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무엇을 원했나? 인간은 무엇을 원하나? 누구나 출세를 원하고 성공을 원한다. 돈도 좋고 이성도 좋다. 그러나 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막연한 생각이고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다르다. 철학이 있는 사람은 다르다. 조선시대라면 ‘군자’라는 이상이 있었다. 서구에 ‘지성인’ 개념이 있었듯이. 인간 노무현은 무엇을 원했을까? 당신은 ‘완전한 인간’을 추구했다. 왜? 밑바닥 체험을 가진 사람이 위를 쳐다보면 그렇게 된다. 인간 예수나 백범 김구처럼 말이다. 지식인들은 쉽게 밑바닥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점에 대해 낙담한다. 대중들은 쉽게 흥분하고 광기에 사로잡혀서 대화가 안 된다고 여긴다. 그들은 혀를 끌끌 차며 대중을 경멸한다. 난폭한 군중이 언제 폭도로 돌변할지 모른다며 경계한다. 대중을 교육시켜 지식인 만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세계를 직접 겪어본 사람은 다르다. 예수는 다르고 백범은 다르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밑바닥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삶이 달라진다. 그래서 목표가 높아진다. 더 큰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지식인사회는 계급사회다. 내부에 위계질서가 있고, 체계가 있고, 비판이 있어서 상황이 ‘통제’ 된다. 체면도 있고, 위신도 있고, 꾸짖음도 있고, 반성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 말을 따라야 하는지 안다. 시장바닥의 군중들은 그런거 없다. 그들은 무질서하다. 그러나 겪어본 사람들은 안다. 진짜배기는 안다. 무질서해 보이는 군중도 감동으로, 눈물로, 사랑으로 감싸면 소통이 되고 상황이 정리된다는 사실을. ### 노무현은 완전한 인격, 완전한 인간, 완전한 삶을 추구했다. 무엇이 완전한가?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의 완전함이 다르고, 또 지식인사회의 완전함이 다르다. 하나의 획일적 기준은 없다. 어느 기준이든 일관성 유지가 중요하다. 세상과 처음 대립각을 세우는 지점이 있다. 거기서 그 사람이 가야할 인생의 길이 결정된다. 윤곽이 잡히고 아우트라인 그어진다. 누구에게나 그런거 있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지점, 양보할 수 없는 지점. 어렸을 때다. 일곱살 때 덩치큰 동네형과 다투다 억울하게 당했을 때 느끼는 그런거 있다. 여기서 밀리면 내 인생이 통째로 밀린다 이런거. 여기서 굴복하면 중학생이 되어도, 고교생이 되어도, 어른이 되어도 계속 밀릴 것이므로 끝까지 맞서겠다는 고집. 인간 노무현이 사법연수원 시절 잠바입고 양복 입은 사람들 사이에 섞였을 때 그거. 양복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돈은 구하면 되고 양복은 빌려입을 수도 있다. 당신의 고집이다. 자기 스타일을 완성시키려 한 것이다. 거기서 인생의 윤곽, 틀거리, 운명, 아우트라인이 잡혀버린 것이다. 유시민이 백바지 입고 국회에 들어섰을 때 캐릭터가 결정되어 버렸듯이. 누구에게나 그런거 있다. 노무현은 어렸을 때 남의집 밥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양복입는데 혼자 잠바입은 것이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해가며 돈 빌려서 양복 사입기 보다는 차라리 잠바를 입겠다는 고집. 그것이 당신의 미학적 일관성. 유서에 쓴 ‘운명’이라는 단어. 그 단어가 가리키는 지점이 바로 그거다. 꼬맹이때 남의 집 밥을 먹었다면 커서도 남의 양복을 빌어입었을 것이다. 이후 인간 노무현의 일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남의 집 밥을 거부하던 그 순간에 인생의 윤곽이 나온 것이다. 노무현은 그 점에서 완전을 추구했으며 그것은 삶의 일관성으로 나타났다. ‘완전’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인간은 지구상에 없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밥을 먹어도 완전하게 밥을 먹고, 똥을 싸도 완전하게 똥을 싸고 그런거 없다. 예수도, 백범도, 노무현도 무수한 불완전을 안고 있다. 그런데 왜 완전인가? 소통의 완전, 관계의 완전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완전인가? 타인과 완전한 소통을 이룰 수 있는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다. 완전하면 통한다고 했다. 개인의 미학적 일관성이 완전에 도달할 때 타인과의 완전한 소통은 가능하다. 미학적 기준의 일관성이 없이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자는 타인과의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런 수준이하의 인간들에게서는 완전한 만남을 기대할 수 없고 완전한 사귐을 기대할 수가 없다. 물론 노무현 개인은 결점 투성이다. 스스로 죽음의 시점을 결정했으니 그것을 자살로 몰아서 완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고, 뇌물혐의를 받았으니 그 또한 완전하지 않다고 흠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치 않다. 개인 차원에서 완전한 인간은 지구에 없다. 그건 본질이 아니다.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백범도 무수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렇다고 그 분들의 위대성이 깎이는건 아니다. 각자가 일곱살 여덟살 때 정한 일관성을 따라 끝까지 지켜가느냐가 중요하다. 덩치가 나의 두 배 되는 골목대장 아이에게 핍박당하면서 ‘여기서 밀리면 내 인생 계속 밀린다’고 이를 악무는 그거. 친구의 손에 쥐어진 사탕을 얻어먹고 싶지만 그거 얻어먹었다간 내 인생 결국 비굴한 거지가 되고 말거라는 생각.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그거. 그 완전성을 지켰을 때 친구와의 완전한 소통은 일어난다. 완전한 것은 통한다. 누구나 흠이 있고 약점이 있고 잘못이 있지만 누구든 각자의 미학적 고집 하나만은 완전할 수 있다. 일관성 하나만은 완전할 수 있다. 그것을 지켰을 때 위대한 소통은 일어난다. 왜 노무현은 완전한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서가 아니다. 세상이 어떤 사람을 탓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한 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한게 하나도 없으니까다. 잘못은 잘한 일로 상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잘못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는 따로 있다. 그것은 각자의 미학적 고집이다. 일관성이다. 그 일관성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사귐이다. 빛나는 만남, 지고한 우정, 오랜 동행이다. 완전한 관계다. 작은 내 안의 이상국가를 꿈 꾸고 완성시키기다. 신이 아닌 이상 한 개인의 완전은 없다. ‘노무현은 완전하다’ 이런건 없다. 노무현의 사귐이 완전하다. 완전한 자동차는 없다. 일관된 운전자와 일관된 운행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완전은 관계 안에서 상대적 완전이다. 좋은 차도 이명박이 운전하면 불완전하다. 좋은 진주라도 돼지목걸이로는 불완전이다. 인간을 최후에 살리는건 개인의 미학적 완전성이다. 그리고 나는 이 완전성의 차별화를 무기로 세상의 돈으로 차별하는, 권세로 차별하는, 지식으로 차별하는 쓰레기들과 싸울 것이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문화가 그 모든 기득권의 차별을 깨는 핵폭탄이다. 물론 그 문화도 돈으로 사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속물이라 부른다. 그 속물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흉내낼 수 없으니까. 깨달음은 돈 주고 살 수 없으니까. 그렇다. 인간이 도달해야 할 진정한 완전은 빛나는 만남이고, 진정한 소통이고, 사귐이고, 미학이고, 일관성이고, 믿음이고, 동행이고, 깨달음이다. ### 누가 노무현을 죽였는가? 인간은 최종적으로 죽이는 것은 외로움이다. 노무현은 외로워서 죽었다. 1차로는 정권이 친구를 죄다 가둬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는 따로 있다. 진리 앞에서의 외로움이 진짜 외로움이다. 내가 공부하고, 내가 깨우쳐서, 내가 지식으로 도달한 그 가치의 허망함 말이다. 최후의 친구는 진리다. 신의 완전성이다. 역사의 진보다. 평생을 감옥에 갇혀 있어도 그 세 친구만 있으면 외롭지 않다. 노무현을 슬프게 한 것은 이 나라에 진짜 지식인이 단 한 명도 없더라는 사실이다. 낮은 자는 죽지 않는다. 아이들은 죽지 않는다. 자신을 돌봐줘야 하는 어른 책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노무현 위에 노무현을 가르칠, 노무현을 감동시킬, 노무현이 존경할, 노무현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할, 노무현과 진리를 나눠가질 한 명의 지식인이 이 나라에 있었다면 노무현은 그렇게 죽지 않았다. 최장집들, 손석춘들, 황석영들이 노무현을 죽였다. 당신께서는 이 나라에서 진짜 지성인 한 명을 만나지 못해서 쓸쓸했을 것이다. 진짜 지성인이 노무현을 만나고 친구가 되어주었다면 죽지 않았다. ‘노무현을 버리라’고 사설 썼던 한겨레, 당신 가신 날 ‘노사모, 패닉’ 이따위 제목 걸었던 오마이뉴스들이 노무현을 죽였다. 적의 칼은 몸으로 받아낼 수 있으나 동지의 칼은 차마 받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기숙 교수가 ‘사랑합니다’ 하고 거기서 외쳤던 것이다. 제발 죽지 말아달라고. 노무현이 존경했던 ‘먹물진보’는 차갑게 노무현을 버렸지만, 노무현이 사랑했던 인간은 아직 옆에 있다고. 인간 노무현은 후회없이, 미련없이, 아쉬움없이 잘 살았다. 판사도 했고, 의원도 했고, 대통령도 했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갈 더 위의 가치는 발견하지 못했다. 진보지식인 그룹에서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인간 노무현이 탐낼 만한 사람이, 탐낼 만한 그 무엇이 대한민국 안에 없었다. 목표가 사라졌다. 허탈함에 빠져버렸다. 상심했다. 최종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진리다. 그 진리의 살아있는 호흡이다. 낡은 진보의 진리가 그 매력으로 노무현을 구하지 못하므로, 거꾸로 인간 노무현이 당신의 몸을 던져 세상을 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참으로 많은 일들이 노무현의 이름으로 일어날 것이다. ### 인간 예수의 삶 역시 비슷하다.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그 성전에서 무서운 진짜 지식인 한 사람 만나기를 기대했다. "이놈 예수야. 네가 뭘 안다고 까부냐? 나에게서 진리를 배워라."하고 가르침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 성전에 아무도 없었다. 인간이라곤 없었다. 그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율법사들은 예수의 명성을 시기하고 죽이려 들 뿐이었다. 누구도 예수와 함께 진리를 토론하려들지 않았다. 예수는 그 지점에서 절망했다. 그를 구원해줄 더 높은 곳의 빛이 없다면, 스스로 몸을 던져 세상의 빛이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게 예수는 가고 백범은 가고 장준하는 가고 노무현은 갔다. 가서 별이 되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 |
운명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는 길 못막아서 미안한게 아니라,
까짓 담배불 하나 못붙여준, 그런 친구가 못되었음이 미안하다.
지구 반대편 엔니오 모리코네같은 사람은,
만나지 않아도, 묵념한다.
지금도, 느낌이 없다면,
우리의 자화상이 사기 땅꾼 이명박이고,
촌지 조중동이고,
개 행동대장, 검찰인게
그 모습으로 살아온게 욕지기가 안나온다면,
그렇다면, 우린 그를 두번죽이는 거다.
원망하지 말자는 말을 흐물흐물하게 듣지 말자.
난 지금도, 가슴이 찢어진다.
남은 싸움들, 개들과의 싸움들 기어코 완수하자.
실무에서 이겨보자.
담배는 내 꼭 불붙여드리마.
하늘에서 보자.
삶과 죽음이 하나 아닌가.
다른 승객들이 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웃고 박수치며
'천신일은 복도 많지. 복도 많아' 하면서 계속 천신일타령을 한시간 하고
그 비행기 승객은 거의 다 조문객인데도
그러고서는 봉하마을에 와서 조문하겠다고
이런 썩은 놈들의 행태에 대해서 보도하는 한겨레는 없지.
이 나라에 언론은 진정코 없지.
단 하나도 없지.
왜 보도 안해?
같은 비행기 타고 오면서 웃고 떠들고 농담하고.
개새끼들.
존제하지 않는 죽음보다 삶속에 있는 두려움 그두려움은 열정정인 삶에 옅어 지는거라는 그내용이 참 많은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퇴근 하는 내내 그내용을 고씹고 되집어 보게 되더군요
노무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 서있으실때 결코 죽음 을 두려워 하지 않았을거라는 확신이 들면서
나름 위안도 찾았습니다
강의 내용 정말 잘들었습니다
연애는 잘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