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와 공급
수요가 공급에 앞선다. 인간이 소비하는 상품의 상당부분은 사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옷이 필요해서 인간이 옷을 입는 것만은 아니다. 옷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옷을 입는 것만도 아니다.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의사결정의 원리다. 수요는 의사결정을 위해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는 행동이다. 또는 자신이 선택권을 가지려는 행동이다. 자동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가지면 여러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데이트를 할 수도 있고 여행을 할 수도 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커피와 홍차와 쥬스 중에서 선택할 권리를 주려고 커피집에 간다. 공급은 그 중에서 선택된다. 수요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비하게 한다. 집을 소유하는 것은 집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가능성을 소유하는 것이다. 집에 친구를 초대할 수도 있고, 마당에 채소를 기를 수도 있고, 정원을 가꿀 수도 있다. 공급보다는 수요를 통제함으로써 경제를 관리할 수 있다. 수요는 공급을 포함한다. 수요는 선택권을 가지는 것이며 공급은 선택하는 것이다. 수요의 이러한 측면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교육과 종교, 문화분야다. 한국의 교육과소비는 실용적인 직업교육이 아니다. 다만 선택하고 결정하는 훈련을 하려는 것이다.
개념과 관념
개념은 직관되고 관념은 사유된다. 개념은 생각 그 자체가 사건의 주체이고 관념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다. 사과의 개념은 사과꽃과 사과나무와 사과장수 사이에 서고, 사과의 관념은 사과 그 자체에 있다. 개념은 환경과 연동되어 있는 사유의 모형이며 관념은 사유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7에 대한 관념은 7 자체에 있고 7에 대한 개념은 6과 8 사이에 있다. 개념은 생각의 흐름을 나타내고, 관념은 생각의 머무름을 나타낸다. 개념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관념은 대상에 집중한다. 북의 개념은 음악회에 있고, 북의 관념은 북소리에 있다. 사유는 개념으로 촉발되어 관념으로 종결한다. 개념이 관념에 앞선다.
집단광기와 마녀사냥
집단의 광기는 집단이 상부구조에 의사결정의 부담을 떠넘길 때 집단이 얼마나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는지, 그 에너지의 크기를 보여주려는 행동이다. 김정은이 집권하자마자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한 연속된 도발로 결기를 세운 것과 같다. 전환기에 많은 사건이 무질서하게 일어난다면 집단은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1백건의 사건을 낱낱이 판단하기는 어려우므로 몰아서 일괄타결해야 하는데 그 끝판은 전쟁인 경우가 많다. 대란을 일으켜 대치에 이르게 한다는 모택동의 주장이 그러하다. 의사결정 스트레스에 치인 사람들은 광기라는 형태로 에너지를 결집하여 많은 판단을 몰아서 한꺼번에 처리하고자 한다. 이때 밑바닥에 고인 에너지가 강할수록 한꺼번에 처리되는 강도가 높다. 양차세계대전이나 중국의 문화혁명이 그렇다. 결정적인 에너지의 분출을 통해 역사의 큰 방향을 잡고 지엽적인 불만을 잠재워 사건의 재론을 차단한다. 이때 집단은 특정한 타겟을 희생시키는 마녀사냥을 통해 결의를 다진다. 의사결정의 쏠림을 유도하여 대칭에서 비대칭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녀는 억울하게 죽어야 한다. 억울한 죽음일수록 집단의 결의가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가문의 명예를 추락시킨 여성을 자살하게 하는 것이 그렇다. 희생자의 가문은 상대방 가문에 복수할 권리를 가진다. 일단 약자를 희생시키고 나중에 억울함이 밝혀지면 열배로 보복함으로써 맺고 끊음을 분명히 한다. 민간의 설화는 이 형식을 가진 경우가 많다. 밀양의 아랑제에 얽힌 귀신 아랑과 사또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많은 인물이 희생되어야 민중의 분노가 관청에 전달되는 것이다.
수렴과 역설
사건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이루어지며 하부구조의 무질서한 운동은 상부구조의 방향성에 수렴된다. 개별적인 사건은 큰 사건에 흡수된다. 모래시계의 아랫부분은 모래가 쌓여 높이가 올라가지만, 전체적으로는 아래로 내려간다. 역설은 작은 사건이 그 자체로는 참이나 큰 사건으로 보면 거짓이 되는 모순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부구조가 아닌 상부구조로 보아야 한다. 주관이 아닌 객관으로 보아야 한다. 대칭이 아닌 비대칭으로 보아야 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전개하며 이때 원인측과 결과측 사이에서 힘의 방향성이 바뀌는 반전이 일어난다. 사건의 중간을 잘라서 결과측만 보면 마치 반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물고기의 꼬리가 좌우로 움직이면 몸통은 전진한다. 쥐떼가 무질서하게 움직이면 무리 전체는 큰 세력을 형성하여 한 방향으로 간다. 파도가 잦아질 때 작은 파도가 수렴되어 매우 큰 너울을 만든다. 부분의 무질서한 행동은 집단 전체의 강력한 방향성으로 나타난다. 대포를 쏘았을 때 화약연기의 팽창은 사방으로 무질서하게 가지만 대포알은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하부구조의 무질서한 운동이 상부구조에 수렴됨에 따라 반대의 효과가 얻어지는 것이 역설이다. 유도나 씨름에서 이러한 역설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밑에 깔리는 쪽이 패할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로 들리는 쪽이 진다. 중심이 1 움직일 때 변은 5 움직이기 때문이다. 씨름이나 유도는 지면에 닿는 쪽이 진다. 두 선수는 2이지만 서로의 신체를 잡으면 1이 된다. 이때 지구에 가까운 쪽이 지구의 힘을 이용하므로 축이 되고 먼 쪽이 날개가 된다. 구조의 축이 1 움직일 때 날개는 5 움직이므로 뒤집기나 업어치기를 할 때 무게중심이 낮은 쪽이 승리한다. 활쏘기를 한다면 화살을 멀리 보내는 쪽이 승리한다. 이때 뒤로 시위를 많이 잡아당겨서 과녁과 거리가 멀어진 쪽이 도리어 승리한다. 사건은 기승전결 과정에서 반전되기 때문이다. 멀리뛰기를 할 때 많이 움츠린 쪽이 더 멀리 뛰는 것과 같다.
완전성과 모순
사건은 계에 에너지를 태우는 형태로 일어난다. 완전성은 에너지 개념이 있고 모순은 에너지 개념이 없다. 창과 방패가 싸우면 반드시 창이 방패를 이긴다. 창에는 에너지가 있지만 방패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창은 세게 휘두르거나 약하게 휘두르지만, 방패는 세고 약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창이 방패를 뚫는 역사이며, 헤커가 보안시스템을 뚫는 역사이며, 공격이 수비를 이기는 역사이며 방패는 결정권이 없다. 만약 완벽한 방어법이 개발된다면 축구시합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완벽한 투수가 나타나면 MLB는 공인구를 바꿔서 반발력이 큰 공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모순은 이중기준의 오류에 해당된다. 사건의 부분을 보고, 에너지를 태운 전체를 보지 않은 채로 성급히 결론을 내릴 때 모순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만약 모순이 관찰된다면 관점을 찾아내서 소실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나의 사건은 다섯 개의 소실점을 가질 때 완전하다. 사건은 완전성을 가지며 사물은 언제라도 모순된다. 그러므로 명제는 사건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 ‘산이 높으면 강은 깊다’는 명제는 완전하다. 산과 강 사이에 대칭성이 있기 때문이다. 산이 높다는 말은 명제가 아니다.
선과 악
선은 사건 혹은 사물을 나탄내고 악은 언제라도 사물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악은 형태가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선은 반드시 행위를 수반하므로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살인은 악이다. 그러나 의인이 적군 한 사람을 희생시켜 아군 두 사람을 살린다면 그것은 선이다. 악은 결과만을 논하며, 선은 기승전결의 전개과정 전체를 논한다. 선은 결과도 선해야 하고 과정도 선해야 한다. 악은 단지 결과만 평가한다. 선과 악이 대등한 동전의 양면이라는 관점은 잘못된 대칭적 판단이다. 비대칭으로 올라서야 한다. 순수한 선은 있어도 순수한 악은 없다. 선은 절대선도 있고 상대선도 있으나, 악은 상대악만 있으며 절대악은 없다. 모든 악은 선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하지 않으므로 나쁘다는 판단도 성립될 수 없다.
사회주의와 파시즘
사회주의와 파시즘은 본질에서 같다.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가 파시즘으로 나타난다. 파시즘은 고대 로마에서 근위병들이 도끼자루 다발을 묶어 황제의 행렬을 따르는데서 유래한 것으로 황제의 권위를 나타낸다. 도끼자루를 단단히 묶듯이 국민을 결박하자는 것이다. 개인을 묶으면 사회가 된다. 그러므로 둘의 본질은 같다. 문제는 완전성이다. 사회를 통제하는 스위치가 어디에 있느냐다. 사회주의는 국제주의다. 외국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통제된다. 파시즘은 고립주의다. 국내의 힘에 의해 통제된다. 어떻게 사회를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국경을 막고 국내의 힘으로 통제하는게 파시즘이고, 외국과의 소통으로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사회주의다. 둘 다 사회의 통제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므로 같은 코스로 간다. 반면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는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따른다. 민주주의는 의사결정구조로 통제하며, 자본주의는 자연의 에너지 흐름으로 통제한다. 에너지는 외부에서 들어와서 내부에서 처리된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하므로 사회주의로 가서 외국의 기술을 들여온다. 약간의 자신감을 얻으면 국경을 틀어막고 내부통제에 들어간다. 모든 사회주의는 파시즘으로 변질할 가능성을 가진다. 사회주의가 기라면 파시즘은 결이다. 인간은 환경이 좋을 때 기승전결의 기에 서는 세력전략을 선택하고, 환경이 나쁠 때 기승전결의 결에 서는 생존전략을 선택한다. 세력전략이 사회주의라면 생존전략은 파시즘이다. 신기술이 도입될때마다 처음에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등장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파시즘적 경향이 나타난다. 김어준의 인터넷 사회주의가 일베충의 인터넷 파시즘으로 변질된다. 애플도 초반의 개방노선에 퇴행하여 후반의 폐쇄노선으로 간다. 포털사이트도 초반에 무료전략으로 가다가 나중에는 유료화를 시도한다. 이는 물리적인 법칙이다. 민주주의에 의한 감시와 부단한 혁신만이 사회주의 이념의 파시즘적 퇴행을 막을 수 있다. 자본의 폭주 역시 내버려두면 파시즘적 경향을 나타낸다.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결로 갈수록 파시즘이 나타나므로, 자연의 법칙은 원래 파시즘적 속성을 가지며, 만약 지구에 바다나 산맥 혹은 정글이나 사막과 같은 물리적인 국경이 없고, 인종이나 민족, 언어, 종교과 같은 문화적인 국경이 없다면 파시즘화법칙에 의해 인류문명은 파멸되었을 것이 뻔하다. 마야문명과 같은 고립문명에서 그러한 문명대붕괴의 예를 확인할 수 있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카오스와 코스모스, 무질서와 질서는 흔히 잘못 판단된다.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플러스와 마이너스, 음과 양, 주관과 객관의 개념도 흔히 잘못 사용된다. 에너지가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 사건의 원인측과 결과측, 비대칭과 대칭, 자궁과 아기로 바꾸어 말해야 한다. 계에 에너지가 들어오면 카오스적 상태가 되며 사건이 전개하면 코스모스로 이행한다. 사건이 종결하면 다시 에너지가 빠져나가서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이때 무기력한 상태는 최초의 아기상태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반대된다. 아기는 약하다. 노인도 약하다. 그러나 포지션은 반대된다. 양은 안정되고 좋은 것이며 음은 불안정하고 나쁜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음은 에너지가 있고 양은 에너지가 없다. 음은 부글부글 끓는 것이며 양은 식어버린 것이다. 비대칭과 대칭으로 설명해야 한다. 목자가 양떼를 이끄는 것은 비대칭이며 양떼가 무질서하게 흩어진 것은 대칭이다. 대칭상태는 점차 균일해져서 고른 상태가 된다. 그 경우는 질서있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기력한 상태이며 전멸하기 직전의 상태이다. 곧 뻣뻣해진다. 죽는다. 비대칭은 코어가 날개를 지배하는 상황이다. 대칭은 날개와 날개가 교착된 상태다. 언제라도 비대칭이 대칭을 통제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에서 말하는 무질서도의 증가는 카오스의 증가가 아니다. 실제로는 하향평준화로 균일해진 것이다. 단순한 대칭적 질서는 단조로울 뿐이다. 엣지가 있어야 한다. 집이 있으면 대문이 있어야 한다. 심장이 뛰어야 한다. 에너지를 태우면 달리는 말이다. 무질서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가장 완전한 상태다. 죽어있는 대칭보다 살아있는 비대칭이 낫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무질서와 질서, 플러스와 마이너스, 음과 양, 주관과 객관은 흔히 반대의 의미로 쓰이므로 문장의 맥락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바른 판단은 자궁과 아기, 비대칭과 대칭, 원인측과 결과측, 에너지가 있는 상태와 바닥상태, 탄생과 죽음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깨달음과 지식
깨달음은 사건의 보편성을 깨닫고 지식은 사물의 다양성을 구분한다. 깨달음은 모형을 쓰고, 지식은 기억을 쓴다. 깨달음은 닮은 패턴을 쓰고, 지식은 다른 차이를 쓴다. 깨달음은 통짜덩어리를 쓰고, 지식은 부분을 잘라서 쓴다. 깨달음은 사건의 흘러가는 방향과 인간의 개입하는 관점을 본다. 지식은 관측되는 사실만 본다. 깨달음은 자신의 관측지점을 반영하는 지동설이면, 지식은 관측자의 포지션을 신경쓰지 않는 천동설이다. 깨달음은 사건 그 자체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따른다. 지식은 겉으로 관측되는 사실을 따른다. 깨달음은 자연에서 에너지를 따르고 사회에서 의사결정원리를 따른다. 지식은 주장되는 말이나 표방되는 주의를 따른다. 깨달음은 전체를 연결시켜 보고, 지식은 마디를 각각 본다. 깨달음은 바깥의 관계를 보고 지식은 안쪽의 본질을 찾는다. 깨달음은 둘 사이를 보고 지식은 그 하나를 본다. 둘 사이에 하나가 있으므로 깨달음은 일원론이고, 하나를 받으면 둘로 쪼개지므로 지식은 이원론이 된다. 깨달음은 이 순간에 권을 낳고 지식은 남의 권을 물려받아 쓴다. 깨달음은 자연의 흐름을 따르고 지식은 인간의 눈과 귀와 코를 믿는다. 깨달음은 장기전을 쓰고, 지식은 단기전을 쓴다. 깨달음은 증폭, 복제, 공명하고, 지식은 전달, 학습, 공부한다. 깨달음은 팀으로 가고, 지식은 개인으로 간다. 깨달음은 완전성을 보고, 지식은 불완전성을 본다. 깨달음은 선제대응하는 비대칭행동으로 가고, 지식은 맞대응하는 대칭행동으로 간다. 깨달음은 살아서 펄쩍펄쩍 뛰는 역동성을 따르고, 지식은 조용한 균형을 추구한다. 깨달음은 인생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고, 지식은 인생에서 얻은 소득을 본다. 깨달음은 스스로 빛나고, 지식은 다른 것의 힘을 이용한다. 깨달음은 흐름을 소통시키고, 지식은 흐름을 막아 수확한다. 깨달음은 예술가와 친하고, 지식은 장사꾼과 친하다. 깨달음은 미래로 나아가고, 지식은 과거의 것을 설명한다. 깨달음이라는 큰 영토 안에 지식이라는 작은 동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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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 팟캐스트 6회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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