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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논리는 그대로 자유의지를 긍정하는 논리가 된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과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은 완전히 같은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가르는 만남에 대한 것이다. MBC 서프라이즈에 방영된 이 실화에는 세 번의 중요한 만남이 등장한다. 로라와 설리반의 만남, 설리반과 의사의 만남, 설리반과 헬렌 켈러의 만남이다. 세 번의 운명적인 만남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이유는 구조가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길에 들면 중간에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설리반 선생님도 헬렌 켈러를 만나는 바람에 팔자가 꼬여서 무려 48년간이나 함께 해야만 했다. 거꾸로 말하면 단 한번의 만남이 이후 48년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것이다. 즉 아주 작은 결정이 굉장히 많은 것을 바꾼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이 운명에 지배되기 때문에 거꾸로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언제? 만남의 현장에서. 만날 사람을 만나면 완전히 바뀐다. 변호사 노무현이 부림사건에서 진우를 만나는 순간 인생이 바뀌었듯이.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말과 자유의지를 긍정하는 말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알아채야 할 사실은 방아쇠다. 방아쇠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사이에 있다. 그 지점은 반드시 어떤 만남의 형태로 존재한다. 만남을 거치지 않고 격발되는 일은 없다. 그 아무리 좋은 총이라도 누군가의 손가락을 만나야만 방아쇠는 당겨진다. |
여기서 막힌게 아니고 여기서 답이 나온 거죠.
원자나 소립자나 양자나 다 입자개념입니다.
구조론적으로 질은 입자가 아닙니다.
입자 이전 만남의 단계.
결혼이라는 입자는 없지만 부부라는 입자는 있습니다.
일단 가정이 있으니까 부부는 입자가 있는 거죠.
결혼을 질로 가정한다면 부부는 양자개념.
부부를 관측하면 실패, 결혼을 관측해야 합니다.
그런데 결혼은 어딘가에 존재하여 있다고 말할 수 있는게 아니죠.
부부 다섯은 데리고 올 수 있지만.. '결혼 다섯 가져와 봐' 이건 말이 불성립.
어디로 가져오는 순간 결혼은 사라져 버립니다.
이런거 이미지로 시뮬레이션 하기 어렵지 않을텐데.
원자냐 소립자냐 양자냐가 중요한게 아니죠.
뭐든 제대로 만나면 스위치가 켜져서 다른 길(기적)로 가게되고,
제대로 못 만나면 스위치가 안 켜져서 가던 길(평범)로 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