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이므로 나중에 수정됩니다.-
진화론과 창조론 현대성과 공리주의
확률대응과 선제대응 인류의 역사는 집단지능을 진보시켜 온 역사이며 집단지능의 핵심은 인류가 지구 안밖에서 환경과의 상호작용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위험의 감수와 위험의 관리에 있다. 문명의 진보는 더 많은 영역에서의 상호작용을 낳는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위험과 마주친다. 그 위험을 통제하는 수준을 높여온 역사가 문명의 진보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실체가 집단지능이다. 두 가지 대응방법이 있다. 영국, 미국, 일본과 같은 해양국가들은 경험주의 철학이 기반을 두고 성공모델의 발굴을 위주로 하는 확률대응 모델을 추구해 왔다. 반면 독일, 프랑스, 중국과 같은 대륙국가들이 발달시켜 온 합리주의는 사전조율을 중요시하는 선제대응 모델이다. 선제대응은 사전합의와 조율, 일괄타결을 통해 위험을 미연에 방지한다. 대신 의사결정의 속도가 느려진다. 한 가지 문제를 두고 몇 십년씩 줄기차게 토론해야 한다. 확률대응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시에 적용해 보고 그 중에서 성공하는 하나의 모델을 대량으로 복제한다. 이 경우 반드시 희생자가 나타난다. 최고의 대응모델은 확률대응과 선제대응을 동시에 사용하되, 벤처기업과 같은 처음 시도하는 일은 확률대응으로 가고, 핵문제와 같이 실험할 수 없는 일은 선제대응으로 가는 것이다. 이때 확률대응에 따른 희생자의 발생을 막는 안전장치로 보험제도와 복지제도가 필요하다. 선 선제대응 후 확률대응이 맞다. 양자론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모든 일에 대한 완벽한 선제대응은 물리적으로 불능이다. 선제대응은 관측자가 사건에 포함되는 거시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양자가 입자에 앞선다. 양자는 확률대응하고 입자는 선제대응한다. 북유럽모델과 후진국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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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각종 정책이 남발되고 지원이 남발되지만, 실효는 정작 없음. 그 실패를 개인이 떠 맡아야 하기 때문.
그러다보니 개인들은 안정지향적이 될 수 밖에 없거나 한탕주의로 흐름. 그러니 먹튀만이 성행.
국가가 모험을 하고 리스크를 분산시키고, 개인은 국가라는 뒷배를 가지고 밀어부칠 수 있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어야 천정을 뚫는데, 국가는 모험도 하지 않으면서 리스크만을 개인들에게 계속하여 전가시킴.
이러다보니 개인이든 국가든 그 무엇을 시도하여도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만 반복되어 무기력과 좌절이 질병처럼 퍼지는 것이라고 보이네요.
기독교 내에서도 창조론이란 말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창조설 혹은 창조설화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죠.
이걸 두고 고지식한 기독교인들은 믿음이 없네,
성경을 안믿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죠.
로마 신화를 믿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단군 신화를 믿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창세기 1~11장까지는 선사시대 이야기로 고대 근동에 전해 내려온 신화인데, 그것을 창조론이라 이름을 떡 붙여 놓고 과학이니 뭐니 접근하는데,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지요.
창조론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이 맞고, 진화론으로 창조설을 공격한다는 것도 어폐입니다.
장이 다르고 영역이 다른데, 그걸 같은 링위에 올려놓는 일은 초딩들 혹은 무개념들이 하는 일로 보는 것이 좋을 수도.....
그동안 세상은 either ~ or의 논리, 사고구조, 세계관에 갇혀서 이거 아니면 저거를 선택해왔다.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틀린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구조론은 either ~ or가 아니라,
both ~ and를 논한다.
양쪽을 다 취한다.
그리고 가끔씩 거꾸로 neither ~ nor를 취하기도 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헛갈리기 시작한다.
이거 아니면 저거인줄 알았는데 둘 다래~
그래서 열심히 둘 다를 배우려 드는데, 갑자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하니 어리둥절할 수 밖에.
이거냐 저거냐도 아니고,
이거저거 둘다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뭐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때마다 구조론은 제 3의 길이 있지롱~ 하고 약올린다.
제 3의 길....... 그걸 볼 줄 알면 신 된다.
제가 보기에는
성경책 어디에도 창조론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은
구조론에서 말하는 일의성과 완전성을 표현하려는 의도입니다.
그 당시 인류가 쓴 단어가 몇 개나 되었나요?
보통 인간은 하루에 6백 단어 정도를 씁니다.
인디언 부족은 나뭇잎 종류만 40여가지로 분류해놓고
수만개의 동식물 이름을 사용하지만 이는 대개 심심풀이로 만든 명사이고
실제로 쓰는 언어는 동사이며 몇 단어가 안 됩니다.
부족민이 버섯 종류를 1만개로 분류해놓았어도 안 쳐줍니다.
일의성이니 완전성이니 하는 단어가 그 때는 없었던 거죠.
일의성은 족보를 조사해보면 70억 인류가 하나의 유전자로 귀일된다는 거죠.
완전성은 반복할 필요없이 한 방에 끝냈다는 건데
지구에 3000만종이 있다면 하느님이 종을 창조하려고 3천만번 노가다를 했다는 말이니
이는 하느님을 망신주려는 자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성경은 해석되는 것인데 어떻게 해석하는가입니다.
일의성과 완전성에 맞추지 않은 해석은 모두 왜곡입니다.
론은 모두 사람이 논하는 거고, 그 론을 따라 저마다 해석을 하는 거지요.
문제는 해석이 자기 본위가 아니라 text와 context를 모두 따라야 한다는 거.
그리고 뭐가 되든지 신의 뜻을 읽어야 한다는 거죠.
인간 족보를 거꾸로 올라가면 신으로 귀결되는데, 그게 진짜 인간의 모습이지요.
신은 노가다를 하지 않고, 가다가 있게 일하므로
그리고 주로 말로 하는 것이므로 해석을 잘해야 하는거죠.
언어를 따지는 거,
그게 바로 신이 하는 일이지요.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라거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거나,
하느님이 말씀하시길 빛이 있으라는 식의 표현은
모두 언어의 문제이지 "논"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을 창조론으로 보지말고 하나의 이야기로 풀면 엄청 재밌어집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게 무슨 뜻이지? 하면서.........
신처럼.....
신으로.....
성경에 이런 글귀도 있더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다." 요한의 복음 10:35
이는 신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면, 신 된다라는 말.
본문으로 좀더 적어주십사했는데 잘읽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