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ajunews.com/view/20131119081155786 나야 뭐 백일장에 상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문장력이라 일찌감치 시인되기를 포기했지만, 그래도 시에 대해 약간의 흥미는 가지고 있었다. 고은의 시는 내 고등학교 시절 습작을 떠올리게 한다. 졸라리 창피하다. 이건 시일까? 나는 고은이 '시어'를 득하지 못했다고 본다. 본질에서 그는 시인이 아니다. 물론 글솜씨가 나보다는 낫다. 그런데 왜? '나' 들어가면 그거 시 아니다. 반드시 그런건 아니지만. 왜? 관점의 문제 때문이다. *** "감히 나는 내가 흑조(黑潮)임을 선언하노라/내가 물 골짝 개울이 아니고/허허벌판 난바다를 휩쓸어/나의 길 한 마당을 이룬 흑조임을 선언하노라/감히 나는 달의 맹방임을/새삼스러이 선언하노라"(무제시편 3 일부) 나는 돼지가 되어서도/시인이 되련다/돼지가 되어사/꿀꿀/구정물 속 주동이로/새파랗고 샛노랗고/새빨간 새하얀/아흐 새까만/ 시 몇편을 꿀꿀 쓰련다/(궁한날) *** 시인이 되려면 먼저 시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나는타령' 하는 초딩이면 시의 관점을 얻었다고 볼 수 없다. (물론 고은의 시 중에 괜찮은 것 몇 편은 있다. 문제는 '이게 왜 시냐?'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는 거.) 그래도 최악인 정명석 시인보다는 낫다. 그런데 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고은은 정명석과 눈높이가 정확히 같다. 고은이 시인이면 정명석도 훌륭한 시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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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잘 쓰고 못 쓰고는 문장력에 달려 있지만,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일단 시가 아닌게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정명석이나 고은이나 둘 다 시인이거나 둘 다 시인 아니다. 뭣도 아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나와 타자를 통합하는 제 3의 포지션이 획득되었을 때 비로소 시가 된다. 쉬운 말로 객관화. 시적 긴장을 유발하는 내부의 조형적 질서가 반드시 갖추어져 있어야 하며, 이는 언어가 그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시인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성을 얻을 때 얻어지는 것이며, 그게 안 될때 독자의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거. 내부에서 뜻이든, 소리든, 운이든, 속도감이든, 리듬감이든 반드시 대칭을 만들고 다시 그 대칭을 깨뜨리며, 인식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삼류 시 백 편을 썼어도 걸작 하나가 있어서 그 사람을 다시 보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괜찮은 시가 꽤 있어도 전혀 시가 아닌 몇 편 때문에 모두가 똥값이 되는 경우도 있을 터이다. 이문열처럼 말이다. 내 입장에서 고은은 후자다. 그의 시들 중 절대 다수는 납득할 수 없다. 못 썼다는게 아니다. 이런 식은 곤란하다는 거다. |
JMS의 그 정명석인가요?
그렇소.
시집이 한 두권 있는게 아니오.
진짜 손발이 오그라들고 숨이 턱턱 막히는 명시 있었는데 못 찾았소.
검색하기도 귀찮고.
같은 맥락으로 요즘 인기 드라마나 영화 대중가요를 봐도 그러한것 같지 않습니까?
내용을 보면 누가누가 더 찌질하냐 대결 하는것 같습니다. 그런꼴을 한시간이상
본다는 것은 고문이죠 부분을 담으면 어리석고 추하며 전체를 담으면 경이롭고 아름답지요
그 시가 노래로 영상으로 또는 소설 등등으로 재창작되지 않는다면 그 시는 시가 아니지요.
개인적으로는 서정주 박남준 신경림 다 똥이요. 노예의 알랑방구, 지식자의 치기, 농촌을 이해못하는 먹물의 푸념
그래도 교과서에 나오는 시인들인데 인정사정 안봐주시는 군요 다 똥이라니....그러면 교과서를
뒷간 갈때나 써야 하나....!
교과서가 시를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요.
개인적으로 시는 좀 비릿하고 끈적끈적한 맛에 읽는데, 정명석이나 고은이나, 어째 다 교주병에 걸렸는지...
교주병에 걸리고, 잘난 척, 있는 척 쩔어도 서정주는 좋아함.
좋아하는건 각자 마음이겠지만
어디가 어떻게 좋은 지는 궁금하오.
글 읽은 선비의 기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독창적인 내부의 조형적 질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의 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서정성? 그건 원래 3류, 안쳐주는 거
그림으로 치면 중학생이 그리는 풍경화.
시대를 담아내는 사실주의도 아니고
지식인의 기개를 담아내는 추상화도 아니고도
깨달음의 묘미가 있는 인상파도 아니고
동요도 아니고 가곡도 아니고 뽕짝도 아니고
명료하시군요!! 왜 똥인지 감이 잡힌듯 합니다 그러면 동렬님께서 생각하시는 시 다운 시는
어떤게 있는지 추천 좀 해주세요 그러면 뭐가 진정한 시인지 확실이 알수있을것 같습니다.
시 다운 시는 많습니다.
누구를 추천할만큼 제가 시를 좋아하지는 않고
저는 세가지만 시로 쳐 줍니다.
두보 스타일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즉 정치적인 기개가 있는 시. (다산 시는 두보 시를 모방한 거. 다 그렇지만)
이백 스타일의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한 전율하게 하는 시.(이백 시는 3류 연애시도 많으나)
이상 스타일의
새로운 형식의 실험.
내가 경멸하는 시는
1) 퀴즈시.. 지하철에 붙어 있는 제목을 봐야 의미를 아는 말장난.
2) 연애시.. 300만부를 팔아치우지만 여중생을 위한 너절리즘.
3) 서정시.. 교과서 제작을 돕는 목적의 교육부용 어용시.
찾아보니 두보와 이백시는 한자어가 많아 보기힘들로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수
있을것 같고 이상시는 너무 추상적이라 오래 읽고 씹어야 제대로 맛을 느낄수 있겠네요 검색해서
모니터로 읽기에는 눈 아프네요 책을 구해서 봐야할듯 이상같은 추상적인 시는 읽다가 이해가
안가면 짜증과 열등감에 사로잡힘 모든 천재들은 보통언어 방식으로 하면 안되고 자기마음데
로 토해내야 성에 차는듯
이상 시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내용인데
이해가 어렵다고 하면 제겐 그게 절망적입니다.
그럼 더 쉬운 걸로 갑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유치원생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인데
그것도 어렵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다니깐요.
초등학교 졸업한 사람은 다시 못들어가나요? 다시 들어가거나 초등학생한테
배워야 겠네요.ㅋㅋ(서울 골목에 애들노는 소리가 필요한데 소음과 싸움소리
뿐이고 저출산 국가으로 가니....ㅜㅜ )
아무 의미 없다구요? 그냥 읽으면 되는겁니까? 그냥 읽어보니 역시나 동렬님께서는
공간을 얘기하시는 같군요 그냥 공간에 들어서라는 말씀이신거죠?
공간을 인식 못한것은 아마도 야동을 많이봐서 그런가 아니면 아직 수준이 성적
집착이 남아서 그런지 어떤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했다 느끼지
못했다 고 생각하는것 같습니다
이 얘기가 아니시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롬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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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동화작가 인 미야자와 겐지의 시 "바람에 지지 않고" 이오.
저한테 시 추천을 부탁한 건 아니지만 제가 과거에 좋아했던 시 라 추천하려고 했는데 잘 나가다가 막판에 "나는"이 나와서 파이구려..ㅎㅎ
서정주 시를 읽으면 통쾌하단 느낌이 들어요.
꾸미지 않고 위선 떨지 않고
부박하면 부박한 대로
악하면 악한 대로
욕망하면 욕망한 대로
맨몸뚱이 맨살 같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중기 후기로 갈수록 시들이
좀 수다스럽고 억지스럽고
겉멋만 잔뜩 들고 매너리즘도 보이지만,
어쨌든 초기의 시들은 그랬습니다.
천상의 시가 뭔지 과문한 내게
서정성, 삼류라 구리다고 핀잔해도
나는 그런 시들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하긴 무협지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임성한 팬도 많습니다.
다만 글자 아는 사람들이 그런 자들을 상대하지 않을 뿐.
마음속에
달과 초목만 남는군요.
진짜 저 위에 있는 시들은 너무하네요. 성의가 없어.
인터넷 서핑하다가 우연히 들렸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그냥 동렬씨로 부르겠습니다.
시평이 참 모난돌입니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지요. 물론 동렬씨와 저와 의견도 다르구요.
1. 시에서 단지 "나"가 있던 없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시에서 나가 없어야 한다거나, 사랑타령이 아니어야 한다거나, 서술형이 되어야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시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들이라 생각합니다. 동렬씨가 말한 "나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시가 서술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과 어느 정도 맥을 같이하는 것 같구요. 나가 있던 없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가 얼마나 적절하게 쓰였는 지가 중요하겠지요. 서술형도 마찬가지지요. 호흡으로 보면, 길게 가거나 짧게 거거나, 부드럽게 가거나 거칠게 가거나, 숨이 컥컥 막히다가 갑자기 터지거나, 길게 가다가 갑자기 짧게 끊어지거나, 등등 모두가 가능합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사랑타령도 거기에 맞게 시어가 선택되면 그만이지요.
동렬씨가 위에서 말한 고은 시인의 시에서 "나"는 적절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2. 시가 습작수준이라구요. 너무 단편적인 시각입니다. 시인들이 발표한 시들이 모두 잘 쓰여진 시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는 시들을 많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본 위대한 시인들도 분명 좋은 시들이 한 두편은 있고, 그 한두편으로 그 사람의 위대함을 보지요. 고은 시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청년의 기상을 뿜어내는 시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은 시인은 청년의 가슴을 지닌 시인이지요.
물론 동렬씨의 의견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제가 존경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인 고은 시인에 대해서요. 고은 시인의 말씀처럼 유성우처럼 시상들이 쏟아질 수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발표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많은 시들을 보년, 이것들이 시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의문도 듭니다. 특별히 고은시인의 경우에 시상이 매우 풍부한 것으로 보이는데(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안으로 담고 담아서 마지막으로 피어나는 하나의 시를 발표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렬씨의 글을 보면 어쩐지 모난돌이라는 떠오르네요. 편향된 논리,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비판적 사고가 보입니다. 사람들의 다양성, 시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개방적 포용적 사고가 훈련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남의 성과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말할 때는 한번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렬씨. 생각나는데로 글을 쓸 수 있으나 그 글이 어떤 사람에게 대한 비판일 때는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가슴에 품고 다듬어서 상대방이 충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래야 동렬씨의 글이 그 글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 글은 상대방에 상처를 주고 또한 상대방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지요.
으악. 그 정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