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기본은 존재다. 존재를 나타내는 것은 입자다. 입자는 딱딱하다. 딱딱하게 죽어있는 것 보다, 팔팔하게 살아있는 것이 더 완전성에 가깝다. 氣라든가 영혼이라든가 하는 개념이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시계는 바늘이 움직이는 동안 살아있다. 딱딱하게 죽은 입자 말고 팔팔하게 살아있는 입자는? 양자다. 구조론의 질은 양자와 같다. 입자는 시공간이라는 그릇에 담겨 같은 일이 반복되므로 딱딱한 형태가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입자의 딱딱한 성질은 실상 같은 일이 반복될 때의 성질이다. 인간은 어떤 일이 반복될 때 그것을 입자로 여기고, 그 입자를 통해 존재를 인식한다는 말이다. 반복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린다. 쇠는 녹쓸어 사라진다. 좋지 않다. 금은 녹쓸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 좋다. 사라지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모두 사라지는 일회용이다. 탄생은 1회 뿐이다. 죽음도 1회 뿐이다. 결혼도 1회 뿐이다. 입시도 1회 뿐이다. 피상적 관찰은 곤란하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자.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진정 귀한 것이다. 백화점 세일과 같아 더 기회가 없다. 프로야구에서 신인왕이 될 기회는 1회 뿐이다. 두 번 다시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반복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 가치가 있다. 양자와 입자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양자는 1회 출연하고 입자는 고정출연한다. 양자는 특정한 조건에서 순간적으로 형태를 성립시킨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존재의 진짜 모습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주는 단 한 번 빅뱅을 일으킨 것이다. 지구에 생명도 단 한번 출현했다. 우리는 모두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다. 단 한 번 인간이 지구에 출현했으며 두 번의 출현은 없다. 음악은 고저장단이 대칭을 이룬다. 고가 있으면 저가 있어야 한다. 이들은 세트다. 고와 저가 떨어져 있다면? 시작된 것은 언젠가 끝날 수 밖에 없고 원인된 것은 언젠가 결과될 수 밖에 없지만 둘 사이에 간격이 멀다면? 봄이 오면 겨울이 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사이의 여름과 가을을 하루살이야 알겠는가? 떨어져 있는 고와 저를 한세트로 묶어서 파악하면 입자와 같다. 이것이 양자다. 입자는 늘 세트로 묶여 있지만 양자는 특정조건에서만 세트로 파악된다. 파도의 한 번 오르내림을 1단위로 파악하면 양자다. 오르면 반드시 내려와야 하므로, 오른 상태에서는 내림이 잠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포텐셜에너지와 같다. 무인도에 남녀를 가둬놓고 3년후에 가봤더니 아이가 생겼다. 아이는 무에서 돌연히 생겨났다. 이상하다. 이는 질량보존의 법칙과 안 맞다. 아이는 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잠재해 있던 것이 때를 만나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잠재한 것을 없는 것으로 치지 않고 시간 속에 숨은 것으로 치면 양자다. 봄에는 싹이 트고, 여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열매가 맺힌다면 어떨까? 봄에는 꽃이 없고, 여름에는 열매가 없다. 없는 것일까? 아니다. 잠재해 있다. 그 잠재한 것은 없는 것으로 쳐야 할까? 천만에! 있다. 거시세계에서 양자는 1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벼락이 치는 순간, 태풍이 오는 순간, 야구공과 배트가 만나는 순간 입자꼴을 이루었다가 해체된다. 그리고 입자를 방출한다. 그것이 양자다. 곧 구조론의 질이다. 무인도에 남녀를 두었더니 아이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남자가 삽입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말은 되지만, 충분하지 않다. 남녀가 연애한 이유는 무엇인가? 친연성이라는 형태로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확률로 나타난다. 무인도에 남녀를 가두었더니 아이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양자적이다. 그러나 아이가 잠재해 있다가 환경이 무르익었을 때 확률에 의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주가가 이유없이 오른다면 폭락할 위험이 커진다. 그럴 때 포텐셜 에너지가 잠재해 있다. 실제로 주가가 떨어지는건 확률이다. 그런데 결국 주가는 떨어진다. 확률로 잠재한 부분을 무시할 것인가 인정할 것인가다. 양자는 그것을 인정할 때 출발한다. 그것이 구조론의 질이다. 우리는 입자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지만 이미 왜곡되어 있다. 입자는 작용반작용에 의해 성립한다. 이미 사이비가 끼어든 것이다. 순수하지 않다. 인간은 모든 사유와 판단의 기초를 입자로 설정한다. 그러나 입자는 시공간의 그릇에 담겨 있고, 반복되는 것이며, 붙잡힌 것이고, 왜곡된 것이다. 물을 달라고 했는데 물컵에 담아서 준다. 이미 헷갈렸다. 물컵은 물이 아니다. 컵은 빼고 논해야 한다. 벌써 복잡해졌다. 물을 달라면 순수하게 물만 줘야 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컵이 없는데 어떻게 물을 줄 것인가? 반대로 당신이 물 속에 다이빙하면 된다. 생각을 바꾸라. 자신의 포지션을 고정시켜 놓고 물컵을 달라고 요구하지 말라. 당신이 능동적으로 물 속으로 다이빙하라. 그래야 진실을 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입자는 딱딱하다. 죽어있다. 이미 가짜다. 양자를 받아들이라. 질을 받아들이라. 입자 위에 양자가 당연히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의 존재는 입자다. 당신은 남자이거나 아니면 여자이며 그렇다면 이미 당신의 진실인 인간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생각하라. 당신은 남자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당신이 남자라고 여기면 입자를 본 것이며 인간으로 여기면 양자를 본 것이다. 남자로 보면 당신으로 충분하며 인간으로 보면 당신의 반쪽을 만나야 완전하다. 그 반쪽은 지금 당신에게 없다. 당신은 남자 혹은 여자이며 1/2의 존재다. 당신은 반쪽짜리다. 나머지 반쪽은 어디에 있는가? 없어도 있다고 쳐야 한다. 잠재해 있는 포텐셜에너지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 반쪽은 어딘가에 있지만 만나는 것은 확률에 달렸다. 고는 저와 만나야 음이 된다. 명은 암과 만나야 그림이 된다. 낮은 밤과 만나야 하루가 된다. 수요는 공급과 만나야 거래가 된다. 둘은 언제나 세트다. 당신은 입자로 세계를 보고 있으며 그것은 고를 잃은 저의 음, 명을 잃은 암의 그림, 낮을 잃은 밤의 하루, 수요를 잃은 공급의 거래다. 그것은 가짜이며 불완전하며 다른 것에 빌붙어 있는 것이다. 깨어나라.
질이라고 하니까 모르겠다는 분이 많아서 양자를 쓰기로 한다. 입자 이전에 양자가 있다. 그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처음부터 입자가 있다면 어미가 없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라시대 누구와 같아서 이상하다. 말이 되나?
양자는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 밤과 낮, 고와 저, 장과 단이 세트를 이루나 둘의 거리가 떨어져 있는 수가 있으므로 잘 관측되지 않는다. 하루살이는 봄은 알아도 여름은 모른다. 여름은 알아도 가을은 모른다. 지금 당장 그것이 없어도 잠재해 있다. 포텐셜에너지의 형태로 어딘가에 숨어 있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그대 앞에 나타난다. |
http://blog.naver.com/allcoo?Redirect=Log&logNo=100011416153 (나폴레옹의 대관식)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8&contents_id=5032 (존재의 일의성, 차이가 사물을 만들어낸다)
질보다 양자가 훨씬 이해가 잘 되네요
우와.. 이보다 명쾌할 수 없네요.
양자에 대해 지금까지 들었던 설명중 단연코 최고입니다!
명쾌하다면 거짓이고 이해가 잘 된다면 그럴 듯한겁니다
질을 질로서 파악해야지 양자같은 예로 이해한다면 진리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겁니다
반존재는 만남을 통해 존재로 상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