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dia.daum.net/society/people/newsview?newsid=20130325172016325
대개 말장난입니다.
내용은 읽을 필요없고 다만 진보주의자라면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지 사회적인 발언권을 줄 수 있을 뿐
이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에 동의하라고 하면 그건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사회가 갈등을 겪는게 대개 이런 것입니다.
진보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발언권을 주려고 하는데
무뇌좌파들은 그것을 이용해 억지를 부리고
수구꼴통들은 발언권을 못 줄 뿐 아니라 아예 말살하려고 시도합니다.
이 분들이 얼굴을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물리적인 테러 위협 때문입니다.
성을 거래할 수 있다면 폭력도 거래할 수 있게 됩니다.
성과 폭력 사이의 거리는 애매합니다.
예컨대 재벌이 가난뱅이를 때려놓고 '얼마면 돼?'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1) 지혜를 발휘하여 10억을 요구한다.
2) '너도 얼굴 돌려 대.' 하고 자신이 맞은 만큼 때려준다.
둘 다 실패입니다.
10억 받아내려고 하면 재벌은 일단 10억 주고
'9억9천9백만원어치 남았다. ' 하고 장부에 적어둡니다.
무엇인가?
이 경우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라 사회입니다.
상부구조가 있다는 거죠.
성매매는 윤리가 피해자입니다.
윤리가 공공자산인데 그걸 사적으로 팔아먹은 거지요.
성매매는 성을 판매하는게 아니라 윤리를 판매하는 겁니다.
윤리란 말하자면
초등학생들이 성매매로 나서겠다고 할 때 아버지가 겪는 곤란비용입니다.
성매매가 합법화 되면 모든 부모는 자식을 감시해야 하고
모든 남편은 아내를 감시해야 하고, 모든 아내는 남편을 감시해야 하는데
그때 초과되는 지출 말입니다.
정신적 에너지 손실이 막대합니다.
어린이 노동은 범죄입니다.
자본주의 초기에 7살 어린이를 고용해놓고
자유라는 단어를 방패막이로 내세우곤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신매매나 노예거래, 중혼은 범죄입니다.
상대방이 동의하면 백명과 결혼한들 어떠리? <- 범죄입니다.
어린이가 동의하면 고용한들 어떠리? <- 범죄입니다.
물론 애매한 지점은 있습니다.
시골 어린이는 농사일을 거들어야 합니다.
어린이 착취로 부모를 고발.. 이건 아니죠.
그러나 심한 노동이면 아동학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루 2시간 이상의 과외 및 학원교습은 아동학대죄로 처벌해야 합니다.
장기매매나 폭력매매도 불법입니다.
흥부가 매품을 팔면 범죄입니다.
군대도 사람을 사서 남의 자식을 대신 보내는 자유대한.. 이런 소리 하는 사람 있습니다.
예비군 훈련 대타로 뛰기.. 이런 업종 있었지요.
군대대행 노동자 모집. 2년 복무에 2천만원.. 필리핀 입국자 환영.. 이런 플랭카드가 걸릴지도.
동렬님이 윤리를 사회적 곤란비용으로 본다면, 저는 윤리를 공동체의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윤리는 개인이 공동체를 신뢰하고 그 속에서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을 맺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비유하자면 산산이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한데 모아주는 풀 같은 존재지요.
윤리는 공동체의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입니다. 평소에는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중대한 의사결정의 시점에서는 두 눈 앞에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 윤리입니다. 비윤리적 공동체, 즉 윤리를 매개로 한 구성원 상호 간의 신뢰가 없는 공동체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친구를 배신했다, 아내를 배신했다, 회사를 배신했다, 국가를 배신했다, 인류를 배신했다.
범죄자가 용서받을지언정, 배신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합니다. 한 번 배신하면 두 번 배신하고, 세 번 배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길로 계속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신자를 추적하고 처단하고 배신의 기록을 남겨 후대에 전합니다. 본보기로 삼는 것이지요. 심지어 아이들의 동화 속에서도 배신자는 악인으로 규정됩니다. 왜? 신뢰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괜히 공자가 신을 공동체의 최고 덕목으로 여긴 게 아니죠.
다시, 성노동 문제로 들어가면, 성노동 문제는 복합적입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역사 온갖 것들이 얽혀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포지션으로 보면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취하는 입장은 단순합니다. 그리고 그 단순성만큼 무지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문제일수록 고도로 정밀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찬반은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성매매관련 기존의 입장과 각각의 문제점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매매특별법을 옹호하는 '완전 불법화'
-멍청한 포지션입니다. 주로 우파진영에서 떠드는 이야기인데, 유사 이래로 법으로 문제를 해결한 사례는 없습니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문제는 세, 법, 술 순으로 해결해야 하고, 세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법은 문제의 악화를 막을 뿐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학교 폭력 문제에 대해서도 꼭 비행청소년에 대한 처벌수위를 높여서 해결하자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법은 금을 그어 놓고 그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금을 그어놓으면, 그 좁은 공간에서 누군가는 그냥 저절로 밀쳐져 밖으로 튕겨 나옵니다. 확률적으로 그렇습니다.
2. 성노동자에 대한 처벌을 없애야 한다는 '성판매자 비범죄화'
-이건 보통 공감을 잘 하고 착하지만 멍청한 무뇌좌파들이 많이 떠드는데, 이들은 성노동자를 두고 기본적으로 불쌍하다는 관점을, 이들을 계몽시켜 좋은 직업을 갖게 해주면 될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을 갖고 처벌 대신 교육과 재활 위주로 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하는 좋은 직업이란? 네일아트, 그리고 미용사. 네일아트나 미용사를 무시하는게 아니라, 주로 단기간 교육시켜 사회로 돌려보내려고 한다는게 문제입니다. 교육과 재활을 통해 사회공동체로 다시 복귀시키겠다는 방향성은 맞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은 성노동자들이 이미 사회를, 공동체를 적으로 돌렸다는점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육이나 재활로는 그들이 사회에 대해 갖는 불신을 신뢰로 바꿔 놓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사회를 불신하고, 공동체의 법과 제도, 윤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모든 교육과 재활은 도로아미타불입니다. 네일아트? 미용? 좀만 하다가 손님들한테 욕먹고, 박봉이고, 에라 모르겠다. 원래 하던 거나 하자.
우리는 인간에 대한 잘못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을 교육시켜 행동을 변화시킨다? 어린애들한테나 통하는 겁니다. 아니, 사실은 아이들한테도 안통합니다. 유치원 아이들이라도 선생님에 대한, 유치원에 대한 불신이 생기면 말 안 듣습니다. 겉으로 듣는 척 하면서 뒤에 가서는 딴 짓합니다. 자신이 지금 속한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 신뢰, 믿음이 있어야 그 안에서의 규칙도 따르고 불편해도 이런 저런 것 감수하면서 지내는 겁니다. 그게 없으면? 게다가 그 공동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면? 반드시 배신합니다. 지금은 안 해도 언젠가는 합니다.
간혹 성매매를 하다가 사회에 복귀하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그들을 엄마처럼 품어줄 누군가 혹은 공동체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렇게 유사가족을 형성하거나 자활공동체 안에 들어가 다시 신뢰와 믿음을 쌓지 않는 한, 절대 사회로 복귀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던 것 계속 하면서 삽니다. 남들이 보기엔 바보같고, 이상하고, 멍청해 보이지만, 그게 그들에게만 해당하는게 아닙니다. 인간이 원래 그렇습니다.
3. 성판매자와 성구매자 모두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개인 간 성매매 합법화'
이건 꽤 급진적인 진보적 인사들에게서 나오는 말들인데, 이들 역시 성매매가 본질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복수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수심은 기사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혼남이 아내의 동의 없이 성을 구매했다면 기혼남이 비난을 받아야지 성노동자를 비난할 일은 아니다. 어찌 보면 결혼이야말로 가장 고전적인 '성 거래'다."
"다른 노동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정말 그 일이 하고 싶어서, 자아실현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다양한 이유로 일을 하겠지만 돈이 필요해 하는 게 가장 큰 이유 아닌가. 물론 그 안에서 나름의 보람을 찾는 사람도 있고, 싫지만 억지로 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성노동도 마찬가지다."
논리는 단순합니다.
<따지고 보면 결혼도 성매매 아닌가?><따지고 보면 일은 돈이 필요해 하는 거고, 성노동도 마찬가지 아닌가?>
구조론에서는 이러한 논리들을 대응논리라고 부릅니다. "니가 이렇게 하니까 나도 이렇게 하겠다"는 식이지요.
그런데, 이런 논리는 안 쳐줍니다. 지성인이 취할 입장이 아니며 문제 해결의 입장도 아닙니다.
선생님이 욕했잖아요? 근데 왜 전 선생님한테 욕하면 안 돼요?
엄마가 때렸잖아요? 그럼 난 왜 엄마를 때리면 안 돼요?
사회가 이미 인신을 매매하는데, 성은 왜 안돼요?
<따지고 보면> 결혼을 통해 성을 사고 파는 경우도 있고 <따지고 보면> 성매매나 일반 노동이나 비슷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건 겉만 보면 그런 거고, 결혼과 노동의 본질을 간과한 것입니다. 결혼이라든지 노동을 자꾸 개인들의 사고 파는 매매행위로 보면 곤란합니다. 그건 개미가 배고파서 먹이를 물어오고 자기가 먹으려고 먹이를 쌓아둔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문제는 무조건 상부구조를 봐야 합니다. 하부구조를 보면 안 풀립니다.
결혼의 본질은 관계의 확장입니다. 결혼은 고래로부터 인류가 택한 최상의 공동체 조합법, 달리 말하면 최상의 유전자풀 다양화 방법이었습니다. 결혼을 통해 서로 다른 두 공동체가 믹싱되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창출해왔고, 그 공동체는 커진 덩치만큼 더욱 큰 문제들을 상대하면서 집단지성을 높여오고, 그걸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지금 50억 인류에 도달한 것입니다. 결혼을 그냥 남녀의 결합 정도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겁니다. 중요한 것은 아담과 이브의 결혼이 지금의 50억 인류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부정하면 그냥 인류를 부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신성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게 신성하지 않으면 인류가 신성하지 않은게 되니까요.
노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은 다른 말로 하면 일이고, 일의 본질은 세 가지 단어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 방향성, 낳음.
외부에서 에너지를 끌어들일 입구가 세팅되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 없이는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일, 완전한 노동은 에너지의 입구인 질차원부터 세팅이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팅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입구가 막혀있으면 일 못합니다. 입구가 작으면 에너지의 양도 작아지고 하는 일도 작아집니다, 입구가 크면 에너지도 많이 받고, 그만큼 큰 일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노동의 핵심은 동기부여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바로 공동체에 의해 부여됩니다. 가족이라는, 가문이라는, 부족이라는, 국가라는, 인류라는 공동체의 존재 없이, 구조론적으로 말하자면 공동체라는 질이 없이는 노동의 가치는 없습니다. 이러한 동기는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냥 내키는대로 아무렇게 일하자는 식으로 에너지가 흐르는게 아니라, 노동을 통해 최대한 공동체의 중심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세팅이 되어 있습니다. 요즘 장안의 화제인 미생을 보면 노동의 본질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입사원인 장그래가 팀 내에서 역할을 맡고 점점 자리를 잡아가면서 팀-부서-회사-국가-세계를 만나게 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노동입니다. 공동체로부터 부여받은 에너지를 타고 개인이 세계로 침투하고 이를 통해 ( )를 낳는 것이 진짜 노동입니다.
성매매의 문제는 그것이 노동의 핵심인 동기부여를 가로막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노동의 본질을 침해하는 것이 노동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성매매는 반-노동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기승전결의 기의 자리에 돈을 놓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관계이고, 그것도 진실한 관계,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낳을 수 있는 파트너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 원하는 것입니다. 자꾸 인간이 돈을 원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돈이 인간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동기가 인간을 움직이고 그 동기는 인간이 공동체의 중심으로 점점 더 깊게 들어가는 데에서 얻어집니다. 마르크스의 노동에 관한 관점도 그렇습니다. 그는 노동을 본질적으로 완전한 공동체(사회주의적 공동체) 내에서의 자기 실현의 과정으로 보았지 결코 돈을 벌기 위한 행위로 보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행위로 보는 것은 그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관점이고 그걸 부정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주장한 것이지요. 그의 관점에서 노동의 진정한 가치는 결국 완전한 공동체의 건설에서 얻어지는 것이었으니까요.
성매매를 노동으로 친다는 것은 돈을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로 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승전결에서의 기에 돈을 놓겠다는 것이지요. 전도몽상입니다. 좌파지식인들이 성매매를 노동으로 본다면 그건 마르크스에 대한 배신입니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노동은 자기실현적인 행위이지만, 성매매는 자기소외적인 행위니까요.
마르크스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들은 <매매>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교환될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는 거래행위, 즉 돈을 기에 놓고 노동을 사고 파는 행위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보았고, 이는 지금도 유효한 관점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교과서에서 노동을 두고 그것이 공동체에 대해 지니는 가치, 개인의 자기실현에 대해 갖는 함의를 가르치는 겁니다.
이처럼 성노동 옹호 진영은 결혼과 노동에 대한 관점부터 첫단추를 잘못 꿰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혼과 노동의 현상을 두고 그것이 성매매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데, 간단히 말해 결혼은 인류를 낳았고, 노동은 문명을 낳았습니다. 성매매는? 그냥 필요한 것을 사고 파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그런게 가치를 낳고 의미를 낳는다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운동선수가 몸을 파는 걸까요? 돈이 필요해서 몸을 팔고 그걸 관중들은 관람을 통해 얻는 쾌감을 구하기 위해 돈을 들여 사는 걸까요? 노동의 본질은 사고파는게 아닙니다. 매매는 컷으로 본 거고, 컷을 죽 이어서 보면 영화 한편이 나옵니다. 베이브 루스의 홈런 컷만 보고, 그리고 그걸 바라보면서 침을 흘리는 관중의 표정만 클로즈업해서 보고 베이브루스는 돈 벌기 위해 야구했고, 관중은 돈 들여 홈런 장면 보고 기분 째졌으니 좋겠네 하고 감상평 남기면 곤란합니다. 그 홈런으로부터 지금의 메이저 리그라는 세계 최고의 리그가 탄생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노동의 진짜 가치는 그런 겁니다. 낳음의 의미는 그런 겁니다. 성매매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냥 컷일 뿐 영화가 되지 못합니다. 왜? 그것이 공동체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컷들을 이어붙일 신뢰라는 풀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매자가 돈을 주고 성노동자의 몸을 산다고 생각하기에 성노동자를 자신의 소유로 여기고 함부로 대한다. 성적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이라고 인식한다면 성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정리하자면, 위의 기사 인용문을 보면 문제의 본질을 잘못 인식하고 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성적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이라고 인식하면 성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다고요?
구매자가 돈을 주고 성노동자의 몸을 산다고 생각하기에 성노동자를 자기의 소유로 여기고 함부로 대한다고요?
화자는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순진한 발상입니다.
사람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공동체이고, 그 속에서의 관계 맺음이고, 신뢰이고, 우정이고, 사랑이고, 믿음이고 뭐 이런 겁니다. 매매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성매매하는 사람들도, 결국 그 무용담을 친구들에게 떠들기 위해 가는 겁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꼴릿한 후기를 남기기 위해 가는 겁니다. 그런 인간의 공동체 본능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인식은 앞으로도 별로 개선될 여지가 없을 겁니다. 그들은 돈을 주고 성을 사면서도 여전히 찜찜하고 불안하고 떳떳하지 못할 것입니다. 파는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이건 인식과 관계없습니다. 아무리 교육을 하고 계몽을 해도 안 됩니다. 왜? 다들 무의식으로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금 성을 사고 판 것이 단순히 개인 간의 매매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신뢰를 파괴하는 것이란 걸 말이죠.
▼ 일을 그만둔 이유는.
"가족들과 살고 있어서 일하기가 쉽지 않았다. 손님을 만나면서 소요되는 감정노동, 에너지가 소진되는 느낌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성노동에 대한 지식과 가치관, 정신적 기반이 어느 정도 확고해진 지금이라면 그처럼 쉽게 그만두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원래, 가족을 의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하는 것 같아도 다 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행위의 판단 기준을 항상 더 큰 공동체에 두고 있습니다.
밀사라는 여성은 그 판단 기준을 성노동자들에게 두고 있는 것이구요.
성매매가 개인 간의 거래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단편적인 발상입니다.
고등학생이 성매매를 하면 학부모가 호출되고
남편이 성매매를 하면 가정이 난리나고
선생님이 성매매를 하면 학교가 뒤집히고
대통령이 성매매를 하면 국가가 흔들립니다(물론 이탈리아나 유신치하 한국 같은 막장은 예외)
이건 그냥, 개인과 개인이 성을 사고 판게 아니에요.
부모와 자식간의,
남편과 아내와의
선생과 학생과의
대통령과 국민과의
관계가 흔들리는 겁니다.
신뢰가 무너지는 거예요.
이 점을 알아야 대화가 가능합니다.
문제 해결은 항상 상부구조, 즉 공동체의 존재를 가정하고 진행되어야 합니다.
의사결정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단위로 일어남을 알고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각이 있으니까 지진이 나는 겁니다. 이건 그냥 물리적인 현상이에요.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있으니까 성매매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대화도 하고 문제해결도 하는 겁니다.
아줌마들이 어리석어서, 선입견 때문에 성매매 문제에 눈에 불을 키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보는 건 오산입니다.
그녀들은 이 문제를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보는 겁니다.
상대를 지금 내 남편으로, 애 아빠로 두고 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인 겁니다.
지금 당장 가정을 유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겁니다. 왜? 신뢰가 깨졌으니까.
밖에 나가서 돈 주고 섹스를 샀다면,
나 역시 돈 주고 산 것일 수 있으니까. 내 아이 역시 돈 주고 산 것일 수 있으니까.
한 번 의심이 시작되면 끝이 없고, 그에 들어가는 심적 에너지와 괴로움이 엄청나기 때문에
아예 사전에 성매매는 안 된다고 미리 못을 박는 겁니다.
와우~ 시원합니다.
아주 명확하게 말씀해 주셔서 참 많은 도움 받았습니다.
성문제가 애매했었거든요. ^^.
윤리는 항상 공동체성을 담보합니다.
개인 윤리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언어도단이지요.
그래서 개인이 어떤 표현을 하든 그건 자유이고 표현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표현의 내용까지 존중할 필요는 없지요.
목소리의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하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분별할 수 있어야하겠지요.
어떤 법이든 그 법이 공동체의 안녕과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면 법으로서의 존재의미는 이미 상실한 겁니다.
그런 면에서 윤리는 ethics 가 아닌 an ethic 혹은 the ethic이라고 해야 맞는 거라 생각합니다.
진리가 하나이듯 인류를 위한 윤리도 하나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보화되고 전문화된 집단에서는 논의가 불필요한 부분입니다.
어떤식으로건 성적관계가 자유롭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남자건 여자간 마찬가지입니다.
섹스도 관계의 한 단면을 보인것뿐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일상에서, 다음날 업무에 지장줄정도로, 남여관계를 업무에 간섭시키지는 않습니다.
딱 단절지어줍니다. '자 여기까지, 다음은 알아서 하자고.'
뉴욕의 전문직들은 가능한 이야기지만, 뉴저지의 서버번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활의 결과물인, studio와 house의 구조가 그 주거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가족관계의 붕괴는, 서구의 교육받은 남자들사이에서는 70년대 이후부터의 오래된 문제입니다.
80년대 이후부터의 전문직 서구 여성들에게도 받아들여진 문제구요.
외롭다면, 그들에게 애완견이나 잘생긴 사냥견이 낳습니다. 불필요한 인간관계 갈등을 주진 않으니까요.
적어도 다음날 아침, 낯선 사람이 자기 침대에서 12시까지 자진 않으니까요.
윤리는 사회의 신용자산이고
도덕은 개인의 신용자산이오.
윤리는 공원과 같고 도덕은 가정집의 정원과 같소.
지난번에 말고기 햄버거가 문제로 되었는데 말고기가 아깝다고 북한에 주면?
그 논리를 극단적으로 전개하여
특별한 경우 안전성이 검증된 인육은 먹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나오.
병원에서 나오는 인체를 화장품 제조에도 쓰고
잘 가공해서 먹어보자고 할 넘이 틀림없이 있소.
그렇다면?
언제 사람이 사람에게 잡아먹힐지 모르게 되오.
논리는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소.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셈.
재앙이 되오.
딱 잘라서 절대로 말고기는 폐기해야 하오.
어제 저녁에, 인도 대학원생들하고 카레를 먹다가 들은 이야기
'한국 젊은이들은 그렇게 남녀관계에서 자유롭나'
적어도 아시아는, 이미 한국을 '표상'으로 삼고있다는 사실.
발끈할게 아니라, 주목받고 있다는걸 염두에 두길.
남녀관계가, 문화의 트랜드고, 사회의 근간을 두니까.
다만, 현실은 독재자 딸 칠푸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