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dia.daum.net/society/newsview?newsid=20130425122406888
이 기사에 달린 리플을 보면
대개 술취해 난동을 부린 여자가 잘못했다는 쪽으로 가고 있소.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경찰은 테이저건을 사용한 경찰을 징계하려고 할까요?
그리고 왜 기자는 경찰이 잘못했다는 쪽으로 기사방향을 잡을까요?
여기서 애초에 포지션이 다르다는 점에 밑줄을 그어야 합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매우 많습니다.
제가 질문하는 것은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 판단이 아닙니다.
그런 판단은 매우 바보같은 것이며 악플이나 다는 소인배의 것입니다.
'누가 물어봤냐고요?'에 해당되기 십상입니다.
누가 잘했다/잘못했다고 말들 하지만
대부분 사실에 대한 판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감정배설입니다.
자기 감정을 왜 여기서 제시하느냐고요?
구조론 일원이라면 객관적으로 보는 관점을 터득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이죠.
* 난동부린 여자가 잘못했다. 테이저 맞을만 하다.
* 경찰이 잘못했다. 강력범인지 확인했어야지.
* ( )
독자의 여론으로 봐서 경찰은 잘못한게 없는데 왜 징계하려고 할까요?
기자는 왜 경찰이 잘못했다는 관점에서 기사를 쓰는 것일까요?
리플을 다는 독자들의 오류는 무엇일까요?
익스플로러를 쓰면 자바스크립트가 안붙는다고 하잖소.
맞는 말씀이나 질문 요지에서 좀 벗어나 있소.
왜 경찰이나 기자는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 있느냐를 묻고 있잖소.
독자들이 나를 개입시킨게 문제의 본질은 아니오.
흔히 소견머리가 없다거나
사투리로 시근없다고 하는데
시근은 식견이오.
흔히 여자들은 시근머리가 없다고 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주로 푼수 캐릭터로 등장하오.
푼수.. 한국의 막장드라마에서 항상 등장하는 식견이 부족한 여자 캐릭터
여자나 어린이는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활동 경험이 없고
군대경험이 없어서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
벌집을 건드려 놓고
자신이 벌집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죠.
대표적인 예는 군가산점 문제에 관한 토론에 나와서
남자 허폐 뒤집는 소리 했다가
마초들의 표적이 된 몇몇 사람들이나
군대간 오빠가 무려 보너스도 받았다는데
왜 휴가때 선물도 안 사오느냐고 푸념했다가 몰매맞은 네티즌 등등.
조용필은 신인가수인데 왜 차트올킬이냐고 게시판에 쓴 아무개 등등
이런걸 말하는 겁니다.
식견의 부족을 지적하라는 거죠.
꼴통들이 다 그렇지만 네티즌들은 대개 식견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벌집이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식견없는 행동.
1. 목욕탕에서 용문신한 조폭에게 등 밀어달라고 부탁하는 남자.
2. 한중북러가 이차대전 승전국 포지션으로 뭉친다는거 모르는 아베.
3. 미국이 중국을 움직여서 기름을 끊게 한다는걸 모르는 정은.
4. 빌 게이츠가 한 손만 쓴다는걸 모르는 청와대 의전담당자.
5. 푸틴에게 부채질 해 준 남자.
.
제가 질문하고자 하는 바는
원래 중세의 시골마을에는 마녀사냥이 없었습니다.
금속활자가 도입되고 순회판사 제도 등
근대적인 사법제도가 정착하자 마녀사냥이 일어났습니다.
봉건 암흑시대에는 마녀사냥이 없었는데
근대 계몽주의 사회에는 왜 마녀사냥이 있느냐입니다.
봉건암흑시대는 시골이고 근대 계몽주의 사회는 도시입니다.
시골에는 친척이 있고 도시에는 변호사가 있습니다.
친척도 없고 변호사도 없는 지점에서 문제는 발생합니다.
위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당연히 등장해야 할 변호사의 의견입니다.
변호사가 없으면 누가 나설까요?
친척들이 나서는 거죠.
친척들이 경찰서 문앞에 퍼질러 앉아서
3개월만 통곡하고 있으면 경찰서장도 두 손 두 발을 듭니다.
동학농민전쟁도 그런 식으로 일어났지요.
식견의 부족은 그런걸 모르는 거고.
친척이라는 벌집이 있다는 거죠.
벌집 함부로 건드리면 X되는 수가 있소.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
동냥 다니는 거지.. 한 명을 건드렸는데 다음날 떼거지 백명이 와서 농성하는 수가 있음.
거지가 먼저 잘못했는데.. 쪽박 하나 깼다고 이러기냐.. 이런거 안 먹힘.
거지들은 자기들 세과시 해서
온갖 위세를 부리고 온 동네에 소문을 내는게 목적.
.
그렇습니다.
경찰이나 기자가
테이저건 발사가 잘못되었다고 보는 이유는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난동자의 친척들이 다 몰려와서 항의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불한당이나 주폭이라도 경찰이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골치가 아파집니다.
네티즌들은 난동을 부린 여자의 친척들 입장은 생각을 안 하는 거죠.
이런 사건 생기면 누가 잘못했건 간에
변호사 구해서 경찰 상대로 소송하면
못해도 수천은 벌 수 있다고 꼬드기는 사람도 나타나고
별 일이 다 일어나는 거죠.
누가 잘했느냐잘못했느냐는 본질이 아닙니다.
여파가 어떻게 미치느냐가 본질입니다.
지성인이라면 항상 그 부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사건도 변호사 입장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서로의 포지션이 충돌하는 상황을 종종 기사에서 보게 될 때
항상 전제로 염두해 두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배운 것이죠.
"모든 사람들의 선택은 합리적이다."
때문에 동렬님의 말씀처럼 누가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선택이 상부구조와 맞물려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겁니다.
그것은 바로 관점의 문제, 즉 방향성의 문제라고 보아집니다.
보는 이의 포지션에 따라 앞이 다르게 되는 그림입니다.
차 앞에 서있는 즉 밖에서 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장 크게 보이는 차량이 있는 방향이 앞이 될 겁니다.
그러나
차 안에서 운전을 하는 사람 즉 안에서 밖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장 작게 보이는 차량이 있는 방향이 앞이 될 것입니다.
◎ 사물은 속이 알차야 한다. - 사물은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 사건은 형식이 내용에 앞선다. - 사건은 주관적으로 봐야 한다.
지난 번 구조칼럼에서 언급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을 위의
내용과 연관지어보자면 사물은 밖에서 포지션을 가지고 보아야 하고
사건은 안에서 포지션을 가지고 보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차이가 나는 것은 사물은 그 자체로는 방향성을 갖지 못함
이고 사건은 방향성을 갖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말씀하며 언급하신 '사건은 주관이 객관적이고
사물은 객관이 주관적'이란 말씀에서 이런 차이가 오히려 일의성을
즉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사건은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1퍼센트로 평가받는다.
◎ 사물은 그 중에서 가장 허접한 1퍼센트로 평가받는다.
사건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아닌 방향이 중요하다는
표현으로써 가장 뛰어난 1%라고 생각했고
사물은(여기서는 존재라는 개념으로 확장시켜생각해보았습니다.) 존재
그 자체로는 방향성을 갖지 못하지만 관계를 통한 상호작용으로 방향성을
갖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 관계가 형성되는 상호작용이 바로 스타일이고
스타일이란 약한 고리를 보호하는 것이기에 사물은 그중 가장 허접한 1%로
평가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전제로 위 기사를 생각해보건데
네티즌들은 이 사건을 사물의 관점으로 평가하는 듯 보이고
경찰과 기자는 이 사건을 사건의 관점으로 평가하는 듯 보입니다.
즉 네티즌들은 사건의 당사자(여인)를 사건의 상부구조로 놓고 봄으로써
가장 허접한 1% 즉 여인의 잘못으로 이 사건을 평가한다고 봅니다.
흔히 이런 사물의 관점으로 사건을 보는 이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품의 구매 혹은 거래 혹은 대인관계에서도 종종 사용하고 익숙해진
관점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즉 사건의 관점이 훈련되지 않은 탓이겠죠.
그러나 경찰과 기자는 이 사건을 사건의 관점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가장 뛰어난 1% 즉 방향성을 가지고 이 사건을 평가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건은 항상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에
사건당사자의 특수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사건에 대처하는
시스템의 일반성이 중요하므로 사건당 할애하는 개별적인 관점이 아닌
복수의 사건을 모듈로 보는 전체적인 관점으로 사건을 대한다고 봅니다.
결국 경찰과 기자는 자신들의 시스템 안에서 사건을 조망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경찰과 기자들이 보는 사건 역시 이번 사건처럼 시스템의 약한
고리를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 약한 고리를 보호하게 하는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에 있어서 시스템에게 있어 상대적인 사물로 작용한다고 봅니다.
때문에 이를 네티즌의 잘못된 사물의 관점이 아닌 올바른 사물의 관점으로
생각해본다면 이 사물의 허접한 1% 즉 이 사건의 약한 고리는 테이져건의
오작동 그리고 이에 대한 상호작용으로써 적절한 피해보상대책과 향후
테이져건의 연구개발에 대한 데이터축적 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경찰 자신들도, 네티즌들도 테이져건에 대해서 위협적으로 생각한다고 여겨지네요.
여기에 일차적인 큰 합의점이 있다고 보이네요.
또 네티즌들의 다른 반응은 보여진 현상에 대해서만 반응하는 것이어서, 이는 그런 상황들을 접하면 불편하다는 심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이구요.
술먹고 난동 부린 이들이 잘못은 한게 맞지만, 판단은 더 큰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이 사회가 총기류나 무기류에 대해 위협적으로 생각하니, 신중해야 한다라는 이 사회의 약속과 같다고 여겨집니다.
만약 경찰이 이런 대응이 아닌 다른 대응으로 나왔다면, 이 사건은 경찰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농성이나 시위에는 다른 적용을 하여 강경진압 으로만 대응 한다는게 문제라고 여겨지며, 강경진압에 익숙해지면 경찰은 언제든지 시민에게 총이나 무기류를 들이댈 수 있다는 것에서, 집단 위기의식이 나타난다고 보이며, 현재 대한민국은 그런 잠재적인 불안을 모두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공권력에 대해서 무조건 긍정하는 이들과 견제를 요구하는 이들이 갈리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번 사안은 경찰이 그나마 이 사회의 약속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보이네요. 물론 경찰 자신들이 타겟이 되지 않기 위해 결정한 대응이었다고 할지라도... 크게 보자면 말이지요.
다른 이야기지만, 미국같은 경우는 현장에서의 경찰권력이 강력합니다.
경찰에게 협조를 하지않거나 난동을 부려 경찰로부터의 제압상황에 육체적인 데미지를 입는경우엔
경찰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는것이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이웃주민이 제 3자로써 싸움을 말리려고 개입한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경찰이 경찰인 이유는 그곳에서 나타난다고 봅니다.
경찰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요즘 10대들의 선생님을 보는 시선마냥 병풍 취급을 당할 수는 없는거니까요.
선진국들은 경찰권력이 상당히 강화되어 있습니다.
경찰국가들이지요.
그런데 이런 경찰국가들은 우선 경찰에게 권력을 부여하여 사회 질서를 잡아 놓고,
윗선에서는 그 경찰들을 잘 부리지요.
구조적으로 한수 위인 국가 구조라 보입니다.
대부분 선진국은 법(주로 문서,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변호사가 많음)으로 말하고
후진국은 관습으로 말합니다.
한국 사회는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중이며, 법체계도 다시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봅니다.
(얼토 당토 않는 묘한 법들이 꽤나 있거든요. 3월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경범죄 처벌법"이라든가 현행 "집시법"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볼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의 정신이지만,
법의 구속력과 집행능력도 조속히 제 자리를 찾아야한다고 봅니다.
한국의 많은 문제는 "의지"적인 측면에서 너무 개념이 없습니다.
이번 장관 및 총리 후보자들의 자격 검증에서 드러났듯이 집행해야할 사람들부터 문제 투성이니 원~
공감합니다.
법이 참 이상하지요.
뜬금없는 소리지만 그러한 정치권 오염의 주된 이유는 중국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합니다.
독자들은 사건에 '나'를 개입시켜 보고 있소.
이 사건을 난동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난동의 피해자 포지션에 개입시키고 있소.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피해를 입었고, 그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면 테이저 건, 아니 실탄총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리플을 안봤지만 아마 미국의 공권력 운운하며 미국 경찰의 '자유로운?' 총기 사용을 찬양하는 넘들도 나왔을 것이오. 안봐도 비디오지.
기자들은 다르오. 그들은 이 사건을 '공권력의 바운더리'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소.
그들은 공권력이 기본적으로 양날의 검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며, 특히 시민을 상대로 쓰일 때는 엄격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소. 이것은 근대 이후 국가가 치안을 독점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며 보통 국가는 공권력의확대로 언론은 공권력의 규제로 여론을 몰면서 균형을 이루어왔소. 언론은 기본적으로 국가라는 레비아탄을 감시하고 규제하고 그 권력의 바운더리가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지를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것이 역할이오. 그게 안 되면 국가라는 권력의 바운더리가 개인을 집어삼켜 싱가폴같은 꼴이 되오.
근데, 독자들이 이런 식으로 되도않는 리플을 다는데도 다 이유가 있소.
그들은 자신이 피해자이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지금 공동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고 싶은데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지식도, 언어도, 권력도,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쥐뿔도 없기 때문에 우선 목소리를 크게 키우고 극단적인 주장을 해서 주목을 받는 전략을 쓰게 되어있소. 왜? 의사결정 스트레스 때문이오. 지금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전운이 감돌고 있고 스트레스로 공기가 빡빡해서 숨쉬기 힘든데 무언가는 해야겠고 근데 무엇을 해야 할 지는 모르겠고 에라 모르겠다 소리라도 빽 지르자, 악!
학교폭력? 다 구속시켜!
성폭력? 다 잘라버려!
북한? 다 없애버려!
범죄자? 다 가둬버려!
이렇게 극단적인 악소리를 내서 일시적으로 의사결정 스트레스를 피할 수는 있으나 이는 사실 의사결정이 아니라 회피일 수 밖에 없소.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하부구조에서 일어나는 것들이고 문제는 항상 상부구조로부터 접근하지 않으면 답이 없소.
첨언하자면, 맹박이후로 점점 국가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면서,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공권력의 강화를 통해 국가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소. 김대중, 노무현 때는 국가가 세계 속에서 어떠한 포지션을 잡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 지를 알 수 있었고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보였고 그 속에 시민들이 반대던 찬성이던 참여할 수 있는 루트가 뚫려 있었소. 사람들은 굳이 국가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었소.
하지만 국가를 사유화한 맹박 이후로 사람들은 과연 국가가 어디있는지 애타게 찾기 시작하였소. 맹박이 대한민국을 꿀꺽하고 그네는 청와대 속에 대한민국을 감금한 상태이니 사람들은 도무지 대한민국을 발견할 도리가 없소.
그러니 불쌍한 사람들은 지금 내게 국가를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오. 근데 문제는 그게 안타깝게도 엄벌주의로 나타난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