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색계>는 여자 주인공(왕지아즈 - 탕웨이)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몇 번을 보아도
여자 주인공의 선택이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도리어 암살하려고 했던
친일파 '이(易)'선생(양조위)을 살려주는 것
-- 그 결과로 자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주변인도 거의 대부분 잡혀서 사형당함--
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여자는 원래 잘해주는 남자에게 넘어가기 마련이다'
'여자는 원래 돈과 권력을 가진 남자를 좋아해'
라고 넘기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트에서
<빈곤층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와 <바그다드 카페>에
대한 글을 읽어보니 조금 실마리가 잡힐 듯 합니다.
이 영화는 부모와의 이별로 혼자가 된 왕지아즈(탕웨이)가
연극반 -> 항일운동 -> '이'선생(양조위)을 선택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연극활동, 미인계를 쓰는 스파이활동 등은
고립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끈이 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이 '이'선생과의 '성관계'로
대체되니 그녀의 마음은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왕지아즈는 '이'선생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자
이렇게 크고 화려한 반지는 끼우고 다닐 수 없다고
하며 빼려고 합니다.
그러자 '이'선생은 '내가 지켜줄 테니 계속 끼우고 있어라'고 합니다.
이 순간 다이아몬드 반지는 단순한 보석이 아니라
'이'선생과의 심리적 연대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됩니다.
나중에 왕지아즈가 잡혀가게 되었을 때
자살용 알약을 삼키지 못했던 것도
알약을 든 손가락에 그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그 장면에서 왕지아즈의 망설이는 얼굴과
알약과 반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
종합하자면, 왕지아즈는 갑자기 변심해서
조국과 동지들을 등지게 된 것이 아니라
고립된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을
따라간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왕지아즈와 '이'선생 사이의
정사씬을 격렬하게 처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극단적인 고립 상태에 놓여있는 남녀가
새로운 유대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를 시각적으로 형성화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네티즌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정사씬과
음모노출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은
'감독이 숲을 가리키고자 하는데
관객들은 나무만 보는 수준을 넘어서서
나무에 낀 이끼만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 영화는 왕지아즈에게
그리스 비극과도 같은 결말을 예고하게 됩니다.
의심많은 친일파 '이'선생의 경계심을 허물고
그를 암살 직전까지 몰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왕지아즈가 정말로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는
조국과 동지를 배반하고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영화 제목의 '색'과 '계'는
각각 '고립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성'과
'적과 아군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전쟁상태 하의
생존 본능'이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지아즈의 죽음은
인간 본성에 속하는 '색'이 문명의 부산물인 '계'와
만났을 때 '색'이 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진짜 비극인 것은 바로
본능적으로 '색'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인류가
문명의 산물인 '계'의 세계와 충돌이 발생했을 경우
반드시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현실을 반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치는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이데올로기적 가치 만큼이나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본성도 강렬한 것임을 드러낸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문열 그 자체죠.
여자 주인공의 선택이 이해 가지 않는 상황이 맞다고 봅니다.
똑같이 색에 빠졌는데 왜 여자만 조국과 동지를 배반해야 했을까요?
여자만 진정한 사랑이고 남자는 대충 육욕이었나요?
결국 관객이 음모 노출에만 집중했던 건 감독 책임입니다.
스필버그의 이스라엘 일병 구하기를 보고도
이게 빌어먹을 나치 선전영화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장예모의 영웅을 보고도 이게 빌어먹을
공산당 찬양 어용영화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리안의 색계를 보고도 이게 빌어먹을
대만 독립운동 하는 민진당 경멸영화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문열은 미래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모두 박근혜의 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소설을 쓴 겁니다.
이문열이 옳았지요. 한국인들은 그의 예언대로 박근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좋은가요? 행복합니까? 살만해요?
지옥의 묵시록은 전쟁 안에서 전쟁 그 자체와 싸우는 전쟁영화입니다.
이런게 진짜라는 거죠. 설국열차는 지구를 깨뜨리는 영화입니다.
신을 인질로 잡고 에덴동산에 폭탄을 설치합니다.
이런게 진짜라는 거죠.
색계의 예언대로 대만은 중국에 흡수됩니다.
그래서 행복한가요?
사랑은 의사결정입니다.
춘향이 첫날밤에 몽룡으로부터 각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춘향전을 읽지 않고 아는척 하는 사람입니다.
의사결정회피는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죽음보다 사랑을 선택했다는 식의 변명은
이스라엘 일병을 쏘지 못한 스필버그의 변명입니다.
나라면 라이언 일병의 심장에 총알을 꽂았습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전쟁 그 자체를 저격해 버립니다.
색계는 주인공들의 망설임이 너무 부각된 영화이지요.
망설임을 통해 그 시대 그 상황에서의 친일행위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루미 선데이는 그 반대입니다.
글루미 선데이의 여인 일로나는
독일군이었던 한스를 망설임없이 죽여버립니다.
색계는 사랑으로 포장한 친일영화일 뿐입니다.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안의 이름값에 그리고
베니스 황금사자상이라는 권위에 칭송해 마지 않더군요.
좋은 영화 평론입니다. 본지가 오래됬는데---새록새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