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
실존이 사건이면 본질은 사물이다. 사건이 사물에 앞선다. 실존이 형식이면 본질은 내용이다. 형식이 내용에 앞선다. 인간의 본질은 이성, 인격, 도덕 따위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으로 주장되었다. 틀렸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차이 뿐이다. 인간 개인이 동물 개체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다. 각별한 것은 인간의 문명이다. 인간이 존중받는 이유는 문명의 대표성 때문이다. 개인이 존중받는 것은 인류로부터 대표성을 위임받은 것이며, 그것은 문명의 존엄을 빌린 것이다. 문명은 자연과 대칭된다.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문명의 가치는 자연의 가치와 맞먹는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동물과 같으나 다만 문명 안에서의 의사결정 주체로서 존중받는다. 실존exist은 밖ex-으로 서다-st는 뜻이다.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실존이다.
본질
인간은 이성, 인격, 도덕, 윤리를 앞세워 동물과 차별화 하고 그것으로 본질을 표방하지만 가짜다. 인간성은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밖의 문명과 폭넓게 외연되어 있다. 안쪽의 의미가 아니라 바깥쪽의 맥락이 진짜다. 내용은 사건 안에 있으므로 거짓으로 꾸며지나 형식은 사건 밖에 있으므로 속일 수 없다. 돼지우리에서 살면 돼지되고, 사람 마을에 살면 사람된다. 일베마을에 살면 일베충되고 오유마을에 살면 오유인 된다. 어려서 야생에 버려져 늑대나 곰에 의해 길러지다가 인간사회로 돌아온 20여명의 야생아 중에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한 예는 한 명 뿐이다. 자연의 본질은 에너지에 있고 인간의 본질은 의사결정에 있다. 그 의사결정할 대상은 바깥에 있다. 물레방아는 바깥에 있는 물에 의해 돌아가고 인간의 마음은 바깥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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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구조론적인 것이며 샤르트르의 생각과 다르다. 샤르트르는 직관으로 포착한 주제를 두고 횡설수설했다. 그는 단지 화두를 던졌을 뿐이다.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진 것이지 스스로 답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샤르트르의 입장은 사물과 인간으로 구분하고, 사물은 인간에 의해 대상화 되나 인간은 주체일 뿐 대상화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는 인간 기준이므로 관념론이다. 샤르트르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내용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실어증과 같다. 생각은 있으나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자연과 인간이 있으며, 자연은 에너지를 따라가고 인간은 의사결정을 따라간다. 의사결정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기반을 둔다. 인간도 환경의 일부다. 상호작용이 실존이다. 본질은 원래 기독교의 관념인데 신으로부터 받은 무언가이다. 이는 과학적인 접근이 아니다. 망상이다.
대학 시절 서양철학 공부하다 실존주의를 만났을 때 사르트르와 까뮈를 접했는데
사르트르의 구토는 읽으면서 뭔 개소리 했고 까뮈의 이방인 에서는 향을 느꼈소.
이 후 제가 쓰는 왼쪽의 까뮈 사진을 당시 판넬로 구하고자 명동,청계천 등등 다 돌아 다녔는데 없었소.
10년 후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큰 사이즈 사진은 프랑스 모모 출판사가 판매한 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이를 먹으니 열정도 사라져 그 사진 구하는 것 포기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