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모든 원인은 계 내부 관성의 보존력 곧 내부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계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고 압력은 평형을 지향하므로 밸런스가 복원되는 과정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우리가 목도하는 세상이다. 관성을 보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올라선다. 우리가 보는 것은 외부 작용이다. 외부 작용은 내부 관성의 반작용이다. 우리는 작용이 아니라 반작용을 본다. 원인이 아니라 결과를 본다. 원인은 내부필연이고 결과는 외부확률이다. 외부는 환경의 간섭에 따른 노이즈에 의해 확률로 나타난다. 내부는 압력에 의해 정렬하므로 필연이다. 구조는 내부를 보는 것이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내부 필연이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지는 외부 확률이다. 우리는 외부 우연에 집착하므로 객체를 통제하지 못한다. 계를 지정하여 외부를 내부로 바꾸고 압력을 가하면 밸런스가 작동하며 필연의 메커니즘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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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움직임이 있었다. 움직이면 충돌하고 충돌하면 교착된다. 교착되어 나란해지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세상의 근원을 안정된 존재라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을 불길하게 여긴다. 틀렸다. 우주 안에 멈춘 것은 없다. 결맞음에 의해 감추어진 움직임과 결 어긋남에 의해 드러난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빅뱅 이후 우주는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관성력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태초에 변화가 있었다. 우리가 변화 중심적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모든 것은 움직이며 멈춘 것은 없다. 변화는 교착되어 안정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안정은 내부의 관성력을 꺾고 스스로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변화 일원론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하나의 변화가 충돌하거나 교착되어 보존되는 관성력을 드러내거나 감추어서 변화와 안정의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변화의 세계관으로 보면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복제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사물은 사건이 지나간 결과다. 우리는 결과 측을 보는 사물 위주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보는 셈이다. 사물은 내부의 관성이 은폐된 거짓이다. 구조는 관성이다. 사건의 원인 측에서 결맞음을 보는 눈을 얻어야 관성이 보인다. 사건의 눈을 뜨지 않으면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