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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200 vote 0 2013.09.04 (23:21:57)

      초고를 보강하는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객관과 주관


    사건을 판정하는 기준이 되는 관점을 설정하는 문제다. 객관은 진리를 판단기준으로 하고, 주관은 그때그때 임의로 판단기준을 정한다. 그러므로 객관이 옳다. 주관은 특수한 경우에만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 진리가 알려진 근대의 일이다. 원래는 주관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객관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객관적 진리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판단기준이 옳으냐 그르냐보다, 판단기준이 있느냐 없느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있는 사람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반면 아무런 판단기준이 없는 사람은 주관이 없는 사람으로 비하되었다. 확실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없으면 상황에 휘둘리게 된다. 상황을 지켜보고 판단기준을 정해야 하므로, 상황을 지켜보다가 상황의 흐름에 말려들고 만다.


    자기도 모르게 흐름에 종속되고 만다. 주인이 아닌 노예가 된다. 그러므로 사전에 확실한 자기 주관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근대과학이 등장하면서 용어의 의미가 변했다. 이에 많은 언어의 혼선이 빚어졌다.


    과학은 과학 자체의 분명한 판단기준이 있다. 나의 주관은 필요없고 이제는 과학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 나의 기준은 상대성이 성립하므로 믿을 수 없다. 변하지 않는 절대성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객관이다.


    ◎ 전근대의 주관 – 주관적인 자기 관점이 있는가 없는가를 중시한다.

    ◎ 근대의 객관 – 과학적 진리가 객관적인 판단기준이 된다.


    관점은 관측자의 포지션이다. 사건의 관점이냐 사물의 관점이냐다. 사건으로 볼 때 관측자인 나는 사건의 바깥에 있다. 이때 사건을 판단하는 주체는 사건을 일으키는 에너지여야 한다.


    사건 자체에 내재하는 조형적 질서를 따라 사건은 진행된다. 관측자인 나는 경기장 바깥에서 객관으로 시합을 바라본다. 나는 어느 팀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의 조형적 질서가 작동하느냐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한다.


    사건 자체의 내적 정합성과 일치하면 점수를 주고, 반면 사건을 이어가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고 삐꺽거리면 점수를 깎는다. 객관적 관점이 없는 사람은 먼저 관점을 만들어야 한다. 대개 사건과 무관한 외부에서의 의도와 목적을 끌여들여 작품을 망친다.


    공포영화라면 공포에 점수를 주고, 코미디영화라면 웃음에 점수를 주어야 하는데, 극의 흐름과 관계없이 무조건 반공주의 이념을 덮어씌우거나 혹은 반대로 사회주의 이념을 강조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는 미학적 실패다. 극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들이 극 안에 있지 않아서 어색하기 때문이다.


    주관은 사물로 보는 관점이다. 이때 관측자인 내가 사건에 개입해 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미리 정해져 있다. 내가 그라운드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이때 관측자는 자신이 사건에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사건이 아닌 사물로 보기 때문이다. 달리는 버스에 무임승차한 파리는 버스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때 무의식적인 대칭행동을 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의 작용에 맞서는 방법으로 YES와 NO를 판정한다. 객관적 판단기준이 없으므로 상대방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 경우 관측자는 NO만을 말할 수 있다. 원래 자연에 YES는 없다. NO와 NONO가 있을 뿐이다. 자신이 먼저 능동적으로 상대방에게 말을 걸 수 없다. 오직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줄 때 NO라고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콧대 높은 여자가 남자의 어설픈 프로포즈를 거절하는 것과 같다. 만약 YES라고 하면 남자의 프로포즈는 거기서 중단된다. 그러므로 사전에 리허설을 해보기 전에는 NO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래야 더 멋진 장소에서 더 완벽한 프로포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매쟁이라도 사전에 양쪽의 의중을 탐색하고 중매를 하는 것이며, 과부보쌈을 하더라도 미리 통보하는 것이 원칙이다.


    왜냐하면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며 YES를 했다가 이를 번복하면 그 동안 발생한 비용을 배상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과법칙을 어기는 잘못된 행동이며 후건긍정의 오류가 된다.


    프로포즈를 하는 비용은 남자가 전적으로 부담해야 하지만 여자가 YES를 하는 순간부터 비용은 공동부담이 된다. 이때 여자가 NO로 번복하면 그동안 발생한 비용은 남자에게 배상해야 하므로 NO가 자연스럽다.


    사건은 언제라도 현재 진행중이므로 비용을 발생시키는 YES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약 YES를 쓰려면 사전에 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 미리 리허설을 해두어야 한다. 자신이 설계한 무대의 주인이어야 YES를 말할 수 있한다.


    자신의 정원에서 파티를 열고 손님을 초대한 경우에만 YES는 가능하다. 이 경우 비용은 전적으로 자신이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프로포즈를 받았다면 여자는 비용부담을 지는 결정을 할 수 없다. 무조건 NO다. 미리 귀띰을 해서 여자가 대비하게 해야 한다.


    스포츠 경기에 참여한 선수라면 어떻든 NO를 할 수 밖에 없다. 그 무대가 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선수가 YES를 하면 당연히 패배한다. 골키퍼는 상대방의 슛을 NO로 막아야 한다.


    투수는 NO로 공을 타자에게 밀어내고, 타자는 NO로 투수의 공을 외야로 밀어내야 한다. 긍정은 불가능하며 어떻든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썰매개의 대장개는 갈림길에서 NO로만 무리를 이끌 수 있다.


    이쪽방향으로 가자고 말할 수 없다. 개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사납게 짖거나 목덜미를 물어서 이를 바로잡을 뿐이다. 이러한 절대부정의 원리는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등에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항상 시행착오에 따른 오류시정의 방법으로만 진도를 나갈 수 있다. 드라마라면 초반에 주인공이 잘못을 저질러 스승에게 꾸지람을 듣고 난 다음에 반성하고 바른 길을 가게 되는 형식이다.


    영화라면 악당이 나쁜 짓을 벌이면 뒤늦게 주인공이 출동하여 상황을 정리하는 식이다. 항상 NO가 먼저 치고나가고 YES가 나중에 수습한다. 이는 미학의 실패다. 주인공이 선제적으로 YES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 먼저 와서 판을 설계하고, 미리 덫을 놓고 악당을 유도하여 골탕먹이는 전개는 마카로니 웨스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타란티노 영화에서도 일부 그러한 지점이 포착된다. 돌아가는 판 전체를 설계하는 사람이 YES를 말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진짜다.


    ◎ 객관 : 에너지를 가진 주최측의 관점이다. 선제대응하여 YES를 말한다. 절대성과 주체성에 선다.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비대칭행동을 한다. 사건에 작위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사건 자체의 완성도로 판단한다. 미학적 성공이다.


    ◎ 주관 : 에너지가 없는 선수의 관점이다. 상대에 맞서 NO를 말한다. 상대성과 타자성에 선다. 뚜렷한 주관이 없이 막연한 대칭행동을 한다. 사건에 개입해 있고, 우리편이 있으며, 우리편이 유리하도록 판단한다. 미학적 실패다.


    주체성과 타자성


    주체성은 자신의 고유한 판단기준이 있는 것이다. 뚜렷한 주관이 있다. 자신의 판단기준을 가지려면 사건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고, 자신이 그 사건의 원인측에 서야 한다. 자신이 사건의 주인공이어야 하고, 문제의 원인이어야 하고, 범인이어야 한다.


    그 게임이 자신이 설계한 게임이어야 한다. 자신의 정원에 손님을 초대해야 하며 비용은 전적으로 자신이 부담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 안에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이때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그 경우 자신이 설계한 사건의 완성도가 판단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편이나 나쁜편이냐로 판단하는게 아니라 사건 자체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로 판단한다. 선악의 관점이나, 흑백논리의 관점, 이분법의 관점이 아니라 진리의 관점으로 판단한다. 에너지는 언제라도 진리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설계는 진리에 맞는 설계여야 하기 때문이다.


    타자성은 그러한 판단기준이 없다. 이때 상대방이 하는 행동을 보고 맞서는 형태로 판단하는데 보나마나 NO를 말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NO는 언제든지 말할 수 있지만, YES는 사건이 완결된 다음에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은 현재진형형이며 그 사건이 언제 종료될지 알 수가 없으므로 YES는 불가능하다. 만약 YES를 하려면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있어야 한다. 각본이 있어야 하며, 리허설이 있어야 한다. 사건 전체의 주인이어야 한다.


    비용을 부담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NO는 언제라도 되물릴 수 있지만, YES는 한 번 뱉은 말을 번복할 수 없으므로 무조건 NO를 말하게 되어 있다.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며 에너지가 투입되어 있고 YES를 말하는 순간 추가적인 에너지투입이 일어나므로, 이를 뒤집으려면 그동안 투자한 비용을 물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엎어진 물을 주워담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는 물리적 법칙이므로 어쩔 수 없다. NO는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이다. NO 다음에는 NONO를 구사하여 잠가진 수도꼭지를 다시 열면 된다. 만약 YES를 하면 수도꼭지로 물이 흐른다. YES 다음에 이를 뒤집는 NO를 하면 그동안 통과한 물값은 누가 지불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 NO – 프로포즈를 한 사람이 전적으로 비용을 부담한다. 판정이 잘못되면 NONO로 바로잡는다. 추가적인 비용의 부담이 없다.


    ◎ YES – 프로포즈 수락과 동시에 비용은 공동부담이다. 판정이 잘못되어 NO로 번복하면 그동안 진행된 비용을 배상해야 한다.


    주체성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선악의 관점, 피아구분의 관점을 버리고, 상대방의 맞서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운영자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관점이다. 당장 적을 퇴치할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대응하되 어떤 문제든 조율하고 제어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적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조율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내가 공유하는 토대를 이용하는 것이다. 상대가 공격하면 이에 맞서 반격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분위기를 잡아서 상대가 공격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우임금의 치수와 같다. 강둑을 쌓는 것은 맞서는 타자성이고, 수로를 파는 것은 에너지의 결을 따르는 주체성이다. 에너지의 입력부를 장악함으로써 주체성의 관점을 가지고 판을 조율할 수 있다. 상대방과 내가 시소에 올려져 대칭을 이루었을 때, 그 시소의 축을 장악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직접 타격하지 않고 축을 움직여서 의도를 관철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을 다루는 것과 같다. 칭찬요법으로 내가 의도하는 행동을 하도록 제어할 수 있다. 타자성의 관점은 시소의 축을 장악하지 못한 것이다. 홈그라운드가 아니라 상대방이 설계한 게임에 뛰어든 것이다.


    적진에 뛰어든 장수와 같다. 이 경우는 어떻든 대칭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NO를 할 수 밖에 없다. YES를 하는 순간 비용이 지출되기 때문이다. 적진에 뛰어들 때는 맨손이므로 비용부담이 일어나는 결정은 불능이다.


    타자성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피해의식에 빠져 있다. 무의식적으로 수비수의 포지션을 차지한다. 내가 발언권을 획득하려면 상대방이 먼저 내게 공격했다는 전제를 깔아야 하므로 공연히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피해자 코스프레다. 이는 고유한 자기 포지션이 없기 때문에 대상과의 엮임을 유발하여 포지션을 획득하려는 노력이다. 이는 자기소외를 유발하는 대상화 행동이 된다. 대상화는 상대방을 일회용의 도구나 수단으로 보는 관점이다.


    자신이 강자일 때는 상대방을 대상화 하고, 자신이 약자일 때는 타자성으로 바라본다. 북한이 한국보다 군사력이 강하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수구꼴통이나, 미국의 침략이 두렵다는 북한의 입장이 전형적인 타자성의 관점이다.


    미국이 알 카에다를 국내정치에 이용하거나, 한국의 집권측이 극좌의 무리를 이용하는 것은 대상화 하는 행동이다. 선제대응하여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뒤통수를 치는 행동이다. 도무지 아름답지가 않다.


    P.S

    연기파 배우 중에는 악역전문 조연출신이 많다. 넘버쓰리의 송강호나 나쁜 남자 조재현이 대표적이다. 악역의 대사는 NO다. NO 들어가는 타이밍은 정해져 있지 않다. NO는 상대방의 말을 끊고 아무 때나 들어가도 된다. 그러나 주인공의 YES는 분위기 잡은 다음에 타이밍 맞추어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연기하기가 어렵다. 주인공만 하다가 연기력 잃어버린 배우 많다. 차인표가 대표적이다. 물론 감독의 역량이 뛰어나다면 뛰어난 미장센으로 주인공의 YES 들어가는 타이밍을 잡아줄 수 있다. 한석규의 전성기가 그렇다. 결론은 한국은 감독능력이 없어서 미남주인공이 망하고 조연이 뜬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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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님의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시중 서점에 있습니다.

    진리의 관점을 세상에 전파하는 첫 번째 도전입니다.

 

   


[레벨:11]큰바위

2013.09.05 (02:04:18)

큰 사람이 되어 큰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라는 이야기군요. 


위대한 인간이여, 

객관의 관점으로 주체성을 갖고 살아라.......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9.05 (14:06:39)

 

    본문추가..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말론 브란도는 자기를 죽이러 온 윌라드 대위에게 YES라고 말한다. 그 공간은 자신이 연출한 무대이므로 YES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위대하다. 아무도 못한 YES를 말했기 때문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윌포드는 자신을 죽이러 온 커티스에게 YES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짜다. 자신을 제거하게 한 것이 아니라 상속시키려 한 것이다. 영화는 앞칸으로 올 수 없다는 윌포드의 NO와 그것을 거부하는 커티스의 NO가 대결한다. 진정으로 YES를 말한 자는 누구인가? 신이다. 설국열차를 타파하고 북극곰이 거니는 자연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그곳에서 궁시렁대지 말고 내 집으로 들어와. 그래서 이 영화는 위대하다. 마지막 순간에 YES라고 말할 수 있어야 진짜다. 김기덕 감독의 파란대문 결말에는 절대로 YES라고 말할 수 없는 순간의 YES가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김기덕 감독의 다른 영화도 그렇지만 관객이 알아채지 못해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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