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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성기를 봤다는 딸, 그것이 거짓일 확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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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와 가장 가까운 친구인 테오의 5살 딸 클라라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어린 아이다. 유치원 원장의 말처럼 클라라의 상상력은 비상한 경지에 있으며, 또래 아이들과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클라라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루카스가 자리를 틀고있다. 클라라는 루카스를 아빠의 친구나 선생님으로 대하지 않으려 한다. 사춘기 소녀처럼 생각하고행동하는 클라라!
루카스에 선물을 거절당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클라라는 순간적으로 '아저씨가 성기를 보여줬노라' 거짓말을 했다. 이 거짓말이 마을 구성원 전체를 집단적 광기로 몰고 간다.
'어린 아이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반성적인 사고에 조금도 익숙하지 않으며, 제2의 가능성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 사람들. 거짓말은 어른들의 전유물이며, 아이들은 진실만을 말한다는 신화 같은 믿음에 그들은 꽁꽁 동여매어져 있다.
진실의 덫에 갇힌 사람들
▲영화 < 더 헌트 > 는 너무나도 취약한 인간과 인간세상의 면모를 낱낱이 까발린다. |
ⓒ 엣나인필름 |
이런 맥락에서 < 더 헌트 > 는 너무나도 취약한 인간과 인간세상의 면모를 낱낱이 까발린다. 클라라의 말이 상상의 세계에서 나왔는지, 거짓과 허구의 세계에서 출발한 것인지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실하고 사려 깊은 유치원 원장의 견해 표명에 기대 사건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미리 포기하고 일찌감치 집단 최면상태에 빠져든다.
루카스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테오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관객을 충격과 공포로 인도한다. 우정과 가족애 사이에서 테오는 잠시 동요하지만, 클라라를 바라보는 부성애가 우정을 압도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면 우리는 누구의 진실에 동조할 것인가. 딸인가, 친구인가.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고 있는 진실은 언제나 진실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그저 진실이기를 우리는 바라는 것일까. 습관처럼 환청처럼 혹은 피부마냥 익숙해진 관계처럼 그저 진실이려니 하고 치부해 버리는 것일까. < 더 헌트 > 가 관객에게 유의미한 영화로 다가오는 대목이 거기 있을 성싶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 본질을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인간 이성의 허술함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과 문제 제기!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에서
< 더 헌트 > 가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이다. 유치원 원장의 제보로 경찰 조사를 받은 루카스는 혐의가 없는 것이 밝혀져 석방되지만 사태는 호전되지 않는다. 한 가족처럼 지냈던 마을 사람들이,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과 그들의 가족이 루카스를 경원한다. 식료품점 점원들은 가공할 물리적 폭력까지 서슴지 않는다.
루카스가 은밀하게 잠입해 사슴을 노린 것처럼 사람들은 암묵적인 합의에 의지해 루카스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루카스의 라이플총이 사슴 사냥 도구라면, 사람들의 불신과 조롱과 냉소와 폭력은 루카스의 마녀 사냥 도구인 셈이다. 집단적 신념과 광기에 휩싸인 그들은 사냥감의 진실 혹은 내면세계 혹은 배려 따위에는 냉담하고 무관심하다.
약육강식과 전체주의적인 진실 그리고 야만적인 폭력성이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완벽하게 고립되고 무력해진 루카스의 궐기는 당연해 보인다. 클라라를 따뜻하고 자상하게 대했던 루카스. 과연 그는 자신에게 닥친 마을 사람들 전체의 분노와 폭력으로부터 자신과 아들 마커스와 진실추구에 성공할 것인가, 그것이 < 더 헌트 > 의 관건이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거짓의 행렬
▲문제는 루카스 한 사람에게 집단적 광기가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루카스를 둘러싼 사람들까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
ⓒ 엣나인필름 |
만약 이 지점에서 영화가 행복하게 관객과 작별했다면 우리도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북유럽 영화가 어디 그리 호락호락한가. 빈터베르크 감독은 진실의 부활과 우정의 복원, 관계의 건강한 재구축이 절대로 쉽지 않은 작업임을 드러낸다. 노루목에 서서 사슴을 기다리는 루카스.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 발의 총성. 넋을 잃고 망연자실해하는 루카스.
그렇게 < 더 헌트 > 는 관객을 마지막까지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간다. 한 사람을 둘러싼 의혹의 완전한 해명과 그것의 전체적인 수용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집단적인 딱지나 왕따 내지 낙인이 대물림처럼 자리 잡은 국가 지상주의와 '반공 콤플렉스'의 천국 대한민국에서 이런 징후는 도처에서 확인 가능하다.
문제는 루카스 한 사람에게 집단적 광기가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루카스를 둘러싼 사람들까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루카스의 애인뿐만 아니라, 마커스마저 어느 때인가 그런 거짓과 폭력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것이 진실의 이름으로든, 애국주의 내지 민족주의의 탈을 쓰든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영화의 주제다.
당신의 판단과 믿음, 언제나 맞았나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들의 표정이 자못 무거워 보였다. 몇몇 관객은 영화가 끝났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장면이 빈터베르크 영화의 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오랜 숙고와 충격을 가슴 깊은 곳에서 추스르고 난 연후에야 그들은 자리를 벗어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 더 헌트 > 는 울림의 폭과 깊이가 남다른 영화다.
우리가 자주 대면하는 진실과 허위, 개인과 집단, 개인과 국가 사이의 충돌과 그 결과를 영화는 대리 체험하도록 인도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아프도록 묻고 또 묻는다.
"만일 당신이 루카스 같은 상황과 직면하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집단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해관계로 민족의 명운이라는 대의로 개인과 특정 집단에게 폭력과 광기와 마녀사냥을 행하지는 않았는가. 당신의 판단과 믿음은 언제나 올발랐으며,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정말 그러한가."
중요한 건, 미친 넘이 아니라 정상인도 저 짓을 한다는 겁니다.
광기에 물든 사이코패스같은 어떤 미친넘이 루카스를 괴롭히는게 아니라
우리가 정상인이라고, 일반인이라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 루카스를 괴롭히고 죽인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우리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유전자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게 진짜 문제이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태종우라고 있습니다. 정사인지 야사인지는 모르겠는데, 조선시대 태종이 날이 하도 가물어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니까, 제단을 높이쌓고 자신을 제물로 삼아 불을 붙여 기우제를 지내려고 하던 찰나에 하늘이 감동해서 비를 내려주었다는 건데.
가뭄이던, 질병이던, 범죄던, 공동체에 긴장의 공기가 감돌때, 그 팽팽한 긴장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안겨줍니다. 그럴 때면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제물을 찾습니다. 그리고 죽이죠.
원래 고대의 왕은 일종의 제물에 가까웠습니다.
성대한 식을 올려 왕으로 추대하고, 그 다음엔 죽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공동체의 소모품으로 쓰고, 기꺼이 그러한 희생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안그런가요?
군대가면 꼭 있습니다. 한 사람은 대표적인 고문관이 되어 조롱과 멸시를 받습니다.
동아리를 가봐도, 놀림과 갈굼을 당하는 사람이 꼭 한 사람은 나옵니다.
회사를 가도, 책임전가의 대상이 되고 화풀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꼭 한 사람은 나옵니다.
그런 야만의 본능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건 광기도 뭣도 아니고 그냥 본능 같은 겁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본능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이성으로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예전같으면, 엄한 동네 바보 예슬이 아빠 하나 잡아서 살인범으로 몰았던 것을 이제는 과학수사로 진짜 범인을 찾듯이
공동체에 긴장과 스트레스가 결린 진짜 원인을 발견해서 그에 대응하는 방법이 있는 거죠.
아무튼 아무나 족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라는 본능의 명령을 합리적인 대응으로 대체하지 않는 한 헌트는 계속됩니다.
기우제는 일기예보와 인공강우로 대체해야 태종처럼 억지로 제단 위에 올라가 제 몸에 불을 붙이는 뻘짓을 안 합니다.
글쓴이의 요지는 아이도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생사람 잡는 멍충이들이다. 이런 것 같은데
마을 사람들이 원한 건 진실이 아니라
침묵 내지는 평안, 현상유지를 택한 듯 하네요
그냥 한 사람 잡아 족치는게
효율적이라는 거(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듬)
조지프 매카시의 경우처럼 청문회를 열어서
진실을 밝혀내기는 지난한 노릇이고
그렇다고 아이를 청문회에 세울수도 없고
가장 손쉽게 조용히 끝나는 방법을 택한 것
고립된 작은 마을이기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판결
드레퓌스 사건처럼
문제를 확대하면 할 수록
외부의 개입이 불가피할 것이고
마을의 존립에 위기가 올 수도 있으므로
문제는 이 마을에는 에밀 졸라가 없다는 것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요지는
과연 마녀사냥을 누가 하고 있느냐?
이 글의 글쓴이가 하고 있습니다.
김규종이 마녀사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누가 광기에 빠졌느냐?
이 김규종이 광기에 빠졌습니다.
김규종 이 자는 까뮈의 이방인을 읽어보지 못했거나
읽었다 해도 이해를 못한 거죠.
마을사람들은 애들 말은 믿을게 못된다는거 다 알고 있습니다.
누구는 뭐 애 안 키워 봤겠습니까? 바보가 아닐진대 그걸 모를까요?
그러나 마을을 감도는 불안한 공기를 정화하기 위해서
사건의 원인제공자를 제거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겁니다.
이 글의 글쓴이 또한 그러한 합의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은 중요한게 아닙니다.
마을을 감도는 불온한 공기가 문제입니다.
이 때는 잘 설계된 거짓말이 필요한 것이며
유치원 원장이 그 잘 설계된 거짓말을 제공한 것이며
이 글의 글쓴이 또한 거짓말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자가 그것을 원하니까요.
수요가 있고 공급이 있으면 시스템은 작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인간을 죽입니다.
첫줄에 나오는 '죽마고우'..
바로 이것이 모든 악행의 원인입니다.
아버지를 위해 자식을 생매장하려던 돌종의 손순처럼
남은 못 죽여도 내 자식은 꼭 죽이고 마는 것이 인간심리.
죽마고우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예살인이 존재하는 거.
남을 죽이면 안 되지만 나는 죽여도 되거든요.
클라라가 루카스를 죽이려는 것도 마찬가지.
연극이 시작되면 자신이 맡은 배역을 해야합니다.
루카스는 억울하게 죽는 사람의 배역을 맡은 것입니다.
김규종은 마녀사냥이다 하고 소리치는 배역을 맡은 거고.
까뮈의 이방인으로 돌아가서
루카스는 이방인이 아니고 일방인이라서 문제가 된 겁니다.
그 마을에는 닫힌계가 형성되어 모두 그 안에 갖힘. 거기서 달리 할것을 없음. 장단을 맞출 수 밖에.
클라라...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빨간구두 신고 계속 춤추어야 했던 동화속 소녀 이름인것도 같고...
시골에 귀농하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많이 호소합니다.
이 경우 해결책은 딱 하나 뿐인데 그 마을의 터줏대감(꼭 있음, 배후조종자)을 찾아가서
술 한잔 사주고 "아따 형님 시방 뭐하요?"하고 재롱떨면서 끈적끈적해주는 것 뿐입니다.
그게 내키지 않으면 그냥 말 안하고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거죠.
교회안에서도 서로 사귀는 커플이 있으면 그걸 깨려고 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왜그런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서로 사귀는 커플이 있으면 서로 잘 되도록 응원해줘야하는데....둘이 있을때는 좋은 말하며 칭찬하다가 서로 나뉘어 있으면 험담을 늘어놓아 서로 헤어지게 만듭니다.
뭐하자는 짓들인지.....인간은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게 셋팅되어 있는것일까요? 내가 99억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이 가진 1억이 탐나는 이유가 저 1억이면 내 99억이 100억이 될수 있다는 생각에.....다른 사람의 1억을 빼앗고
싶어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셋팅되어 있기 때문일까요?
클라라는 루카스를 사랑하고 루카스가 자기를 사랑해주기를 원하는데 루카스의 사랑을 원하는 클라라가 성적인것을 원해서 성기를 봤다고 거짓말을 한것은 아닐것이다. 단지 그런 말을 통해서 클라라는 루카스가 자기에게 관심을 더 가져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루카스는 마을사람에게 오해를 풀려고 할 필요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같으면 클라라와 대화를 하든 클라라와의 관계회복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문제가 해결되면 마을사람들의 오해도 풀릴까? 그렇게 될리는 없겠지.....하지만 클라라와 루카스가 손을 잡고 동내한바뀌를 돈다면........
마을 터줏대감을 찾아가 술한잔 사주며 흉금없는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면 고립에서 해방되듯이..... 루카스는 법정이 아닌 클라라와의 관게를 회복함으로서 고립에서 해방될수 있는 것이다. 클라라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 거짓말을 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유없는 거짓말은 없다!
그리고 내가 19살때 8살먹은 꼬마어린아이가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것을 질투하는것을 보았다. 어린아이가 뭘 알겠는가! 그 질투를 그냥 받아주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질투를 받아주라고 해서 성적인 행동을 하라는 것으로 잘못알아들으면 바보.......
그냥 소통하면된다. 뭐가 문제지?
교회 안에서 커플을 깨는 것도 나쁜 공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을 감도는 묘한 긴장, 서먹함, 어색함이 부자연스러운 거죠.
왜냐하면 익숙한 역할놀이의 대본을 고쳐야 하니까요.
내무반에 30명의 병사가 있는데
한 명의 동성애자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면 어떻게 할까요?(배경은 옛날)
혹은 30명이 있는 교실에서 절도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범인이라면?
누군지는 모르는 거죠.
어쨌든 그 한 명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착한 사람이 억울해도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자수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자수하지 않으면 아무나 지목된 사람이 자수해야 합니다.
근데 착오이고 실제로는 동성애자가 없거나 절도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떨까요?
이건 더 끔찍한 재난입니다.
그 경우에도 있는 걸로 치고 누군가 하나를 독박씌워서 단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벌인 헛소동을 의미있게 하기 위해서죠.
근데 인간들이 그렇게 합니다.
합리주의 병폐.
타블로 사건만 해도 타블로가 학력을 위조했다고 순순히 자백했다면
오히려 더 훈훈한 결말이 되었을 거 같은 예감.
학력위조 안한게 더 중죄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안티를 자행한 악플러들은
순순히 범행을 자백하는 타블로를 도리어 위로해주는 착한 팬 역할을 맡고싶었거든요.
타블로가 범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정함으로써
졸지에 안티 십만 명을 범죄자로 만들었습니다.
수구꼴통이 가장 두려워 하는 사실은
빨갱이의 준동이 아니라 빨갱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타블로가 학력을 위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도
범죄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10만명을 범죄자로 만드는게 더 큰 일이니까.
무지나 편견이 문제가 아니라 역할게임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성실하고 사려 깊은 유치원 원장의 견해 표명에 기대 사건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미리 포기하고 일찌감치 집단 최면상태에 빠져든다.-----------
이건 이 마을의 최고 지성인이 유치원 원장이라는건데.
지성인이 유치원 원장 하나라는 데서 이미 시망.
이 마을은 답이 없음.
원래 마을의 수준은 그 마을에서 가장 똑똑한 넘이 결정하기 마련이고, 그 똑똑한 넘이 유치원 원장이라는데서 영화의 결론이 이미 나버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