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17385 vote 0 2007.10.07 (08:41:46)



요즘 유행어 ‘막장’을 떠올릴 수 있다. 분청사기를 보면 이건 정말 막장에서 살아 돌아온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자기가 추구할 수 있는 최후의 세계. 그래서 막장이다.

도자기는 예술이 아니라 산업이었다. 그 당시는 그랬다. 도공은 자기 자신을 예술가로 인식하지 못했다.

좋은 물건이 나오면 망치로 깨뜨려 버렸다. 그런 걸작은 가마를 헐면 100에 한 개나 나오는 건데 그 내막을 보르는 귀족이 좋은 것으로만 100개를 주문하고 그대로 조달을 못하면 매질을 하려드니 귀족의 주의를 끄는 좋은 것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중국제 도자기는 크고 화려하고 느끼하다. 예술이 아니라 산업이다. 지방 졸부의 허세가 반영되어 있다. ‘어떤 걸 원하세요? 뭐든 원하는 대로 제작해 드립니다. 우리 살람 못만드는게 없어요. 하오하오!’ 하는 제조업 종사자의 비굴한 태도가 엿보인다.

일본 꽃병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확실히 주문자의 기호에 영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가 좋아할까 참 세심하게도 고려했다. 고려청자도 귀족의 취향에 맞춘 것이다. 조선 백자에는 확실히 양반의 기호가 반영되어 있다.

요즘 나오는 도자기도 그렇다. 예쁜 것도 많고 특이한 것도 많고 세련된 것도 많은데 대략 소비자의 눈길을 끌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값을 올려받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 느낌이다. 그건 상품이다. 도자기가 아니다. 장식품이다.

분청사기는 어느날 도자기 산업이 망해서 귀족들의 주문이 끊어지자 도공이 ‘에라이 막장이다’ 하며 그냥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든 것처럼 보여진다. 그렇게 느껴진다. 도자기산업이 무너지면서 산업에서 예술로 변형된 것이다.

분청사기는 정말이지 누구 눈치 안 보고 만든 것이다. 성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려면 응당 이래야 한다는 논리의 지극한 경지에 닿아있다.

주문자의 기호와 취향과 신분과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으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분청사기에는 그것이 없다. 고려 귀족문화가 막을 내리고 조선 양반사회가 유교주의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부리기 전에 잠시 순수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소비자의 통제도 귀족의 통제도 이데올로기의 통제도 없이 그냥 마음대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발굴되는 것이다.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인위가 배제되고 자연의 본성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수석과도 같다. 내가 원하는 형태의 돌은 자연에 없다. 다만 자연이 원하는 형태의 돌이 굴러다닐 뿐이다. 나의 기호와 자연의 본래가 우연히 일치하는 지점이 발견된다. 본래 있던 것이 저절로 배어나오는 것.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찾아진 것.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sort
공지 닭도리탕 닭볶음탕 논란 종결 2 김동렬 2024-05-27 50916
공지 신라 금관의 비밀 image 7 김동렬 2024-06-12 41464
5119 정동영 김근태 장난하나 김동렬 2006-02-09 13947
5118 휴거되고 있는 한나라당 image 김동렬 2004-02-23 13946
5117 장신기는 입장을 분명히 하라 김동렬 2003-05-15 13946
5116 당신은 쾌락을 원하는가? image 2 김동렬 2017-09-09 13943
5115 영자의 전성시대 김동렬 2004-10-16 13943
5114 노건평씨 청와대에 가둬놓아야 한다 image 김동렬 2004-01-30 13943
5113 먹물의 가면님께 감사를 전하며 김동렬 2004-10-12 13940
5112 이겨서 기쁘다 image 김동렬 2003-10-31 13940
5111 손가락이 다섯인 이유 김동렬 2008-02-19 13938
5110 헤드라인을 읽지 말고 트렌드라인을 읽어라! image 김동렬 2003-06-21 13935
5109 이참에 박근혜 끌어내리자 김동렬 2005-04-28 13933
5108 얼빠진 한겨레 김동렬 2005-05-07 13932
5107 강준만 대 유시민 김동렬 2005-05-21 13931
5106 광해군의 경우 김동렬 2006-07-12 13929
5105 8월 3일 동영상 해설 3 김동렬 2009-08-04 13927
5104 순망치한(脣亡齒寒).. 김동렬 2005-10-31 13925
5103 진화는 마이너스다. image 3 김동렬 2011-07-19 13923
5102 확률을 알아야 구조를 안다 image 1 김동렬 2017-06-17 13920
5101 박승대가 된 임종석 김동렬 2005-05-25 13911
5100 김원웅씨? 당신 뭐하는 사람입니까? 김동렬 2003-01-27 13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