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냐 사물이냐 구조론은 방대한 이론체계이지만 ‘사건이냐 사물이냐.’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극복하고,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획득할 때 게임은 끝난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린다. 축구공이 하나 있다고 치자. 그것은 사물이다. 축구시합이 열린다면 그것은 사건이다. 축구공은 확실히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발로 찰 수도 있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그러나 축구시합은 언제 열릴지 알 수 없다. 시합 중에 경기가 중단될 수도 있고, 승복할 수 없는 판정이 나올 수도 있다. 불안하다. 뭔가 미심쩍다. 축구공을 우선으로 판단함이 마땅하고 축구시합은 부차적인 문제로 여기기 쉽다. 과연 그럴까? 축구시합 없이 축구공이 있을 수 있을까? 쓰나미에 휩쓸려 바다를 떠다니던 축구공이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 닿았는데 마을사람 누구도 그 물건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축구없는 동네에서도 여전히 축구공일까? 축구시합이 먼저다. 시합 안에 공이 있다. 사건이 먼저다. 사건 안에 사물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비로소 안정감을 얻는다. 자연스러움에 이른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건이 벌어져 있다고 전제하는 오류를 범한다. 시합은 이미 열렸고 공만 잘 다루면 된다고 여긴다. 틀렸다. 무의식적으로 먹고 들어가는 전제를 의심해야 한다. 사건중심적 사고를 획득해야 한다. 시합이 열리는 날자나 장소부터 따져봐야 한다. 그러한 관점을 얻어야 한다. 여기 빵이 하나 있다. 어쩔 것인가? 사물중심적 사고에 빠진 사람은 ‘그 빵을 먹겠다’고 말한다. 위태롭다. 그 빵이 생일빵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 그 빵의 유통기한부터 확인해야 할 판이다. 낚이지 말아야 한다. 사건중심의 사고에 눈 뜬 사람은 ‘당신이 빵을 준비하면 나는 포도주를 챙겨오겠소.’하고 대꾸한다. 이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접근이다. 이 시대에 사건중심적 사고가 요청된다. 왜인가? 근대과학의 최종결론은 양자역학이다. 만유의 근본이 존재이고, 존재의 근원이 입자라면, 양자역학은 입자를 딱딱한 알갱이로 이루어진 사물이 아닌 부드러운 관계망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본다. 사물은 그냥 있지만 사건은 에너지를 투입하여 작동시켜야 한다. 사건으로 보아야 물질세계의 작동원리가 바로 이해된다. 현대과학의 최종결론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그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딴건 잘난 학자들의 관심사일 뿐 현실은 다르다고 여긴다. 중요한 것은 사물과 사건이 대결하면 언제나 사건이 이긴다는 점이다. 사물은 혼자이고 사건은 항상 상대가 있다. 파트너가 있다.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이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더 치밀하게 대응한다. 수학계의 논쟁들은 결국 달나라에 로케트를 쏘아보내는 사람이 이긴다. 0이나 무한대나 리미트에 대한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누구도 상대방의 주장에 승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새로운 개념을 이용하여 난제를 해결하면 받아들여진다. 젊고 야심에 찬 사람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그걸로 어떻게든 달나라에 로켓을 보내는 쪽이 이긴다. 서양선교사가 처음 조선에 발을 내딨었을 때의 일이다. 조선인들은 서구문물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양반은 조선의 선비가 양반이지 서양의 물건들이야 눈요기거리에 불과한 거고 그게 다 신분이 낮은 상놈의 손재주가 아니겠는가 하는 판이었다. 설사 서양에서는 기술을 알아준다 해도 여기는 조선이니까 하고 버틴다. 나라를 뺏기고도 사농공상의 신분질서에 얽매여서 기술은 멀리하였다. 밥을 쫄쫄 굶으면서도 시인이나 소설가의 타이틀을 탐냈기에 30년대 한국문학의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요즘도 그런 식으로 버티는 꼴통들은 있다. 동성애문제와 같은 진보적인 이슈가 등장하면 ‘유럽에 가서 그런 소리 해. 여기는 한국이야.’ 하고 받아친다. 문제는 대결이다. 실전 들어가면 서양이 이긴다. 병을 치료해도 양의사가 한의사보다 낫다. 서양기술 비웃다가 자신이 병에 걸리면 엎드려서 빈다. 농사를 지어도 서양의 농사기술이 낫고, 옷을 입어도 서양옷이 더 때깔이 난다. 나라를 다스려도 서양인이 더 잘한다. 인정할건 인정해야 한다. 동성애문제나 사형제논쟁을 보더라도 진보의 모럴을 받아들인 나라들이 사회의 상호작용 총량을 늘려서 잘 산다. ‘여기는 한국이니까’ 하는 논리는 굶주림 앞에서는 소용없다. IMF 닥치고, 실업자 넘쳐나고, 경제가 붕괴하면 별수없이 진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바닥까지 추락해봐야 겨우 정신차리는 것이다. 그렇다. 사건이 사물에 앞선다는 진리를 인정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언제라도 사건이 사물을 이기기 때문이다. 길은 갈림길이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후 가는 길은 완전히 달라진다. 사랑을 사물로 보는 사람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을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둘이 함께할 계획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고백하면 둘 중에 누가 선택될까? 승부는 거기서 갈린다. 솔로신세를 면하고 싶거든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일베충 노릇으로는 커플되기 틀렸다. 사물로 보는 사람은 방송국을 여의도에 있는 건물로 여긴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그 방송국의 드라마를 본다. 누가 수입을 올릴까? 사물로 보는 사람은 일당받고 방송국 건물을 수리하지만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그 방송국의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로 성공한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언제나 더 많은 돈을 번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창업하여 회사의 CEO가 될 때, 사물로 보는 사람은 그 회사에 이력서를 낸다. 이쯤 되면 승복해야 한다. 사물로 보는 사람은 사람을 고깃덩이로 본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생노병사의 인생드라마로 보인다. 사물로 보는 사람은 영화를 필름으로 본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시나리오부터 찾는다. 사건을 보는 사람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더 많은 창의를 한다. 사물로 보는 사람은 사고의 범위가 좁혀져 있으므로 우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물로 보는 사람은 내부의 속성으로 접근한다. 사자는 힘이 세고, 토끼는 겁이 많고, 여우는 꾀가 많고, 곰은 미련하고, 고양이는 새침떼기라고 여긴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토끼가 망을 보고, 여우가 도적을 유인하면, 사자가 도적을 퇴치하고, 곰은 그동안 집을 지키고, 고양이가 모두를 칭찬해줄 것이라고 여긴다. 서로 다른 것을 얽어서 커다란 하나의 통짜덩어리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사물은 결합되기 어렵지만 사건은 서로 엮이기 때문이다. 사물로 보면 곰과 호랑이는 공존할 수 없지만 사건으로 보면 호랑이는 앞에서 끌고 곰은 뒤에서 민다. 사건은 시간 상에서 일어나므로 시간차를 이용하여 둘을 공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사물로 보는 사람은 영토와 국민이라고 여긴다. 이 경우 전쟁 외에 국가를 존립하게 하는 근거를 찾지 못한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집단의 의사결정 단위로 본다. 개인, 가족, 부족, 국가, 세계라는 의사결정 단위들 중에서 국가는 하나의 링크다. 맥락을 중심으로 바라보므로 문명의 전파단위라는 국가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문명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 인류와 상호작용하는 매개로 국가는 필요한 것이다. 사물로 보는 사람은 인생을 성공하려고 한다.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납이나 쇠는 사물이다. 그들은 인간 중에도 금과 은과 구리와 납과 쇠가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노력하여 되도록 금의 포지션에 서려고 한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인생을 하나의 멋진 드라마로 연출하려 한다. 금으로 출세하기보다 자신과 맞는 파트너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 인생 안쪽에 주제와 에피소드와 반전과 감동과 교훈으로 채워넣는다. 누가 승리자인가? 스티브잡스는 사건으로 본다. 그래서 남들이 공부할 때 맨발로 인도를 떠돌았다. 사물인 금은 구리나 납과 공존하지 못한다. 금은 부잣집으로 가고 납은 가난한 집으로 가기 때문이다. 사건은 주제와 에피소드와 반전과 감동과 교훈이 공존한다. 그리하여 커다란 작품을 이룬다. 인생의 온갖 에피소드들을 한 줄에 꿰어낸다.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말이 안통하는 사람이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디자이너다. 이들은 기질이 달라서 물과 기름처럼 마찰한다. 스티브 잡스가 이들을 공존하게 만들었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물로 보는 사람은 예수가 사랑을 가르치고, 석가가 자비를 가르치고, 공자가 인의를 가르치고,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가르쳤다고 말한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예수가 율법사들 앞에서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라 주장했고, 석가가 바라문들 앞에서 계급타파를 추진했고, 공자가 학문을 개척하여 원래 임금을 호위하는 무사였던 사士를 문사로 바꾸어 임금으로부터 떼내어 독립시켰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중우정치와 싸웠다고 말한다. 사건으로 보면 예수,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는 모두 기득권과 싸워서 탄압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죽고 난 뒤에도 싸움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서 마침내 드라마가 기승전결로 완성된 것이다. 사물로 보면 노무현은 꼴통이거나 바보다. 사건으로 보면 노무현은 한국인의 자존심이다. 노무현은 ‘반미면 어때.’ 한 마디로 한국을 미국 위에 놓았다. 한국인은 지배권력에 예속된 농노신분에서 남 눈치 안 보고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자유민으로 올라섰다. 노무현은 한국인의 가슴 속에 최고라는 자부심을 심었기 때문에 죽여도 죽여도 계속 살아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이어진다. 이렇듯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가 완전히 다르다. 누가 이기는가? 사물을 보는 사람은 안을 바라보고 사건을 보는 사람은 밖을 바라본다. 밖을 보는 사람이 이긴다. 안은 좁고 밖은 넓기 때문이다. 사물을 보는 사람은 타자성의 관점을 가지고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은 주체성의 관점을 가진다. 타자성으로 보면 상대의 행동을 보고 자기 행동을 결정한다. 주체성으로 보면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간다. 자기계획으로 밀고가기 때문에 결국 승리한다. 남의 행동을 보고 자기 행동을 결정하면 선수가 아니라 후수를 두게 되므로 결국 패배할 수 밖에 없다. 사물로 보는 것은 소승이고 사건으로 보는 것이 대승이다. 사물로 보는 것은 상대주의 관점이고 사건으로 보는 것은 절대주의 관점이다. 자기 안에 결을 세팅하고 결따라 가는 것이 절대성이다. 내 안에 야심찬 설계도가 있다. 사물로 보는 사람은 안쪽의 마음이 결정한다고 여긴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바깥과의 상호작용이 결정한다고 본다. 사물로 보면 불완전성에 머무르고 사건으로 보면 완전성으로 도약한다. 언제나 사건이 윗길이고 사물은 종속된다. 사건은 자기 게임을 설계하고 사물은 남의 게임에 말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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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로 보는 사람은 ‘산은 높고 물은 깊다.’고 말합니다.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산이 높으면 물은 깊다.’고 말합니다. 둘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 관측자는 완전히 다른 지점에 포지셔닝하고 있습니다. 사물은 분리되어 있고 사건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분리되어 고립될 것인가 연결되어 소통할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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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도 마찬가지.
구조론을 사물로 보는 사람은, 이 곳에서 어떻게든 무언가 <지식>을 얻어가려 할 것이오.
하지만 사건으로 보는 사람은, 21세기를 새롭게 디자인 하는 이곳에서 나름의 포지션을 잡고
큰 사건을 일으키려 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