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2&sid2=252&oid=081&aid=0001946528
마녀사냥이 처음 나타난 것은 15세기 초반 마녀사냥이 극성기는 1580년부터. 기온이 조금 회복된 1800년대부터 마녀소멸.
마녀사냥
이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종교재판은 악마의 주장을 따르고 다른 사람과 사회를 파괴한다는 마법사와 마녀를 처단하기 위한 지배수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17세기 말 마녀사냥의 중심지였던 북프랑스 지방에서는 3백여 명이 기소되어 절반 정도가 처형되었다. 마녀사냥은 극적이고 교훈적인 효과 덕분에 금방 번졌고,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켰다.
1582년 바이에른 어느 백작의 한 작은 영지에서 한 명의 마녀가 체포되었다. 이 마녀의 체포에 연속으로 48명이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당하였다. 1587년 도릴 지방의 약 200여 촌락에서 1587년부터 이후 7년간 368명의 마녀가 적발되어 화형당하였다. 1590년 남독일의 소도시 네르도링켄에서 시장의 제안에 의하여 시의회는 거리를 나돌아다니는 마녀를 철저히 일소하도록 결의하였다. 이후 3년간 32명의 마녀가 화형 또는 참수되었다.
1590년 소도시 에링켄에서 65명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1597~1676년에 197명의 마녀가 화형당하였다. 소소크만텔 승정령(僧正領)에서는 1639년에 2,428명, 1654년에는 102명이 처형되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 영토가 된 스타이엘마르크 지방에서 1564~1748년에 1,849명이 소추되어 1,16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나노수 지방에서는 1629년부터 4년간 2,255명이 마녀로 소추되었고, 뷔르튄겐 지방에서는 1633년 이후 3년간 11명이 처형되었다.
튜링겐 숲에 인접한 게오르겐탈이라는 인구 4천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1652~1700년에 64회의 마녀재판이 실시되었다. 반베르크 승정령에서는 1627년 이후 4년간 화형당한 마녀가 285명이었고, 그 이후 30년에 걸쳐 이 재판소에 계류된 마녀재판은 900건을 넘었다. 이 승정령의 인구는 겨우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뷰르스부르크 승정령에서는 1623~1631년에 화형당한 마녀가 900명에 달하였다. 1627년부터 이후 연간 29회의 재판에서 화형당한 157명의 희생자를 보면 잡다한 연령과 계급, 직업의 사람들이 혼재해 있었다. 시의회의원, 고급관리의 부인, 시의회의원의 처자, 그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자매, 8, 9, 12세의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루다에 살고 있는 바루다세르 후스라는 마녀재판관은 19년간 700명의 마녀를 화형시켰는데, 자신의 일생동안 1천 명을 처형하기를 소원하였다고 한다. 로트링겐에 살고 있던 니콜라스 레미라는 사람도 재직 15년간 화형시킨 마녀가 900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마녀사냥의 물결은 15세기 이후 이교도의 침입과 종교개혁으로 분열되었던 종교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법과 마녀는 그 시대가 겪었던 종교적 번민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던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과 함께 마녀사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중세사회의 혼란이었다.
마녀사냥은 개인적·집단적으로 농촌사회가 분열되고 개인들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곤 하였다. 종교전쟁, 30년 전쟁, 악화되는 경제상황, 기근, 페스트와 가축들의 전염병이 당대 농촌사회를 휩쓸었던 불행이다. 사람들은 연속된 불행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아냈고, 마침내 불순한 사람들인 마법사와 마녀의 불길한 행동에서 찾아냈다.
공동체의 희생양으로 지목된 사람들에 대해 심판관은 개인간의 분쟁을 악마적 마법의 결과로 해석하고 자백을 이끌어냈다. 자백하지 않는 자에게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심문과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당시에는 이탈리아 법학과 캐논법을 통하여 유럽 여러 나라가 이른바 규문주의(糾問主義) 소송절차를 채택하고 있었다. 이 소송절차에는 고문이 합법화되어 있었다. 마녀는 바로 이 고문의 소산이었으며 이것을 정당화시키는 규문주의 소송절차의 당연한 결과였다. 고문은 거의 모든 마녀재판의 필수적인 하나의 요소로 등장한다.
그리스도교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을 당시에는 신에 대한 반역이나 모독은 그 어떠한 범죄보다 중죄였다. 처음에는 마법의 유형에 따라 달리 취급하였지만 나중에는 마녀라는 것 자체만으로 화형·참수·교수 등의 엄벌을 받았다. 독일·영국·프랑스·스위스·핀란드·에스파냐 등지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을 1만 건 이상 분석한 로버트 무쳄블래드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마녀로 기소된 사람 가운데 거의 반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광란을 연출하였던 마녀재판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의 진전과 더불어 이성적 세계관과 과학 정신의 대두는 불가피한 시대정신이 되었고 이것은 신학에 기반한 과학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이로써 불합리의 극치인 마녀재판도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되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마녀의 고문과 그에 따른 화형도 사라졌다. 독일의 경우 1749년 뷰루소부르크에서 1건, 1751년 아인팅겐에서 1건, 1775년 겜텐에서 1건의 마녀재판이 기록되었고, 7년 뒤인 1782년 스위스의 게랄스라는 지방에서 아인나 겔티라는 마녀가 고문 끝에 참수형에 처해진 것을 끝으로 마녀재판은 유럽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악마와 마법 그리고 마녀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신념은 지배계급과 당시의 지식인인 신부와 법관들이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이었다. 마녀사냥의 주된 공격대상은 과부 즉 여성이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이란 원죄로 각인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악마의 심부름꾼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있었고, 여성의 육체 자체가 두려움을 자아낸 것이다.
마녀사냥이 그리스도교 이외의 어떤 사상과 움직임도 용납할 수 없었던 중세사회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마녀라는 이름의 희생양을 통해 대리해소하는 동시에 마녀를 따돌린 '우리 사회'는 안전하다는 만족감과 감사함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사회적 배제·통합기제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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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출현 빈도와 빙하의 확장은 정확히 일치한다는 불편한 진실.
중세가 1000년을 갔던 것은 1000년전후로 기후가 올라가서 1300년까지는 따뜻한 기후 였기때문에
추운 기후보다 상대적으로 농산물을 많이 생산하여 체제가 안정되어 그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르네상스 문헌들을 읽다보면 르네상스가 시작될 때 이탈리아는 경제불황이 닥쳤지만
페스트로 인구가 줄어들어 경제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1400년 전후로 기후가 하강하여 상대적으로 농산물 생산이 적어 사회가 혼란해지고
그 혼란을 전가할 대상을 적은 것이 "마냐사냥'이 되지 않을 까 생각됩니다.
그럼, 1400년 이후의 소빙하기에 유럽사람이 다 굶어 죽지 않는 이유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신대륙에서 들어여 감자때문이기 아닐까 생각됩니다.
조선시대의 이상기후 (책이 나온 걸로 아는 데 책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아래의 개인 블로그
배교수는 이상기후로 인한 기근은 영남 등 원격지 곡물 구입과 곡물 상인의 활발한 활동 등을 가져와 지역간 곡물 이동, 곡물의 상품화를 진전시켰고 나아가 곡물시장의 통합과 유통경제의 발달에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기후변동이 인간에 미친 영향을 발전적으로 결론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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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후가 기근 및 사회혼란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자본주의 발전의 한 요인이기도 했군요.
최근 다운로드해서 본 영화가 그림형제의 헨젤과 그레텔을 모티브로 만든 마녀 사냥꾼 이라는
액션 영화였는데 배경은 중부유럽인 독일로 기억합니다.
결국 기온이 하강하며 중부 유럽은 농작물 수확이 안되어 마녀사냥 놀이를 하였고
상대적으로 따뜻했던 남부 유럽은 번성했던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엘니뇨가 명-청나라 몰락 불렀다
역사의 주체로서 인간 행위에 초점을 맞춰 왔던 근대역사학에 대한 도전으로서 기후의 영향을 강조하는 연구들이 잇따라 소개되고 있다.
최근 출간된 ‘자연재해와 유교국가’(일조각)는 중국 한대(漢代 )의 자연재해가 유교를 국가 이념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인 김석우 박사의 2003년 서강대 박사학위논문을 발전시킨 이 책은 중국 한대 역사기록에 나타난 자연재해와 이에 대응하는 황정(荒政·기근때 백성을 구하는 정책)을 분석했다.
“중국 24사 전체가 재황(災荒 )사가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양의 사서에는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에 대한 기록이 수두룩하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부덕한 정치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이해한 재이(災異)사상의 산물로 간주해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는 한대의 재해기록 중 70%는 신뢰할 만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중 전한(前漢)시대는 한대부터 당대까지 1000여 년 중국역사에서 황허(黃河) 강의 범람피해가 가장 컸고, 후한시대는 청대 다음으로 지진피해가 컸다. 이렇게 점증하는 자연재해는 통일국가시대인 한대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국가의 안정적 유지가 국정운영의 첫 번째 목표가 됐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이 과정에서 ‘유교의 국교화’에서 ‘제국의 유교화’로 옮겨갔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황제통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교를 적극 동원했다면 후자는 자연재해 증가로 인한 민심이반을 막기 위해 민본주의를 강조하는 유교를 수동적으로 채택했다는 설명이다.
‘엘니뇨: 역사와 기후의 충돌’(새물결)은 세계적 기상이변의 주범으로 꼽히는 엘니뇨가 인류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추적했다. 이 책은 1812년 나폴레옹 군대와 1941년 히틀러 군대의 러시아침공 실패가 엘니뇨로 인한 혹한의 결과이며 중국 명과 청의 몰락도 각각 1640∼41년과 1877∼78년 엘니뇨에 의한 대기근의 산물임을 주장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최근 열린 한림과학원 수요세미나에서 조선왕조실록 상의 기상이변의 83%가 1500∼1750년에 집중됐으며 이는 17세기 유성(운석)과 혜성 등의 지구 대기권 진입으로 인한 기상이변이 급증했다는 유럽의 ‘외계충격설’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런 기상이변은 종교와 연결돼 유럽에선 16세기 중반부터 나타난 ‘마녀사냥’과 종교개혁으로, 천재지변을 정치문제로 인식하는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선 사화와 당쟁으로 표출됐다”고 주장했다.
http://psychonomics.tistory.com/2
http://eyewall88.blog.me/30157703623
이거 정말 쩌네요. 마녀사냥이 소빙하기와 일치하는 군요.
동양권에서도 이걸 한 번 찾아보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