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강사 김미경이라는 사람이 강연 중에 인문학을 폄하했다는 뉴스가 포털 사이트 메인에 뜬다. 곧 오해라는 해명이 뒤따른다.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오해일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떤 사람이 강연 중에 한 개인적 발언이 왜 뉴스가 될까? 문제는 타이밍이다. 대중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울고 싶은데 마침 뺨 때린 거다. 그렇다. 지금 한반도의 하늘에 우울한 공기가 감돌고 있다. 온통 나쁜 소식 뿐이다. 말하자면 준비 안된 여통령의 삽질 때문에 잘 나가던 스타 강사가 유탄을 맞은 것이다. 서점가에 자기계발서가 넘쳐나게 된 것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김미경 소동을 지켜보고 필자도 한 마디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김미경에게 하는 말은 아니다. 김미경의 말을 듣고 화가 난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왜 화가 났는지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냐다. 사람들은 힐링이라고 말한다. 틀리지 않았다. 나는 우리편이라고 말한다. 지금 한국인들에게는 끝끝내 옹호해줄 사람, 마지막 순간에 편들어줄 사람, 일관되게 지지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아도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월든의 소로는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을 7권 밖에 팔지 못했지만 그래도 씩씩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고흐는 동생 테오 덕분에 겨우 한 점을 팔 수 있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다. 왜인가? 그들은 전환기에 태어나서 시대의 변화가 일어나는 현장을 목격한 증언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한국인들의 마음이 월든 호숫가의 소로와 같고 아를의 고흐와 같다고 믿는다. 그렇다. 한국인들은 새로운 길을 가고 싶어 한다. 그럴 조짐은 도처에 흔하다. 한류가 뜨고 있다. 싸이가 15억뷰를 올리고 있다. 김연아가 휩쓸고 있다. 한국영화가 극장 좌석의 7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대기업도 잘 되고 있다. 거의 손에 잡힐 듯 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은 냉정한 법이다. 앞서가는 자의 고난을 피해갈 수 없다. 고흐는 결국 죽었다. 소로도 사후에 진가가 알려졌다.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고 싶어 하는 마음과 여전한 현실의 찬 바람 속에서 한국인은 갈등하고 있다. 춘래이불사춘이라 했던가? 봄은 왔으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일전에 어떤 분의 칼럼을 읽었는데 영화 머니볼은 내용이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한다. 영화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단장 빌리빈이 단 1년만에 멋지게 성공한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1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도 제대로 실적을 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옳은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곧바로 실적이 나와주는 것은 아니다. 하긴 스티브 잡스도 진가를 인정받았을 때는 죽음이 코앞에 와 있었으니. 그렇다. 한국은 국제무대에 막 데뷔한 참이다. 한국인들은 세계 앞에서 무언가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들은 지금 흥분해 있다. 나는 지금 한국인들의 마음이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인과 비슷할 것이라고 본다. 물랭루즈에 모여든 19세기 인상파 화가들과 비슷한 기분이라고 여긴다.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럴 때 우리편이 필요하다. 격려가 필요하다. 지지자가 필요하다. 세상이 하룻만에 바뀔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천천히 바뀐다. 대중이 인상파 화가들을 인정하게 되는 데는 실상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거쳐 거진 백년이 걸린다. 왜인가? 그림이 바뀌는건 바뀌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이 바뀌고. 건축이 바뀌고, 패션이 바뀌고, 삶이 바뀌고 다 바뀌어야 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유명세를 탔다고 하나 그것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마네와 모네가 날고 길 때도, 세잔이 명성을 떨칠 때도 진정한 변화는 시작되지 않았다. 남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여성은 집에서 아기를 돌본다는 전통적인 삶의 형태가 유지되는 한 참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2차대전이 일어나고 남자들이 전쟁터에 간 사이에 여성이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진정한 변화는 일어났다. 드레스와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전시바지를 입기 시작한 뒤에야 변화는 이루어졌다. 8000만명의 시체가 산과 들을 뒤덮고서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대중들이 인상주의를 겉멋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해한 것은 그때가 되어서였다. 예술은 앞서가면서 길을 연다. 대중의 오해와 편견은 당연한 것이다. 김미경들의 자기계발서는 열등감을 판매하는 상업에 불과하다. 성공이냐 실패냐가 우리의 삶의 기준은 아니다. 중요한건 우리편이냐다. 우리편이면 다 용서되고 적이면 다 징벌된다. 전태일은 죽었지만 우리편이었다. 그의 삶은 성공이다. 윤봉길은 죽었지만 우리편이기에 그의 삶은 성공이다, 왜인가? 우리의 길은 멀기에, 우리가 가는 길은 함께 가는 길이기에. 세상은 기어코 변한다. 진정한 평가는 그때 가서 얻어진다. 김미경소동.. 어쩌면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전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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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연히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라는 영화를 제대로 복원한 토렌트를 구해서 보았소.그냥 감동.영화의 모든요소가 있었소.대사가 없는 영화의 백미 입디다.채플린에게 박수만 치고 싶었소.
자기 계발이 아니라 우리 발견서가 되어야 한다.
각자 잘 살아서 뭐할라꼬? 각자도생하면 살길이 보이나?
김미경의 처세술은 중세대학의 목표가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생의 목표는 대학교수? 뭔가 약간 이상하지 않은가? 영어를 배우는 목적이 영어강사?
만약 진리 자체에 대한 탐구의 열정으로 교수가 되고, 영어에 대한 매력에 빠져 영어강사가 되면 자연스러우나, 교수되겠다 하는 자체가 교수 자리 탐나서 그런 것이 부지기수. 그러니까 대학원생 등골이나 빼먹는거고.
김미경은 드림워커를 주장했지만, 각자 살길을 찾으라는 허왕된 메시지를 주고 있다.
천편일률적인 지하철 시와 같다. 김미경의 말이 진짜라면 계속 김미경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다.
당장 현장에서 부딪혀서 실천할 일이다. 근데 강의 좋아하는 사람들은 강의만 찾아 다니더라.
실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론은 생각지도 않고 동어반복적인 일만 계속 하더라. 이건 뭐...
돈오의 정신대로라면 어차피 100번 들으나 1번 들으나 내용이 같은 김미경 강의 듣고,
바로 현장에 나가야 정상이지.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이론을 접목해야 진짜지.
혼자서가 아니라 팀을 이뤄서 계속 1사이클을 돌려서 작은 성공의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정련해서 자동복제할 수 있는 일반화 시스템을 창출하는 것이 진짜 성공이지.
어디 개인이 밥좀 먹고 다닌다, 돈좀 쓰고 다닌다 소리
들으려고 자기 계발서 있고 있다냐?
세상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면, 함께 가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김미경류는 세상의 독이다. 이 시대의 희망고문일 뿐이다.
갑자기 댓글을 읽으면서, 내가 처음 보았던 자기계발서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읽은 것이 아니라 보았다고 하는 것은 어느 소그룹 모임에서 그날 순서를 맡은 사람이 동영상으로 되어 있는 "치즈"를 가져와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게 2003년 이었나 싶다.
십년 전에 처음으로 저런게 자기계발서로구나! 싶었다.
그 이후로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인가 뭔가 하는 책을 보았다.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지만, 성경 을 여러번 읽어본 덕택에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것들이 성경에 들어있는 좋은 말 그것도 성공에 관련된 내용들이란 것을 보면서 자기들 읽고 싶은대로 멋지게 짜깁기 한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한국은 좀 더 썩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갈때까지 가봐야 정신을 차리지 덜..........
51%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가끔씩이지만 어쩌면 49%도 정신 못차리기는 마찬가지는 아닐까 싶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반창고가 아니라,
본질이다.
땜빵이 필요한 게 아니라,
대 수술이 필요하다.
겉만 번지르르한 돌팔이 의사나
치료보다 돈을 먼저 생각하는 무개념 의사들의 세상이 아니라,
돌팔이와 무개념 의사들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제대로 정신박힌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필요한거다.
좀 더 썩어야 그런 세상이 오려나?
자기계발서...자기개발서
저는 자기개발서라고 써 놨네요.
아마도 모두 개발서에 가깝다고 생각한듯... 근데 정말 계발서인지 개발서인지 헛갈려요.
아랫글 댓글에
'그냥 포텐이 터지면 계발... 그 외에는 다 개발...'
이 말에 어느정도 동의. 자기개발서(계발)를 읽으면서 모두 포텐이 터지기를 바라지만...정작 포텐터지기를 바라는 이는 자기개발서(계발)를 쓴 이가 바라고 있지 않을까? 이미 포텐이 터져서 자기개발서(계발)를 썼겠지만, 책이 안 팔리면 그건 더 난감할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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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blog.daum.net/tpethomasjang/6036273
▶ 계발(啓發) : 지능, 재능, 정신(사상) 따위를 깨우쳐 열어줌 예) 상상력 계발, 외국어 능력 계발
그라고...
▶ 개발(開發) 1. 토지나 천연 자원 따위를 개척하여 유용하게 만듦. 예) 유전 개발, 수자원 개발 2. 지식이나 재능 따위를 발달하게 함. 예) 기술 개발, 자신의 능력 개발 3. 산업이나 경제 따위를 발전하게 함. 예) 사업 개발 4. 새로운 물건이나 생각 따위를 만듦. 예) 신제품 개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개발
풀이에서 보는 것처럼 '개발'에는 '개척'의 의 미가 담겨 있습니다. 광산을 개발하거나 유전을 개발하거나 신도시 를 개발하는 것은 모두 '개척'입니다.
'계발'은 인간의 지적, 정신적 능력에 관계된 낱말로 정신 세계를 깨우침을 의미합니다.
단, 이넘의 "단"이 사람 쥑인다.
사람의 내면에 관계된다고 해도 인위적으로 (예를 들어 '학습' 등) 사람의 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은 '이끌어 냄'보 다 '이루어 냄'에 가까움으로 '능력 개발'이라고 흔히 쓰이기도 한다.
한문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계발(啓發)과 개발(開發)은 의미의 중심이 다르다고 볼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계명대는 啓를 썼고, 인력개발은 開를 썼지요.
한문은 전주(轉注)가 가능하기에 같은 발음이면 끌어다 쓰는 것이 흔하지요.
그래서 개발과 계발은 다르기도하고 같기도 합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썼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글쓴 사람이 꼭 사전대로 쓰라는 법은 없거든요.
김미경 자진사퇴한다고 기사나 났네요.
유명인은 유명인으로서 치루어야 할 홍역이 있고 그것에 대한
대단한 맷집과 방어력이 있어야 하는데 김미경은 그럴 내공자체가
없는 인물로 보입니다. 올라가지 말아야 할 곳에 올라갔으니 그만큼
혹독하게 당하고 좌초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공인'이나 '명사'는 역시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
세상에 나와 얼굴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면
소위 전문가라 불리는 똑똑한 사람들은 그 사람을 검증하려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일수 없습니다.
꼬투리 잡고 물고 늘어집니다.
똑똑한 사람은 스스로 고립됩니다. 왜냐 사람들이 검증할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상처를 받기 때문에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
많은 사람들과 나누었던 교류의 다리를 불태워 버리고 숨습니다.
누구나 그러한 과정을 밟습니다.
순박한 사람들은 교류마저 끊기면 살길이 없으므로
밑에서 추종하며 유지합니다.
다시 사회로 나아갈때는 지난날의 작은 다리가 아닌
모든 사람을 포용할수 있는 큰 다리를 세워야 합니다.
비난했던 사람마저 고개를 끄덕이게 큰 다리를 세워야 합니다.
멍박이도 통크게 포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하고싶은 말이 뭐죠???
영화 이연걸의 영웅이 생각납니다.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서는 접근을 해야겠지요.
접근을 하기 위해서는 진시황을 노리는 자객을 먼저 하나 하나 제거 해 나간 다음
진시황 앞까지 진행할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진시황을 죽일수가 있지요.
기득 세력을 미워하신다면 기득 세력에게 요구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창업의 기회를 할수 있는 자리와 돈을요.
세상을 바꾸실려면 욕만해서 되겠습니까?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정치인이 되던가?
기업인이 되던가?
아니면 세상 원망하면서
부모탓 조상탓 나라탓 기업탓 모든 탓을 하면서
울고 불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레미제라블....
2009년인가 여름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김미경 동영상을 보고
동영상 속의 강사는 에너지가 넘치면서 열강을 하는데
보고 있는 저는 화가나서, 그때부터 책상에 자기계발서는 다 버렸고,
시집 몇권이 책상을 차지했다가 지금은 역사책이 차지함.
지금은 서유럽이 근대화 되어가는 과정을 읽고 있는데,
역사도 역사의 결이 있어 역사의 결데로 간다는 것을 확실히 느낍니다.
발원지의 물이 바다로 갈 때 땅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 처럼
역사 또한 개인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길을 간다는 것을 확실히 느낍니다.
역사가 흘러갈 때에는 음모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요.
이것은 다른 얘기인데, 음모론은 언제 생길까요?
어떤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을 얄밉게 본 방관자의 몫이 음모론일까요?
유대가 금융이나 기타 등등 음모론의 주인공이 많이 나오지만
유대가 뜬 것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왕국)가 근대화되는 과정
(도제시스템--> 대학교육, 금융, 상업 등 근대로오면 예술, 철학 등)에서
장인의 전근대적인 방법을 유대가 근대적으로 바꾸면서 주류로 뜨자
변화를 싫어하는 장인들이 유대를 공격하던데.....
중세에는 물론 유대를 이교도로 격리할때도 있었지만 교황(이름까먹음)에 의해 단한차례 였던 것 같아요.
이런 것을 보면 음모론은 구저 구경꾼이나 방관자들이 만들어 내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