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Julian Barnes)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
이 책을 읽고 머리속에서 뭔가가 질서 정연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 많은 철학적 명제들과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가설들이 있고 반전이 있지만 명확하게 확 와 닿지는 않는 그런거?
다들 엄청난 반전이라고 구구절절 써 놓았는데도 말이다... 스포일러를 우려해서 였을까?
ㅋㅋ... 당췌...
그래서 이 소설이 어떤 소설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그 구조를 밝혀보기로 했다. 이 소설을 읽어 본 이는 왜 이 소설의 구조를 파악해보려고 하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 소설이 엮어진 그 구조를 알면 소설을 다 읽고나서도 여전히 모호한 그런 느낌이 어느 정도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모호한 여운으로 계속 맴돌며 남아 있으면 그냥 그 모호한 느낌을 즐겨도 그만이지만, 모호함 그 자체는 아직 소설과 독자의 대칭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생겨난 것이다. 최종적으로 소설과 독자의 대칭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구성상, 소설의 구조적인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늘어 벌려진 온갖 복선들과 관계들의 심리로 뒤엉켜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설과 독자의 대칭을 형성할 축은 소설의 구조(뼈대)이다. 이 소설의 구조가 소설과 독자를 대칭시킨다.
대칭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방향성이 막연하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막연하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사건이 진행되어 어느만큼 사건이 커졌는지도 모른다. 이때 축이 형성되어 대칭이 되면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잇게 된다. 그리고 현재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나타난다. 시공간의 탄생이다. 입체적인 시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대칭이 형성된 순간 서로의 상호작용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비대칭일때는 말 그대로 혼자 공상소설을 쓰고 있는 것과 같다. 방향도 없고 막연할 뿐이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일 뿐이다.
그리고 독자의 모호한 느낌의 교착을 타개한다. 모호함은 사라지고 이제 생각할 거리만 남았다. 결국 대칭은 어느 한쪽으로 판정한다. 대칭성은 하나의 사건에 일회성이다. 그리고 다시 축이 형성되면 판정한다. 무수한 작은 판정들은 하나의 큰 판정에 기여한다. 소설구조가 이해되지 않으면 판정은 계속 번복된다.하지만 번복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흔한말로 시행착오쯤 되겠다. 판정은 일방향이다. 독자가 이해한 순간 소설의 소실점은 독자가 된다. 토니의 사유는 바로 당신의 사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기자신에게서 마무리 된다. 그러나 그 이전의 자신과 이후의 자신은 같으나 다르다. 판정은 이후의 자신에게 기울어진다. 방향성은 그렇게 결정된다. 그리고 그 방향성에 이전의 자신도 포함되어 버린다. 자기 안에서의 방향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알기전의 자신은 무엇인가를 알고 난 후의 자신을 따르게 된다. 자기안의 축을 갖게 된 것이다. 즉 자기안에 축이 있는 시소를 장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축은 계속 대칭성을 부여하여 판정한다. 이 모형은 복제되어 침투한다. 모든 것에 적용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 소설도 이러한 구조적 모형(시소)을 가지고 있다. 시소가 중첩되어 나타난다.
해서 아래 상자안의 구조론을 적용하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의 소설의 구조를 풀어 보기로 한다. 아래 상자안에서 크게 중요한 용어들은 질의 상태, 축과 대칭(시소), 시공간의 탄생, 거시세계와 미시세계, 구조론의 진행 방향인 질>입자>힘>운동>량, 전제와 진술, 상호작용, 비대칭>대칭>무대칭, 상부구조, 하부구조, 우주 안의 모든 운동은 자리바꿈이다. 라고 볼 수 있겠다. 참고 삼아서 글의 편의상 대략적으로 구조론 글을 짜집기 했다. 반스의 소설 리뷰를 쓰려고 하니 사용할 틀이 마땅치 않아서 구조론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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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힉스 메커니즘과 구조론 - 힉스 메커니즘을 구조론으로 입증할수 있다> <구조론 글 인용함>
구조론은 덧입혀진 살을 배제하고 건조한 뼈대만을 본다. 그것은 게임의 규칙이다. ‘이게 이러면 저게 저렇다’는 거다. 전제와 진술 사이의 관계만 본다. 전제가 모호하면 진술도 모호해진다. 힉스입자의 발견으로 표준모형이 분명해졌다. 전제가 분명해졌으므로 진술도 분명해진다. 곁가지들을 쳐내고 제한적이나마 구조론 모형으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
이야기는 양자요동으로부터 시작된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간단히 모눈종이가 구겨진 거다. 시공간은 모눈종이와 같다. 동해안 해안선이 직선으로 보여도 현미경으로 보면 꼬불꼬불하다. 가로세로 반듯한 시공간의 모눈종이는 거시세계에 적용된다. 그렇다면? 구겨진 모눈종이가 왜 펼쳐졌을까? 대칭성이다. 양자는 장(場)이고 구겨져 있다. 장을 펴는 것은 입자의 대칭이다.
구조론은 질-입자-힘-운동-량으로 설명한다. 이번에 규명된 힉스 메커니즘이 구조론의 질≫입자≫힘의 전개와 유사하다는데 방점을 찍어도 좋다. 구조론은 이를 "시소모형" 으로 설명한다. 시소는 축과 대칭으로 이루어진다. 시소는 모호한 것을 명확하게 한다. 입자는 포지션이 유지된다. 그 위치에 있다. 변하는 것은 시소의 양 날개에 올라탄 사람이고 시소는 늘 거기에 있다. 힉스메커니즘, 힉스장, 힉스입자라고 여러 표현이 나오는데 시소다. 무거운 놈이 올라타면 무거운 놈으로 찍짓고 가벼운 놈이 올라타면 가벼운 놈으로 짝지우는 식으로 질량이 부여된다.
사람들은 입자를 잘 이해한다. 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간단하다. 미시세계의 모눈종이는 구겨져 있다. 여기에 대칭성 들어간다. 불확정성은 비대칭성이라 하겠다. 거시세계는 대칭되어 있다. 일정한 조건에서 대칭된다. 그것은 위치와 속도다. 여기서 전제와 진술의 구조가 작동한다. 상호작용은 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된다는 거다. 위치가 이러하면 속도는 저러하다는 식.
불확정, 비대칭으로 구겨진 모눈종이 양자의 값이 힉스메커니즘의 시소에 태워졌을 때 일정한 질량을 주어 분명한 위치와 속도로 확정된다. 곧 구조론의 질≫입자≫힘≫운동≫량 그대로다.
1) 우주의 진공은 에너지 장이다.
2) 에너지 장은 크기(시공간)가 없다.
3) 에너지 장에 확률을 도입하여 양자로 나타낸다.
4) 힉스 메커니즘의 대칭성에 의해 양자요동은 입자가 된다.
5) 입자 내부의 불균형이 힘으로, 그리고 운동과 량으로 나타난다.
6) 크기(시공간)는 에너지장이 입자로 변하면서 연출한다.
과학자는 질량이 어떻게 부여되는가, 혹은 물질이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방점을 찍지만 구조론은 시공간이 어떻게 탄생되었는가에 방점을 찍는다. 구겨진 모눈종이가 어떻게 펼쳐졌는가다.
◎ 전통적인 세계관 – 시공간의 바다에 물질이 떠 있다.
◎ 구조론적 세계관 – 물질이 탄생하며 시공간을 연출했다.
시공간의 바다에 물질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탄생하며 시공간을 찍는다. 시공간은 물질이 탄생하는 과정에서의 대칭성 그 자체다. 물질 이전의 양자상태에는 시공간의 크기가 없다. 크기가 없다는 것은 밀도가 있다는 말이다. 밀도는 순수하게 수학적으로 존재한다. 이때 에너지 장은 대칭성이 없으므로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힉스메커니즘이 작동하여 상호작용을 촉발하면서 대칭성이 성립한 바 시간과 공간이 성립하였다. 크기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질의 포지션에 시공간을 두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바다에 물질이 떠 있다는 식으로 짐작하는 거다. 힉스입자에 의해 규명된 바 시공간은 물질의 대칭성에 의해 연출된다. 존재하는게 아니라 연출된다는 거다. 질은 입자의 대칭성이 성립하기 전이다. 질의 세계에는 밀도만 존재하며 확률로만 나타낼 수 있다. 계측할 수 있는 포지션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은 압박받은 상태, 즉 작용 반작용의 방향이 지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입자에 와서 대칭이 일어난다. 그리고 힘에 와서 대칭이 해소가 된다.
질 - 대칭성이 없는 즉 압박을 받은 상태
입자 - 축과 대칭이 나누어진 상태
힘 - 대칭된 두 날 중 하나를 제거하는 과정.
운동 - 하나가 제거되고 하나가 진행하는 상태.
량 - 진행의 종결
질은 대칭이 확정되기 이전의 바운더리 확정이다. 대칭이 이루어지려면 도무지 어디까지를 사건에 낑겨줄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전제에 대해 진술은 상대적이나 전제와 진술의 관계는 절대다. 상대성이론과 같다. 관측자의 운동상태를 반영하여 그 자체를 하나의 계로 놓는다. ○에 대해 ●는 상대적이다. ○와 ●의 사이는 절대적이다. 상대성= 절대성이다. 힉스 메커니즘도 비대칭= 대칭성이다. 같은 걸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서로 자리를 바꾼다. 우주 안의 모든 운동은 자리바꿈이다. 힉스 메커니즘은 이를 상호작용이라 한다. 입자를 교환한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입자를 교환할까?
그렇다면? 서로 자리를 바꾼다. 우주 안의 모든 운동은 자리바꿈이다. 힉스 메커니즘은 이를 상호작용이라 한다. 입자를 교환한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입자를 교환할까? 과연 입자일까? 파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알 수 없다. 그것은 표현이다. 표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구조론의 입자는 하나의 포지션이다. 무엇인가? 입자가 작고 단단한 알갱이라는 관점은 착각이다. 무른 과육 속에 단단한 핵이 입자를 이루는 것은 과일의 사정일 뿐 존재의 보편원리는 아니다.
입자란 첫째 질량이 있는 것이다. 질량이 있다는건 외력이 간섭했을 때 반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광자는 질량이 없다. 그렇다면? 그러나 반사, 회절 등으로 반응한다. 반응하면 입자다. 상호작용을 한다. 무엇인가? 광자가 입자인 것이 아니라, 광자가 전진하므로 입자다. 전진하는 동안만 입자의 성질을 획득한다. 광자는 반드시 움직인다. 움직이는 동안만 입자이며 이는 상호작용계 안에서만 성립한다.
시간과 공간에도 적용된다. 시간과 공간은 물질 입자들 간 상호작용에 의해 연출된다. 상호작용이 멈추면 시공간은 사라진다. 예컨대 블랙홀이라면 좁은 공간에 밀도가 터무니없이 높다. 과연 그럴까? 블랙홀 안에는 블랙홀공간이라는 특수영역이 있고 그 안에 널널한 공간이 있을 수 있다. 개미집 안에 백만마리의 개미가 널널하게 살고있지만 우리는 땅속에 개미굴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착각한다. 공간의 상전이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3차원 공간에 살고 있다. 구조론의 3차원은 4개의 포지션이 위상균일이다. 위상균일은 정보의 공유다. 0에서 3차원까지 네 개의 차원이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
4 포지션 중의 하나에서 일어난 일이 나머지 3개 포지션에서 일어난 것과 같다. 여기서 포지션이 추가되면 4차원이다. 4차원은 유지되지 않는다. 하나가 들어오면서 동시에 하나가 빠져 나간다. 상호작용이다. 이때 이쪽에서 들어오고 저쪽에서 나가며 다시 이를 피드백 하면 핑퐁을 한다. 초끈의 진동과 비슷하다. 초끈이론은 설계가 황당해서 믿을 수 없고 어쨌든 5포지션에서 스핀이 일어난다. 순간적으로 5포지션 위상균일이 일어난다. 어떤 하나가 아는 것을 나머지 4명이 안다. 이때 어느 넘이 형이고 아우인지 서열을 정할 수 없다. 이것이 크기를 만들어내는 자궁이다. 시공간 탄생이다.
우리가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진자의 등시성 때문이다. 진자가 간만큼 되돌아온다. 이때 상대성을 적용하면 진자를 고정한 축이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시소와 같다. 시소의 어느 쪽에 있든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이러한 정보공유에 의해 시공간의 균일성이 연출된다. 이때 최초의 에너지 자극이 없으면 정보가 성립하지 않는다. 정보가 없으므로 정보공유도 없다.
힉스메커니즘은 에너지-대칭성- 상호작용으로 물질의 탄생을 설명한다. 구조론은 5포지션위상균일(에너지)- 4포지션위상균일(축과 대칭= 입자)- 남는 1의 핑퐁스핀 복제(힘)으로 시공간을 연출한다. 그런데 그 구조는 완전히 같다. 다만 힉스메커니즘은 살을 입혀놓았고 구조론은 뼈대만을 논한다는 차이가 있다. 구조론은 세포분열과 증식, 결정의 성장, 정치와 자본 등에 두루 적용되는게 차이다.
이때 모형은 1이어야 한다. 2를 1로 만들려면 사이를 공략해야 한다. 남녀 2가 부부1로 되려면 둘 사이에 아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관계이며 모든 개념은 관계를 나타낸다.
구조의 작동은 에너지를 품은 무질서(자궁)>질서있는 차별>에너지 없는 무질서(바닥)로 이행한다. 그런데 에너지 없는 무질서도 또 다른 계를 만나면 에너지를 획득한다. 그런데 이는 사건 2므로 논외가 된다. 판단은 사건 1에서 끝난다. 그러니까 바닥상태도 짝짓기에 따라 단번에 자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헷갈리는데 그건 사건 1과 사건 2를 뒤섞는 범주의 오류이고, 사건 1 안에서는 자궁상태와 질서상태 바닥상태로 나눠진다. 앞은 상부구조 뒤는 하부구조이다. 절대 바닥에서 자궁으로 올라서지는 못한다. 비가역성이다. 에너지 자궁>질서>바닥으로의 이행은 남녀각자 가문대표 2가 부부1로 축소되는 과정이며 이때 포지션 상실이 일어난다. 대칭>비대칭으로 간다고 하는데, 비대칭>대칭>무대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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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 가다가 막히면 답답해서 화를 낸다. 진로가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때 일수록 잘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 잘 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자신이 계속 가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가는 것 같은데 제자리에서 뱅뱅 맴돌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에서 토니는 인생이 덧셈이 된 것과 늘어난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구조론적으로 보자면 덧셈은 그냥 계속 주어 섬기는거 늘어 벌려져 있는 것이다. 정리되지 않았다. 불확실하다.
하지만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실질적으로 뭔가 입체적으로 용량이 증가했다는 이야기다. 그럼 무엇이? 늘어 났을까? 이것에 대해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혼동하기 쉽다고 여겨진다. 늘어 벌려진 것과 늘어난 것은 다르다. 늘어 벌려진 것은 쌓지 못하고 흩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잘 정리하고 쌓았다고 착각한다. 제자리 걸음일뿐 변한 것은 없다. 왜 그럴까? 눈에 보이지 않는 '질' 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쌓았을때 만이 늘어난 것이다. 그럴때 질서가 생긴다.
늘어 벌려진 것을 쌓지 못하는 이유는 대칭을 이룰 시소가 없기 때문이다. 판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비대칭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축이 생겨 대칭이란 저울이 만들어지면 무게가 재어진다. 축이 생긴다는 것은 곧 에너지가 들어왔다라는 얘기가 된다. 대칭을 적용하여 막연한 교착 상태를 무너뜨린다. 이 대칭은 사건을 성립시키고 교착 상태를 풀어 버린다.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소설의 2부 중후반부와 1부를 비교해보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명확해진다.
1부에서의 막연한 분노와 불신과 예감 그리고 고립
2부에서의 예감을 직면, 예감의 실현, 굴절된 저주
그리고 '편지' 가 그 축을 담당하고 있다. 편지가 에너지의 통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전반부의 막연하게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예감을 2부에서는 풀어낸다. 그리고 교착 사태가 해소된다. 대칭을 성립시킨 저울은 2부로 기울어진다. 하나의 방향성을 결정한 것이다. 1부는 2부에 대한 무수한 전제다. 즉 1부는 2부에서 일어날 사건에 대하여 무수한 전제들이다. 1부는 막연한 예감의 불길함을 안고 비대칭을 형성하고 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하여 나름대로 평온하게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 편지 한 통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상태에 대칭성을 부여한다. 대칭의 저울은 그 무게를 잰다. 판정이다. 1부의 무수한 전제들과 2부의 비밀은 대칭을 이룬다. '1부의 예감(전제)' 과 '2부의 예감의 실현(진술)' 이 둘을 대칭시키는 것은 '편지' 다.
그러나 2부에서 밝혀지는 사건은 1부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이다.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사건인 것이다. 대칭이 이루어지지 않고 비대칭 상태로 40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니까 토니는 40년간 이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도 애써 평온함을 유지하며 그 평온함을 흐트리지 않고 살아왔다. 공간적 사건 진행은 그 공간에서 계속 일방향으로 시간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멈춤없이. 그 사건은 계속 진행형이었다. 그러나 비대칭 이었다. 이 사건이 계속 대칭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편지 한 통만이 그 역할을 해 주었다. 비로서 대칭이 형성되었고 토니는 예감과 마주할 수 있었다. 시공간의 탄생이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 과거를 현재 속에서 사건을 통하여 입체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토니의 미래에도 영향을 준다. 더이상 예전의 토니가 아니다. 현재의 토니는 이 사건의 이전과 이후에서 전혀 다른 토니가 된 것이다. 그저 막연한 예감에 불과하고 잊혀졌다고 생각한 일들이 편지 한통에 의해서 토니에게 있어서 현실화 된 것이다. 즉 토니에게는 없던 일이 생겨난 것이다.
토니가 감을 잡을때까지 교착 상태는 계속 된다. 베로니카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고 토니에게 메일로 전했다. 전혀 감을 잡지 못하던 토니. 그러나 불확실하던 예감이 대칭을 이루니 교착 상태는 타개되어 버렸다. 하지만 여기가 문제부분이다. 무엇이 타개되긴 했는데 여전히 독자는 오리무중이다. 소설은 이미 끝났다. 반전은 있었으나 그 반전에 대한 모호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서부터는 각자 풀어야 할 숙제와 같다. 물론 토니 자신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아직 모호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랬기에 수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다 읽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였다고 반스 스스로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150페이지 이지만 300페이지인 것과 같다라고....그럼 그것을 풀어 보기로 해볼까? 물론 과도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아니라 소설의 구성적 요소를 살펴보는 것 뿐임을 밝혀둔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소설의 진행과정>
토니와 에이드리언의 친구 관계, 토니와 베로니카의 연인관계,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연인관계,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 엄마(사라)와의 연인 관계, 에이드리언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아들, 그 아들과 베로니카의 남매 관계. 다시 만난 토니와 베로니카의 어정쩡한 관계.
<1부> (1)토니와 베로니카가 사귐 ->(2)토니가 베로니카 집을 방문하여 머뭄 ->(3)토니와 베로니카 가족의 이질성 - 하지만 베로니카 어머니만은 토니에 대해 친절 ->(4)토니와 베로니카가 헤어짐 -> (5)베로니카 어머니(사라) 로부터 토니에게 편지 ->(6)에이드리언이 토니에게 베로니카와의 교제 사실을 편지로 알림 -> (7)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편지를 씀 -> (8)에이드리언의 자살 -> (9) 시간이 흘러 40년이 지남 ->
/ <2부> (10) 고인이 된 베로니카 어머니(사라)로부터 유언으로 남겨진 편지가 도착 -> (11)에이드리언이 토니에게 남긴 일기장이 있다는 것을 안 토니가 베로니카에게 일기장 반환을 요구함 -> (12)베로니카가 일기장 일부분만 복사하여 보냄 -> (13) 베로니카가 일기장을 전체를 넘기기를 거부함 -> (14) 베로니카가 예전에 토니가 보낸 편지를 토니에게 다시 보내옴 -> (15) 토니가 베로니카에게 용서를 빔 -> (16)'넌 언제나 그랬어'라는 베로니카의 메일답장 -> (17) 베로니카가 토니에게 에이드리언의 아들을 보여줌 -> (18) 토니는 베로니카의 아들인줄 알고 있음 -> (19)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베로니카 답장에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아들이 있는 곳을 다시 찾아감 -> (20) 뭔가 베로니카가 남긴 말의 의미에 대해 단서를 잡기 위해 갔으나 전혀 다른 과정에 돌입 -> (21) 에이드리언의 아들은 베로니카의 아들이 아니라 사라의 아들이었던 것.
토니의 예감...베로니카 집안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그로인해 베로니카가 상처를 받았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 베로니카와 베로니카 가족에 대한 불신, 베로니카 어머니 사라에 대한 토니의 우호적 감정, 베로니카가 자신을 파렴치한으로 몰았을 것이라는 불쾌한 감정적 예감, 그리고 토니의 자기보호 본능, 에이드리언의 죽음, 평균치 인생을 평범하게 살아온 토니....
여기에서 이런 상관 관계들을 어떻게 연결하는 것이 좋을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소설의 형식 - 구조론을 적용>
1부와 2부 사이에 대칭이 성립되자 토니의 교착은 타개되었다. 막연하던 인생이 갑자기 목표가 생긴 것이다. 사라로 부터 불현듯 40년만에 날라온 편지 때문이었다. 이 편지가 1부와 2부를 연결하는 소설적 구조의 축이 된다. 이것이 큰 얼개의 구조이다(거시적). 이는 이 소설의 형식을 만들어 낸 것과 같다. 이 구조가 무수하게 복제되어 패턴을 이루고 있고, 크고 작은 중심적 사건들을 진행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작은 얼개 구조들(미시적) 역시 편지로 대칭을 이루어 교착을 타개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축의 이동이 편지에서 메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었지만. 또한 비대칭에서는 무수한 복선들이 깔려 있다. 그리고 대칭 시켜서 그 복선들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고 있다. 그리고 교착 상태를 풀어 버린다. 이러한 반복적 패턴을 사용하여 극의 전개를 끌어가고 있다. 큰 대칭을 이루고 그 안에 작은 대칭들이 있다. 그리고 큰 대칭도 작은 대칭들도 모두 그 대칭을 만들어 내는 축은 편지(메일)이다. 모두 전제와 진술을 시소에 태워 판정하는 형식이다. 무게가 있는 쪽으로 판정이 내려진다.
편지가 만들어 내는 세 개의 큰 축은(위에서 표시된 남색 부분)
*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 자신이 보낸 편지를 40년 후에 다시 받아보게 되는 그 편지(7)(14). 이 편지가 모든 사건의 핵심이다. 이 편지를 중심으로 사건은 전개된다. 그러나 그 사실을 토니 자신만 40년 후에 확인하게 된다. 이 편지로 인하여 토니와 베로니카의 교착 상태가 해소 된다. - 즉 사건을 키우는 역할을 가진 편지이다.
* 그러나 먼저 이러한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편지가 사라(베로니카의 어머니, 유언으로 남긴 편지)의 편지다(10). 이 편지는 1부와 2부를 대칭시켜 교착 상태를 해소 한다. - 소설의 형식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가진 편지이다.
* 그리고 토니가 보낸 메일에 베로니카가 마지막으로 보낸 답장이 베로니카와 사라의 교착 상태를 해소 시킨다(19). 그리고 이는 토니 자신의 교착 상태를 해소 시키기도 한다. - 소설의 엔딩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가진 메일이다.
그리고 보라색으로 표시된 작은 축을 가지는 편지와 메일의 답장들은 이 세 개의 큰 축을 지탱해주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인 축을 토대로 살펴보면, 이렇듯 소설안에서는 가정이나 가설을 전제로 삼아서 그러한 것을 증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토니가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면(가설을 세우면) 편지나 메일에 의하여 대칭이 형성된다. 그리고 증명되거나 버려지거나 한다. 판정이 일어난다. 토니의 비대칭이 해소된다.
가장 기본 전제는 구조론에서 질 >입자>힘 >운동 >량 이다.
질은 압박받은 상태, 즉 작용 반작용의 방향이 지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입자에 와서 대칭이 일어난다. 그리고 힘에 와서 대칭이 해소가 된다.
질 - 대칭성이 없는 즉 압박을 받은 상태
입자 - 축과 대칭이 나누어진 상태
힘 - 대칭된 두 날 중 하나를 제거하는 과정.
운동 - 하나가 제거되고 하나가 진행하는 상태.
량 - 진행의 종결
질은 대칭이 확정되기 이전의 바운더리 확정이다. 대칭이 이루어지려면 도무지 어디까지를 사건에 낑겨줄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1부의 전제(질) >1부와 2부의 대칭(입자) > 대칭의 판정(힘) > 한쪽이 제거되고 한쪽이 계속 진행되어감(운동) > 사건의 종결.
1부의 전제들이 2부 진술과 대칭을 이루면서 아주 미세한 부분 까지도 판정이 일어나고 있고, 그 결과 점차로 사건이 하나로 모아져 일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이는 2부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새롭게 전개되는 생각에 관해서도 대칭은 이루어 지고 있고 판정은 일어나고 있다. 계속해서 사건이 마무리가 될 때까지 독자가 이해할 때까지 대칭(시소)은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판정은 지금 쓰고 있는 리뷰에도 적용되고 있고, 리뷰의 진행과정에도 적용되고 있다.
또한 편지의 형태를 보면 세 개의 큰 축을 만드는 편지(메일)는 상부구조의 역할을 하고, 작은 축을 이루는 편지(메일) 하부구조 역할을 한다.
또한 편지(메일)들은 전제에 대하여 진술의 길잡이 역을 맡기도 한다. 즉 자물쇠와 열쇠의 관계와 같다. 그 사이에 있는 비밀을 푸는 힌트이기도 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소설의 생각할 거리들... >
사라가 편지를 죽기전에 작성하여 자신이 죽고난후 보낸 이유는..뭔가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자신의 아들..에이드리언을 보여주고 참회를 하거나 혹은 부탁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또한 사라가 유언으로 토니에게 남긴 500 파운드는...베로니카가 토니가 보낸 메일의 답장에서 '피묻은 돈' 이라 한 것을 보면..아마도 그 돈은 생전에 에이드리언이 남긴 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라는 그돈을 일기장과 함께 토니에게 남긴 것일지도 모른다. 베로니카는 일기장을 끝내 토니에게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토니도 상황을 알고 기꺼이 일기장을 포기했다. 아마도 베로니카는 일기장 도움 없이 이 모든 상황을 토니 스스로 알기를 바랬는지 모르겠다. 홧김에 썼다고는 하나 토니의 편지는 저주가 되어 버렸다. 에이드리언을 꼭 닮았으나 두뇌만은 에이드리언을 닮지 않은 에이드리언의 분신인 또 한명의 에이드리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 베로니카의 아들인줄 알았으나 사라의 아들이었던 에이드리언.
굴절되어 버린 저주. 이는 부모가 잘못했으나 손자가 그 벌을 받는다는 동양의 사고와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1세대가 잘못하면 2세대 혹은 3세대가 벌을 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쏟아 부은 저주가 편지로 인하여 사라로 옮겨간 것과 같다. 저주가 이식된 것인지도 모른다. 토니는 모두에게 불신이 있었지만 베로니카 어머니(사라)에게만은 좋은 기억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아이러니라고 여겨질만 하다.
편지만 아니었다면... 베로니카가 복사하여 일부만 토니에게 보내온 에이드리언의 일기의 일부분의 마지막에 '만약에 토니가...' 라는 부분에서... (1)만약에 토니가 '그때 베로니카 어머니(사라)를 만나보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을 대입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2)만약에 토니가 '사라와 연인이 되었더라면....' 도 생각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3)만약에 토니가 '베로니카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쯤 해보면 (3)에서는 토니가 비대칭 상태에서 혼자 공상소설을 쓰며 '나쁜놈이라 원망하게 만들 것 같았던'... 그 불길한 예감에 빠져서 베로니카에게 상처이론을 적용하던 그때의 예감이, 그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1)번을 선호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토니는 (2)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만약에 (2)라면 자살한 이는 토니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에이드리언의 아들은 토니의 아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토니는 자신을 자기보호본능이 있어서 불길한 것에 휘말리지 말 것을 자신에게 경고했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는 피해 간 것이다. 무엇이 불운을 피해가게 만들었을까? 토니의 어머니 말을 빌리면 '에이드리언은 너무 똑똑했어. 그 뇌가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거야' , 또는 토니는 자신을 평균치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하였다. 도전이나 모험이나 이러한 것은 토니와 거리가 멀었다. 애시당초 토니는 사라가 자신을 유혹하는 손짓을 보냈다는 것 그 자체에 별 반응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베로니카의 아버지와 오빠와 베로니카의 대한 불신과 편견 때문이었고 자기비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편견이 40년 뒤에 무너진다. 아마도 이 편견이 없었다면 토니는 사라가 자신을 유혹했다는 것을 알아챘을까? 그러나 이 역시 아닐지도 모른다. 토니는 평균치의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유혹을 비켜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토니는 왜 베로니카 아버지와 오빠를 그토록 불신하고 싫어했을까? 자신을 무시한다고 별볼일 없는 놈이라고 생각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베로니카 오빠처럼 혹은 에이드리언처럼 좋은 대학을 다니지 않기 때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즉 장래가 별로 촉망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스로 토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범했던 에이드리언은 왜? 사라의 유혹에 넘어갔을까? 아니 사라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결핍 때문이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빈자리로 인한 어떤 사랑에 대한 갈증? 사라가 그것을 채워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명석한 두뇌로 인하여 이러한 일이 철학적으로 해명이 되었기에 유혹에 넘어가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자살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에이드리언은 일기장에 이런 공식을 남겼다.
'요컨대 b, a¹, a² ,s, v 라는 정수가 포함된 축적은 어떻게 나타낼 수가 있을까?
×
b = s - v + a¹
혹은 a² + v + a¹ × s = b?
이 공식의 구조도 전제와 진술 구조. 다만 서로 자리 바꿈이 일어났다.
옆에 사진은 에이드리언이 남긴 일기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b는 베이비(아기), a¹은 에이드리언, a²는 앤서니(토니), v는 베로니카, s는 사라 이다.
소설안에서는 에이드리언이 아이가 태어난 후에 자살했는지, 그 전에 자살했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그러나 토니가 남긴 단서를 찾아보면...토니가 졸업반 중반 때 에이드리언으로부터 편지가 왔고, 토니는 졸업 시험을 보고 에이드리언에게 답장을 썼다. 그리고 반년동안 미국여행, 돌아오자마자 에이드리언의 자살소식. 그렇다면 그 전에는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가 사귀고 있었고, 토니의 편지를 받고 나서 에이드리언은 베로니카 어머니(사라)를 만났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더 이전에 만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쩄든 토니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이전에 자살한 것 같다. 하지만 아니라면? 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토니는 여름방학 주말에 베로니카 집에 방문해 머문적이 있다. 에이드리언이 토니에게 편지를 보낸 시점도 토니가 졸업반 중반이었으니 토니의 편지를 받기전에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의 집을 방문했을 수도 있다.
베로니카와 토니가 사귄 시간은 일년이다.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만난 시간도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한 기점으로 보면 일년이다. 이 둘이 몇달을 사귀었는지, 아니면 토니에게 편지를 보낸 그때까지 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리 생각해 보아도 시간상의 뭔가가 잘 맞지 않는다. 에이드리언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자살했다고 보아야 정황상 맞다고 여겨진다.
이리 살펴보는 이유는 에이드리언이 어찌 되었든 일기장에 '아이' 에 대한 비중을 크게 두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이가 도출되기 위한 모든 경우의 수에서 가장 타당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b)에 있어서 어떤 조합이 가장 좋았는가를 따져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를 제외하고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조합, 또는 토니와 베로니카 그리고 에이드리언, 그리고 그 모두와 연관된 사라....그리고 아이?
그리고 관계의 연관성과 그 관계의 범위와 책임의 범위를 묻고 있다. 어찌되었든 이 관계들의 얽힘이 구체적인 형태의 아이(b) 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관계가 뭔가를 생성한다는 것에 대하여 에이드리언은 여러 관계가 얽히고 굴절되는 과정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꼭 자기 자신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에 대하여...또는 '자신의 인생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개념부터 챙겨라' 에 대하여...
이쯤되면 반스는 왜? 이런 얘기를 하게 되었을까? 가 궁금해진다. 평균치의 인생을 살며 결코 자신을 양보하거나 끝없이 포기하거나도 하지 않고 평범하게 안정적인 길을 선택하며 살아온. 다소 이기적인. 다소 별 매력이 없는. 그러나 아주 잘 살아왔다고 스스로 그렇게 여기고 있는 토니에게도 에이드리언 만큼은 완벽한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인간 토니가 자신이 보지 못했던 진실을 직면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회한으로 가득한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 잘 살아온 것이 아니라 뱅뱅도는 인생을 산 것이라는 것을 느끼며 비로소 인생의 다른 한쪽면도 보게됨으로 인해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여겨진다. 평균치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반스는 철학적으로 진화할 기회를 주고 싶었을까?
만약에 이러한 감추어진 진실에 대해 에이드리언이 자살했을 때 그때 토니가 베로니카를 만날 용기를 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토니 자신은 계속 평균치 인생을 살 수가 있었을까? 토니는 이 역시도 비켜갔다. 베로니카를 그때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토니는 지금에서야 바꿀수도 만화할 수도 없는 회한을 갖지만, 토니가 살아온 적당하게 살아온 그 인생 자체가 이미 토니에게는 형벌이 아니었을까? 열정적이지도 않고 특별히 애착하는 것도 없이 그저 정리정돈 잘하고 살아온 인생이라 위안을 삼던 토니의 인생 그 자체가. 하지만 토니는 마지막 반전 전 까지도 자신이 지키고 온 평균치의 삶을 온전히 놓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토니는 잘 버텼다. 마지막 반전 전 까지는..., 토니는 생각한다. 지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중요한 장면만 사진 찍듯이 스쳐 지나간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비켜간다 하여도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는 마주치게 되어 있다. 그때까지는 알지 못한다. 비대칭 상태로 어떤 예감만을 가지고 흘러간다. 불확실성이다. 그리고 사건의 출발에서 도착지점까지의 연결은 축이 생기면 저절로 대칭이 생겨나 연결된다. 그리고 판정된다. 교착 상태가 풀어져 버린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이렇게 해소되지 않을까 싶어진다. 베로니카 어머니(사라)에게 가장 우호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토니로서는 자신의 편지로 인해 그렇게 서로 뒤엉켜 버린 운명을 살게된 이들을 보며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을 겪는다. 상처이론을 베로니카에게 적용하였던 토니가 아니었던가. 토니의 저주는 베로니카를 향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정작 에이드리언의 아들에게로 갔다.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명석한 철학적 두뇌를 질투하였던 것일까?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친구로서 에이드리언을 사랑했다. 사라에게도 어느정도 인간적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였다.
토니가 싫어했던 베로니카의 아버지와 오빠, 사랑하면서도 경멸했던 베로니카, 그러나 이는 모두 토니의 자격지심 이었을 수도 있었다. 토니가 좋아 했던 사람들만 불행해졌다. 에이드리언은 죽고, 사라는 에이드리언의 아들을 낳았으나 정신적 장애가 있는 아들이었다. 죽기전 까지 그 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축적/책임... 그렇다. 사라는 알았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굴절된 저주의 주인공이 된 사라의 아이러니는 책임의 문제였다. 토니를 유혹하던 그 책임. 그리고 에이드리언과의 사랑 역시 책임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책임을 에이드리언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들인 또 하나의 에이드리언을 키우며 삶을 마무리 했다. 베로니카 역시 자신보나 20년이나 어린 동생을 돌보며 살았다. 그랬다.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에이드리언은 모두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불확실함과 관계들이 이뤄낸 사건들이 쌓이면서 축적된 것이다. 토니는 그것을 본 것이다.
사람이 불운이라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대개 남탓하기를 좋아한다.
"만약에 토니가"...에 대입해보면..., 토니가 베로니카를 애초에 만나지 않았더라면도 성립된다. 그러면 여기서 베로니카는 모든 불운의 원흉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더 확장해서 만약 토니가...에이드리언과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도 성립한다. 그랬다면 토니도 에이드리언도 이 불운을 피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들에 만약을 대입하는가? 그리고 그 대입한 것을 끝까지 추궁해 보았을까?
또한 이렇게 생각해 볼수도 있다. 토니와 베로니카가 모든 불운의 원흉이라고...두 사람이 헤어졌기에 그런일들이 일어난거라고.... 그런데 말이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경우에 같은 선택을 할까? 에이드리언처럼 베로니카가 아닌 사라를 선택하거나 연인과 헤어졌다고 저주의 편지를 보내거나 딸의 남자친구들을 유혹하거나 ...모두가 이런 상황이 되면 이런 선택만 하는 것은 아니다. 평균치로 산 토니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결국 상황적 사람 개인의 문제이다. 그러나 휘말려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관계속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에이드리언의 아들이 정신적 장애가 없이 두뇌가 에이드리언을 닮았다면...? 이런 만약이란 가정들은 애초에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그것을 알고 자살한 것인지 모르고 자살한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먄약에 토니가.... 이제는 바꿀수도, 만회할 수도 없음을.'
토니는 베로니카에게 분노하기 그 이전에 베로니카가 상처를 받은적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베로니카 주변이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자신에게 유리한 각색된 기억을 가지고 그들의 주변을 떠났다. 그리고 40년만에 사라로부터 받은 편지로 인하여 다시 그들에게 강제소환 당했다. 그러나 토니는 그 소환에 묘한 흥분도 느꼈다. 비로소 뭔가 산다는 느낌, 그리고 긴장, 비로서 어떤 일거리를 부여 받은 느낌, 토니는 이미 이 관계를 떠났지만 그 관계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토니 혼자서만 결별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40년 후에 그 관계의 사슬을, 축적된 관계를, 책임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회한 - 한번 더 깨무는 행위, 내가 썼던 말을 다시 읽을 때 나를 깨무는 이가 얼마나 그악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콕 집어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자 실제로 똑같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 - 에는 여전히 몸이 오싹해질 만큼의 초자연적인 데가 있다. 저주를 퍼부었던 젊은 시절의 나와 그 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노년의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 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서로 무관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미 그 관계속에, 책임의 범위에 포함되어 이미 소환당해 있는데도..., 감을 여전히 잡지 못했었던 토니. 아무도 서로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칭은 형성될 수 있었고 그로인해 사건은 드러날 수 있었고 판정되었다. 이미 고통을 받으며 살아온 이들, 평균치 인생을 살다 정말 혼자가 된 토니. 관계는 끝나지 않았었다. 토니는 언제나 그 관계안에 있었다. 단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늘어났다는 것...쌓았다는 것은 마이너스다. 무엇인가가 자기에게서 빠져나갔다. 무엇이 빠져나갔을까? 빠져나간 만큼 군더더기는 줄고 대신 보상 받는다. 가장 명확한 것으로.
쓰다보니 길어졌지만,,,,구조론 짜집기 한 것은 안 넣는 것이 좋은가?
좀 난해한듯도 한데..지금은 더 다듬기 어려움.
난해한 책에 대해 난해하게 대접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함.ㅋㅋㅋ
좀 더 쉽게 쓰려고 해봤지만... 소설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이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