말이지요.
물질에 에너지가 작용하면 일단 대칭을 이루고
다시 그 대칭이 붕괴하는 형태로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은 반드시 거칩니다.
사실은 물질과 그 운동이 있을 뿐 공간도 시간도 없는 것이며
정확하게는 시공간이란 물질의 운동을 기술하는 관측방법일 뿐입니다.
시공간이란 관측자의 포지션을 배제하고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거지요.
물질과 관측자와의 관계가 공간적 관계냐 시간적 관계냐
대칭적 관계냐 비대칭적 관계냐입니다.
물질과 관측자와의 대칭적관계는 공간으로만 포착되고
비대칭적 관계는 시간으로만 포착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통짜로 엮여져 있다는 말은 제 나름대로의 표현 방식인데,
시간을 원래 마디로 나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원래 하나인데,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과학을 하기 위해서라도) 년, 월, 일, 시, 분, 초, 1/100 1/1000 등으로 나누어 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을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봐야하는지는 몰라도 인식론적으로는 상당히 자세히 연구된 것 같습니다.
위에 시간의 비대칭성이란 말에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시간을 공간의 비대칭성으로 설명한다면, 그건 좀 이해가 됩니다.
모든 사건, 모든 움직임, 변화가 시간 속에서 포착되는 것이니까요.
답변, 감사합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어서 복잡한데
대칭/비대칭 두 단어만으로 최대한 압축해서 설명하려니 무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운동 여러 표현을 쓰지만 실제로는 하나입니다.
그냥 사람이라고도 하고 신체라고도 하고 몸과 마음이라고도 하지요.
몸과 마음으로 구분한대서 몸 바깥에 마음이라는 몸이 하나 더 있는건 아니지요.
그렇다면 몸이 두개로 되잖아요.
대칭이라는 말은 원래 공간에만 쓰는 말입니다.
시간의 대칭이라는 말은 제가 임의로 쓴 표현이구요.
상호작용의 대칭이 공간이면 비대칭이 시간이라는 거지요.
그러한 비대칭은 공간의 바운더리를 정했을 때 파악이 됩니다.
바운더리를 한정하지 않으면 우주 안에 대칭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이 대칭에서 저 대칭으로 옮겨갈 뿐 언제나 어디서나 대칭입니다.
공간적으로 범위를 제한하면 그 공간 안에서
대칭이 되었다가 비대칭이 되는 형태로 운동은 일어납니다.
그 비대칭 부분을 시간이라고 한다는 거지요.
이 모든 것은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보면 공간은 대칭적이고 시간은 비대칭적인게 맞습니다.
시간은 완결성의 제한을 걸고 그 제한이 불일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점심시간이나 특정시간에는 갑자기 비대칭적으로 행동합니다.
점심시간에 밥먹으러 일제히 몰려간다거나.
특정시간에는 위아래가 없어지고 무질서해집니다.
그런 특징은 시간을 관찰하면 잘 보입니다.
이 설명은 잘 이해가 됩니다.
어려워요,,,,,제가 나이만 먹었지 한참,,,,,부족,,,,노력중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오갑니다.
1.지식이 대량으로 복제된다는 부분에서 동렬님이 세상만사에 대해 모두 훈수를 두어도 맞아들어가는 이유가 된다 싶습니다.
2.노숙본능을 이야기하시곤 했는데 결국 인간은 하는것 없이 한없이 작아지고 결국 죽어버리고 싶은 욕망과 무언가 완전해지고 싶은 열망사이에 놓인 것. 철학이란 완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 이루고 싶다는 생각에 대해 파고드는 것.
3.공자는 괴력난신을 멀리했는데 괴이하고 힘있고 어지럽고 신령스러운 것. 즉 동렬님의 본문속 석가와 다빈치가 찾아낸 것. (다빈치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은 이해를 못했습니다.) 공자는 한 사람의 일생에 그것까지 파헤치고 세상일에까지 관여하는건 불가능하니 주역의 큰 그림 정도면 사람 살아가기에 충분하겠거니 퉁치고,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가 있다고 한 것처럼 퉁치고 그 틀 아래에서 완전한 세상을 그려본 것.
4.김남주의 시를 읽으면 울끈불끈하다. 그런데 약점은 있다. 약자들은 항상 정의로운가? 약자들이 힘을 얻으면 세상은 정의로워지는가? 대기업노조가 사측에 대해 정의로운것 같지만 비정규직에 정의롭지 못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이 부분에서 완전하지 못하다. 이를 극복할 상위의 완전한 무언가가 목마르다. 이렇게 상위의 완전성, 모든걸 아우를 수 있는걸 찾아가고픈 욕심과 에라 모르겠다 지친다 - 하고 드러누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함께 존재하는 인간.
말도 안되는 단상을 두서없이 떠들었습니다.
밀로의 비너스상은 완전성을 반영하지만 하나입니다.
그 안에 에너지의 순환이 없습니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13인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비대칭, 그에 따른 긴장이 있습니다.
밀로의 비너스상이 소승이라면 최후의 만찬은 대승입니다.
비너스상을 보고 최후의 만찬을 봤는데도 머리에 총맞은 흔적이 없다면 실패죠.
머리가 쾅 하고 뚫려서 구멍이 나야 하며 찬바람이 그 속을 왕래해야 합니다.
세상을 통일적으로 바라보는 시야을 최후의 만찬이 제공한 거죠.
이후 그 충격으로 근대가 일어난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공간의 대칭이고 사건의 완결이 아니라는 거죠.
시간 속의 기승전결에도 소실점이 있습니다.
그건 석가가 했구요.
다빈치와 석가를 합치면 구조론의 일의성이 포착됩니다.
소승적인 내재적 완결성이 있다.
원근법이 적용되어 대승적인 사건의 완결성이 있다. 비너스상의 내적으로 닫힌 완결성이 아니라 거기에 관측자의 시선까지 포함하여 외적으로 열린 완결성이다. 예수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지구의 창조에서 심판까지, 13인에서 하느님까지 별개의 여럿의 집합이 아니고 원래부터 한 덩어리, 한 사건, 하나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 그림 두 개를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8만 4천 법문이 이 안에 다 있다. 비너스상과 최후의 만찬을 합친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다.
천지창조는 약하지만 다빈치+석가로 가는 단서를 제공한다. 공간의 대칭성과 시간의 비대칭성이 만나 일의성을 이룬다. 물론 비너스상과 최후의 만찬을 둘 다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
헉헉 거리며 42,195를 쫒아 뛴 듯하네요.
절대어의 향연입니다.
자연의 완전성을 모형화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군요
예수에 대한 표현 중에 원죄, 사랑, 구원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원죄라는 표현이 잘못되었고, 원래 원죄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관계의 파괴,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완전성의 파괴가 곧 죄라고 생각하는데 죄는 현상으로서 인식될 뿐이지 존재론적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이 관계의 파괴, 완전성의 파괴를 타락이라고 봅니다만, 타락의 상태를 원죄라고 이름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 타락의 상태를 원죄라고 표현한 신학자은 동렬님이 위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를 베껴먹었다고 표현한 아우구스티누스(기독교에서는 오랫동안 어거스틴으로 번역했음)인데 이 신학자는 기독교를 완전히 불완전한 존재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소위 말하는 어용인데, 이 양반의 천재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원죄가 있는 줄 압니다. 정당한 전쟁에 대한 이론도 이 양반이 세워 놓은 신학이론인데, 실제로 기독교의 성경의 내용 특히 그리스도가 선언한 사랑과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적어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그리스도 사랑의 완전성으로 표현한다면 더욱 더 앞뒤가 맞지 않게 되는 거지요.
과거의 원죄라기보다는 타락으로 인해 파괴된 관계를 다시 사랑으로 회복하는 것이 곧 구원이 되는 것이 구원이며 회복이며 하나로의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창세기 1장이 요한계시록 21,22장과 만나는 거고, 실락원이 복락원이 되는 것이며, 미완의 에덴 동산이 완성된 새 예루살렘으로 되는 거지요.
신의 완전성에 이르는 것이 결국 기독교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글에 늘 울림이 있습니다.
감솨
이런 개념들은
수학적인 포지션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너무 구체화시키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이비 목사들일수록 구체적인 사실로 몰아갑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목적이지요.
종교의 입장을 떠나 열린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
열린해석을 지금 기독교 내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역사 속에서 이런 열린 해석을 한 열린 사람들은 대부분 이단으로 찍혔거나,
고문과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열린 해석을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신이)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등등....
폐쇄성이 있는 사람은 이 땅과 저 하늘의 분리를 늘 주장하지만,
종교의 입장을 떠나 열린 해석을 하는 사람은 하나로 엮습니다.
그래서 일원론이 맞는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라고 믿는 거죠.
신과 인간 - 하나
나와 너 - 하나
선과 악 - 하나
천국과 지옥 - 하나
빛과 그림자 - 하나
타락과 구원 - 하나
남자와 여자 - 하나
부모와 자녀 - 하나
목자와 양 - 하나
등등
모든 것이 하나로 관계하는 거지요.
열린해석. 간만에 들어본 표현인데,
저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집단지성,
소통 등을 이루어가는 공동의 해석이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둥그런 원을 이루며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그런 공동의 해석이 필요한 거죠.
지금 기독교는 조금 안다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설교, 설파하는 사람들이 통제하는 거 맞습니다.
적어도 수준이 예수나 석가나 소크라테스 정도 되면 봐주겠습니다만......서도 ^^
잘 읽었습니다.
동서양 철학 2500년의 역사를 하나로 꿰는 통찰력에
경탄할 따름입니다.
구조론에서 이야기하는 '완전성'이라는 것을
플라톤의 '이데아'와 어떻게 다른 가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