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탄 만화는 불청객이 박은하 집에 나타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야스민이 브렌다의 집으로 찾아오는 것과 같다. 제목에 불청객이 들어가지 않은 구영탄 만화는 예외다.(내막이 있다고.) 문제는 이야기의 복제능력이다. 주인공이 어딘가로 가는 시간구조보다 주인공이 어딘가로 오는 공간구조가 더 복제능력이 좋다. 큐브처럼 한 공간에서 맴돌므로 영화로 찍어도 비용이 적게 든다.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4시라도 그렇다. 오후 4시만 되면 불청객이 온다. 브렌다가 야스민을 쫓아내려 하듯이, 박은하는 구영탄을 쫓아내려 한다. 노통브의 주인공 역시 어떻게든 방문자를 쫓아내려고 한다. 문제는 이야기의 결말을 어떻게 맺을까이다. 시간구조로 가면 방해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종결된다. 방해자를 제거하려면 방해자가 나쁜 사람이어야 한다. 이야기는 상투적인 권선징악 구조로 간다. 이때 작가들이 쓰는 방법은 나쁜 용가리의 출현이다. 성동일이 출현한 미스터 고도 나쁜 고릴라가 등장한다. 그런데 악역의 등장은 개연성이 없다. 소림축구는 잘 나가다가 갑자기 나쁜 팀이 등장한다. 나쁜 용가리, 나쁜 고릴라, 나쁜 축구팀.. 이상하다. 왜냐하면 그 나쁜 것이 없어도 이야기는 충분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나쁜 주인공은 단순히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서 억지로 투입되는 것이다. 나쁜 축구팀이 나타나기 전에도 소림축구는 충분히 재미가 있었다. 대개 나쁜 주인공이 나타나면서 시시해진다. 설까치가 한창 잘나가는 판에 꼭 마동탁이 나타나서 재를 뿌려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좋은 영화들은 페미니즘의 어떤 속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질이 입자를 낳는 구조나, 힉스장이 힉스입자와 응응응을 해서 16개의 소립자를 낳는 구조나 낳음이라는 여성의 공통된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때 구조가 복제된다. 구조의 복제가 훌륭한 결말이 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야기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다작을 할 수 있다. 닭이 알을 낳듯이 작품을 계속 낳을 수 있다. 악당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다. 공간이 최종적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구조는 질과 입자의 관계를 입자와 힘, 힘과 운동, 운동과 량의 관계로 복제한다. 그것으로 결말을 삼는다. 김기덕의 풍산개는 남북한의 한반도공간을 작은 지하실공간으로 압축한다. 구조가 복제되는 것이다. 바그다드 카페는 사막이라는 넓은 공간을 브렌다라는 한 인물 내면으로 압축해 넣는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인생이라는 넓은 공간을 물 위에 뜬 절이라는 작은 공간에 압축해 넣는다. 해안선이면 장동건 안에 남과 북이 있다. 더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완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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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통브의 생명의 한 형태와
오후 4시는 아주 유사한 이야기라고 생각됨.
불청객의 방문 > 자신의 오랜 강박관념에서의 탈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