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 겔만 파인만 ### 존재 쿼크는 업, 다운, 참, 스트레인지, 톱, 바텀의 6종이 대칭을 이룬다. 대칭성이 스위치다. 대칭되면 통제된다. 머리와 꼬리가 갖추어져서 방향성이라는 소실점을 얻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건은 짝이 있으므로 대칭성이 있으나 사물은 짝이 없으므로 대칭성이 없어서 존재의 단위가 될 수 없다. 스위치가 없으므로 통제되지 않는다. 남녀가 없으면 사람이 없고, 여야가 없으면 정치가 없고, 밝음과 어둠이 없으면 빛이 없고, 길고 짧음이 없으면 길이가 없다. 대칭성의 스위치 없이 그냥 있는 것은 가짜다. 언어
자연과 인간을 잇는 것은 언어다. 언어가 스위치다. 철학자의 역할은 개념의 창안이다. 나아가 개념에 대칭성을 부여하고 방향성을 제시해서 메커니즘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은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통제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관점을 제시하고 언어를 설계해야 한다. 이 과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서양철학자는 없다. 그 주변에 얼쩡거린 사람은 좀 있다.
디자인
세상의 모든 디자인은 어떤 둘이 소통하게 하는 만남의 양식을 반영해야 하며, 만남의 양식이 아닌 그냥 디자인은 배척된다.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들이댄다면 혼자 꼴값 떠는 것이다. 첫 만남의 순간에 자기 취향을 전시하면 안 된다. 여자든 남자든 상대방 취향을 고려하여 중립적인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러자면 여자는 흰 드레스, 남자는 검은 양복이 되기 쉽다. 상대에게 선택권을 주려면 도화지처럼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심플해야 한다. 자기 취향대로 옷을 입으면 무례하고, 상대의 취향을 알아맞히는 독심술의 구사도 주제넘은 것이다. 중립에 서려면 심플할 수 밖에 없다. 또 어린이다운 순수가 반영되어야 한다. 어린이는 인생의 출발점에 서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하지 않고 대신 자기 마음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다. 구체적인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변주될 수 있는 소스를 원한다. 한옥이나 양옥이 아니라, 한옥도 되고 양옥도 되는 가능성을 원한다. 그런 디자인이 진짜다. ### 구조론 팟캐스트 4회입니다. |
가능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