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류 연구의 권위자 프란스 드 발의 신작 <보노보와 무신론자>를 소개합니다.
"연구진은 침팬지 앞에서 막대를 이용해 비효율적인 동작을 포함하여 사탕을 꺼냈습니다. 침팬지는 효율적인 동작과 비효율적인 동작을 곧 구별했고, 효율적인 동작만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동작을 본 4살난 인간 아이는 불필요한 동작을 포함한 모든 동작을 따라했습니다. 곧, 아이는 실험자에게 더 많은 신뢰를 가진 것 처럼 보였고, 그 결과 “현실적으로 무가치한 일에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는”, 곧 드발(de Waal)이 말하는 “미신적인 소질”을 보였습니다.
존경받는 영장류 동물학자이자 공인된 무신론자인 드발은,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인간의 비합리성이 종교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합니다."
---페이스 북에서 퍼옴---
보통 과학자들이 이런 헛소리를 잘하는데,
종교의 기원에 관한 프란스 드 발의 헛소리를 정리하자면,
-침팬지는 효율적인 동작만 따라하는데, 인간 아이는 비효율적인 동작까지 다 따라한다
-인간 아이가 보이는 실험자에 대한 신뢰와 모방행동=현실적으로 무가치한 일에 맹목적 믿음을 가지는 미신적 소질(비합리성)
-이러한 인간의 타고난 비합리성이 종교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함
드 발의 논의의 핵심은 인간 아이에게 미신적 소질 즉, 비합리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 그리고 그 비합리성이 종교의 진화의 열쇠라는 가정임.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여전히 <입자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의사결정과 관련이 있으며 입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에 있어 침팬지처럼 단기적 합리성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인간처럼 장기적 합리성을 추구하느냐의 문제로 보아야 함. 그리고 이는 결국 구조론에서 말하는 진화의 현장에서의 생존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세력전략을 선택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반대말로 말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비합리적 의사결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합리성과 단기적 합리성이 있고 단기적 합리성이 생존전략이라면 장기적 합리성은 세력전략입니다.
장기적 합리성: 단기적으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길게 보면 결국 합리적인 의사결정. 예)인간 아기의 모방행동. 신뢰행위. 동물과 비교하여 터무니 없이 긴 양육기간. 종교의 진화원리. 공간+시간적 대응
단기적 합리성: 단기적으로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길게 보면 불합리한 의사결정. 단기적인 상황에는 성공적으로 대응하지만 장기적인 변화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함. 예) 효율적 동작만 사용하는 침팬지. 동물들의 짧은 양육기간. 공간적 대응.
인간은 유전자에 내재된 생존적응적 행동 레파토리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화에 담긴 다양한 세력적응적 행동 레파토리(춤, 음악, 미술 등)를 함께 습득하면서 적응의 폭과 깊이를 늘렸고, 그 결과 침팬지나 사자, 호랑이처럼 특정 환경에만 맞춤형으로 적응하여 생존하는 대신 사막의 폭염부터 혹한의 북해까지 그야말로 발길닿는 모든 곳에서 환경에 <조응>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 역시 이러한 인간의 세력전략의 일환으로 보아야 합니다. 종교는 인간이 장기적 합리성을 추구함에 따른 산물입니다. 당장의 합리적 의사결정에 종교는 분명 방해가 됩니다.
지금 당장 토끼를 사냥하지 않으면 저녁을 굶을 판에, 사냥 전에 기도한다고 잠깐 눈 감았다고 토끼를 놓치는게 종교의 단기적 비합리성이라면, 그렇게 기도를 함으로써 공동체의 삶에 의미와 활기를 불어넣고 집단의 의사결정 속도와 밀도를 높이는 것은 종교의 장기적 합리성입니다. 즉, 종교는 인간 존재의 비합리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합리성의 추구, 공동체의 세력 전략에 따른 산물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종교들은 처음엔 세력전략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생존전략으로 끝납니다(산동네에서 시작하면서 교세를 확장했지만 결국 여의도에 고립된 여의도 순복음교회처럼). 하지만 종교가 본질적으로 비합리성의 산물이 아니라 나름 인간이 장기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자체를 믿는 다는 것은 미신이고 비합리적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믿음이 실제로 사람들을 모으고 하나의 기적담을 공유하고 전달하고 재현하면서 그로 인해 교회라는 세력의 의사소통 밀도와 속도를 높이고 성장하는 것, 즉 인간의 의사결정이 세력단위로 이루어지게 한다는 점은 합리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가 발달한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세력전략은 전반전부터 시작하는 경기고
생존전략은 후반전부터 시작하는 경기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계급, 신분, 아이큐, 국가, 이름, 성별이 정해져 있습니다.
태어나서 이제 내 이름부터 짓고, 내 성별을 정하고, 내 국가를 선택하고?
그런거 없어요. 태어나면 이미 너는 천민, 너는 남자, 너는 한국인
너는 멍청이, 너는 왜소한 체격, 너는 내성적 성격, 너는 AB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이생은 이미 후반전입니다.
스코어는 3 대 1로 지고 있어요. 그게 생존전략입니다.
반면 태어나자 이제 인터넷 시대가 시작되려 하고
태어나자 이제 스마트폰 시대가 시작되려 하고
태어나마 이제 한국이 세계무대에 데뷔하려 하고
많은 것들이 제로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는 판이면 세력전략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판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거죠.
동물들에게는 많은 것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후반전 하고도 연장전 아니면 승부차기입니다.
그러므로 먹이를 획득하는 가장 빠른 길로 곧장 가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는 많은 것들이 아직 미결정 상태입니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결정해야 하는 거죠.
바둑으로 치면 옛날 한국의 순장바둑은 16점을 미리 놓고 시작합니다.
반면 현대의 바둑은 텅 빈 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죠.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 세력전략입니다.
미리 상황을 정해놓고 임무를 부여받고 들어가면 생존전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