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언어는 귀납으로 출발하지만 연역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말이 연역어에 가깝다면 영어는 귀납어에 가깝다. 연역은 직관적인 깨달음을 낳고, 귀납은 과학적인 분석을 낳는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연역은 전제를 앞에 넣는 것이다. 전제를 앞에 넣으려면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어야 한다. 모르면 말하기가 곤란해진다. 그러므로 ‘있잖아요.’로 말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매우 어색한 것이다. 있긴 뭐가 있는데? 연역은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귀납한다. 귀납은 because를 쓴다. 영어식으로 말하는게 더 쉽다. 언어는 원래 상호작용에서 나왔다. 상호작용은 동사만으로 충분하다. 언어는 동사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가.’라고 한음절로 말했다. 두 음절 단어는 없었다. ‘가.’로 치고나가면 ‘어딜?’이 되돌아온다. ‘집에’로 받는다. 이걸 반복하다보니 ‘집에 가.’로 된 것이다. 최초의 문장이 만들어졌다. 문장을 발명한 사람은 아이큐 200일 것이 뻔하다. 인류는 거보를 내디딘 것이다. 문제는 귀납어가 훨씬 더 자연스럽다는 데 있다. 접속사를 쓰고 because를 붙이면 된다. and는 하나더인데 뒤에 하나를 더 붙이면 된다. 계속 붙여나가는 거다. 귀납어는 상호작용을 반영하므로 곤란한건 상대에게 떠넘기면 된다. because를 쓰고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하면 된다. 연역어는 상호작용이 없으므로 자기 책임이다. 그러므로 부담을 느낀다. “오빤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해놓고 자기가 왜 화났는지는 자기도 모른다. 왜 화가 났을까? 분위기 때문이다. 분위기라는 단어가 없으면? 말하기가 어렵다. 사실은 상대방이 웃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화가 난 거다. 이걸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어야 한다. 영어문장 같은 말이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한국어가 더 말하기 어렵다. ‘네가 웃지 않았으니 내가 먼저 웃겠다.’로 해도 되잖는가 말이다. 자기에게 책임이 떨어진다. 영어로 하면 편하다. 상대방 책임이다. 이미 나는 화가 나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다. 엎질러진 물이다. 수습은 상대방 책임이다. 한국어로 말하면 모든게 자기 책임이 되어서 매우 곤란해진다. 상호작용 구조에서는 먼저 화를 내는게 유리하다. 박그네들이 지금 이 수법을 쓰고 있다. 도둑이 제발저린 격으로, 방귀는 지가 뀌어놓고 지가 먼저 화를 낸다. 참으로 얍삽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연역어는 자기에게 책임이 떨어지므로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그러므로 직관을 요구한다. 말하면서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다. 생각해놓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다. 말하다보면 아이디어가 나오는거지 원래 답을 알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국어는 불편한 언어이고 그 때문에 항상 뭔가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을 낳는다. 그래서 직관을 발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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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구조에 빠져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였군요.
감사합니다. ^^
언어의 문제라기 보다 교육의 문제라 봅니다.토론,대화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말 하는 방법을 모르는 거죠.저도 마찬가지구요,그래서 겨우 술을 먹어야 토론 겸 논쟁을 합니다.
다만 안 싸우고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고 전체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도 일대일로 만나면 싸우게 됩니다.
존재와 인식.. 유물론과 관념론.. 연역과 귀납.. Sign과 언어과 부딪칠땐
앞에걸로..
민족이 진화하려면 언어,어법도 진화해야한다고 봅니다 현재의 언어구사들은 뭔가 어색하다고느꼈었네요
한국어가 본격적으로 발달한지는 불가 100년에 불과하오.
아직도 완전하게 정착되지 않았다고 보오.
독립신문이나 서유견문 기준이라도 120년 정도에 불과하오.
독어라면 길게는 500년(루터)~250년(칸트)가 되었고
영어라면 적어도 400여년(세익스피어)은 되었소.
특히 존대법은 문제가 많다.
글을 쓸때는 평어로 쓰니 문장의 간단하고,
또 문장의 구조를 생각의 흐름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배치할 수 있으나
말로 할때는 흘러나오는 대로 뱉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말하기가 어렵고
중구난방으로 나오기가 쉽다.
방송-토론 등에서는 존대법을 없애거나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