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모임에서는 네 가지 술을 시음했다가 음주강의로 의사전달이 잘 안됐습니다. 대략 정리하면. 프로이드와 융의 차이 프로이드가 소승이면 융은 대승이다. 프로이드는 의사였으므로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환자를 치료하려고 한다. 환자의 몸에서 어떤 나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거하려고 한다. 반면 융은 대승이다. 불완전한 것에서 숨은 완전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꽃피우려 한다.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사회적인 소통의 장 안에서 완성된다. 융은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풀어내려 한다. 악기가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 악기가 고장났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연주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악기를 수리하려 드는 태도가 소승이고 연주자를 보내주는 것이 대승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구조론의 차이 마르크스가 소승이면 구조론은 대승이다. 소승은 메스를 가하여 병인을 제거하려고 한다. 자본가를 적대하고 그것을 제거하려 하는 것이다. 반면 대승은 그것을 적절히 제어하려고 한다. 자동차는 위험한 물건이지만 적절히 운전하면 이로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은 위험한 물건이지만 폭주하지 않게 제어하면 인간을 이롭게 한다. 자본을 병이라고 보고 제거하는가 아니면 악기라고 보고 연주하는가다. ◎ 개인의 병은 제거라는 마이너스 뿐이다. 방향판단이 중요하다. 소승은 하부구조에 집착하므로 방해자를 제거할 뿐이다. 대승은 상부구조에 집중하므로 팀을 결성한다. 여기서 마이너스는 부정적 사고, 플러스는 긍정적 사고다. 부정과 긍정은 언제나 그렇듯이 헷갈린다. 어떤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동시에 긍정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래시계의 위쪽에서 마이너스 된 것은 아래쪽에서 플러스 된다. 부정은 긍정이다. ◎ 소승 – 하부구조, 사물에 대한 부정적 태도 마르크스의 혁명개념은 무언가 제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우파들은 좌파를 향해 말한다. ‘너희는 왜 매사에 부정적이야?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라구.’ 맞는 말일까? 특히 미국의 맹목적 긍정주의가 이런 사고를 퍼뜨리는데 김미경류 자기계발서다. 그러나 진실로 말한다면 미국식 부정주의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문제는 사물에 대한 태도인가 사건에 대한 태도인가다. 사물을 부정하면 사건이 긍정된다. 모든 드라마의 공식은 3각관계의 3인 중 한 명을 부정함으로써 사랑을 긍정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사랑은 둘 사이에 성립한다. 이때 방해자가 끼어든다. 방해자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사랑은 발견된다. 여기서 방해자는 사물이다. 사랑은 사건이다. 사물을 부정할 때 사건이 긍정된다. 미국식 긍정주의, 자기계발서의 긍정주의는 사물에 대한 긍정주의다. 이는 동시에 사건에 대한 부정주의다. 어떤 서양인이 노자의 도덕경을 ‘부정적 사고의 힘’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했다. 그런데 과연 부정일까?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서구의 소유지향적 사고를 비판하고 동양의 존재지향적 사고를 긍정했다. 노자는 사물을 부정함으로써 사건을 긍정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미래를 긍정하는 것이다. 소유를 부정하는 것이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미국식 긍정주의는 사물에 집착하여 사건을 깨뜨린다. 대승은 개인을 부정하고 팀을 긍정한다. 융은 치료를 부정하고 소통을 긍정한다. 환자로 보고 치료를 하려드는 것은 문제다. 그것은 개인을 탓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잠재의식에 문제가 있어 하는 식이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은 과거의 트라우마나 잠재의식 때문이 아니라 좋은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문제다. 사회를 고쳐서 문제를 해결하는게 대승이다. 문제는 부정할 사물은 눈에 보이는데 긍정할 사건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명명하면 된다. 뉴턴은 limit를 명명했고 만유인력을 명명했다. 사건은 이름이 없다. 명명하자 부정이 긍정으로 변했다. ◎ 미국식 긍정주의, 자기계발서 – 사물을 긍정하고 사건을 부정한다. 모든 드라마는 3각관계를 조직한 후 사물 하나를 부정하고 나머지 둘 사이에서 추상적 관계인 사랑을 발견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거기에 명명하는 자가 한 분야의 대가로 우뚝 선다. 위대한 사상가는 명명자이다. 마르크스는 현실을 부정했지만 혁명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긍정주의자로 비친다. 진정한 진보주의자가 낙관주의자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현실을 비판하고 방해자를 제거하되 미래를 설계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낙관해야 한다. 사건을 긍정해야 한다. 역사와 진리와 진보와 신과 문명을 긍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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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사고가 정답입니다. 그러나 그 긍정은 사물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긍정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사건이 명명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름없는 것에 명명하는 자가 그 분야의 비조이자 대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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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미국식 긍정주의에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엘 오스틴같은 사이비 긍정론자의 긍정의 힘이라는 것에 구역질 났습니다.
그는 진정한 긍정주의자가 아니라 사이비지요!
지금 이 시대는 소승과 대승의 관점이 같이 가야 합니다.
개인은 소승적으로 집단은 대승적으로 같이 가야 완전하게 됩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었을 때 성립이 됩니다.
내가 외국어를 잘해야 저 사람이 외국어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노력과 사회의 뒷바침이 되도록 하는 것이 시대를 살아가는 공동 목표라 생각합니다.
초반 글 읽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자기 계발적 태도로 자신를 이롭게 하기 위해 애썼더니 자신도 세상도 불행해지고,
구조론적 태도로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애썼더니 세상이 진보하고, 자기도 진보한다.
진정한 긍정주의자는 아흔아홉가지를 부정하고 진정한 한가지를 긍정하며,
어설픈 긍정주의자는 자기 소원 성취하려고 부조리한 현실 99가지를 긍정하고, 진리라는 한가지를 부정한다.
앞으로 언어 만들기에 골몰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