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세상을 의사결정모형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모형적 사고에 필요한 모형언어를 공급한다. 현대과학은 입체적인 모듈로 설명하지 않고 낱낱이 뜯어놓는다. 각각의 사실은 입증이 되는데, 머리 속에서 한 덩어리로 조립이 안 된다. 통일된 하나의 이미지가 잡히지 않는다. 이는 숫자와 기호 없이 산수를 하겠다는 식이라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것도 아닌 중구난방의 상태다. 그 결과는 과학과 종교의 어색한 동거, 민주와 독재의 뒤뚱대는 이인삼각, 지성과 야만의 신경질적인 공존이다. 지식이 옆사람의 코딱지에 대해서는 잘 분석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만나면 기막혀 하다가 결국 침묵한다. 보수의 잘못을 잘 비판하지만, 제대로 된 진보의 비전은 보여주지 못한다. 보수는 뻔뻔스럽고 진보는 냉소적이다. 이 문명은 세련되지 못한 문명이다. 필요한 것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아채는 것이 아니라, 새누리떼들에게 ‘너는 계급배반투표를 하고 있다. 이 바보야!’ 하고 쫑코를 먹이고,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니라, 문명차원의 대수술이다. 무엇보다 소통의 수단인 언어를 바꿔야 한다. 그 이전에 사유의 수단인 모형을 바꾸어야 한다. 모형이 없다고? 아니다. 모형은 있다.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존재를 죽은 입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건으로 바라보는 관점, 쪼개진 개체가 아니라 모듈화된 대칭으로 바라보는 관점, 결과측의 가시적 형태가 아니라 원인측의 불확정적인 확률로 보는 관점, 성과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보는 관점, 경쟁이 아니라 팀플레이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물질 내부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사건 안에서의 연속적인 의사결정모형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우리는 빨강과 파랑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설명하지만, 같은 점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 못한다. 모르는게 아니다. 잘 안다. 알지만 설명하지 못한다. 남과 북의 권력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설명하지만 같다는 사실은 잘 설명하지 못한다. 적대적 의존관계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누군가 이 말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나마 박정희와 김일성이 한 패거리라는 사실을 약간 알아챈 것이다.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다. 언어의 문제 이전에 모형의 문제다. 모형이 틀리면 모든게 잘못되고 만다. 빨강과 파랑은 같은 컬러지만 흑백과 컬러로 비교차별해야 겨우 알아듣는다. 흑백과 컬러가 다르다는 사실을 찔러줘야만 빨강과 파랑이 같은 컬러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일본과 한국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줘야만 남북한이 같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같고 여자와 남자가 같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내부적인 동질성을 설명하기 위한 외적인 차별성의 부각이 지나쳐서 결국 한국은 반미, 반일, 반북, 반중, 반러, 반동남아, 반유럽, 반외국인노동자 국가가 되어버렸다. 내부의 결속을 유지할 목적으로 외부에 너무 많은 적을 만들어버렸다. 그래놓고도 내부의 결속이 유지되지 않아 싸움판이 크게 벌어졌다. 망쳐버린 것이다. 왜 이다지도 한심한가? 같음을 설명할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같음을 설명할 모형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명은 불완전하다. 상대팀과 시합이 붙어야만, 우리가 서로 같은 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납득한다면, 외부의 적과 크게 싸움판을 벌이지 않으면, 반드시 동료를 적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른다면 이 문명은 참으로 위태로운 것이다. 아니라고 말할 자 누구인가? 인간의 모든 불화는 내부적인 결속을 끌어내기 위해 외부에 불필요하게 적을 만드는 행위 때문에 일어났다. 이는 초등학교의 왕따와 이지메로부터 학습된다.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된다. 빨강과 파랑을 따로 분리하여 각각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팀 안에서의 포지션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바른 관점은 숫자를 1이나 2로 보는게 아니라 그 사이의 +, -, =로 보고 기호로 보는 것이다. 그 통합의 기호들에 적합한 이름을 붙여놓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가 모두 같은 팀의 동료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1과 2는 아는데 그 사이의 =는 모른다. 산과 물을 각각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산하로 통일시켜 보아야 한다. 음양, 남녀, 상하, 좌우, 전후, 고저, 장단, 원근, 미추, 광협, 경중, 농담을 차별하고 비교하여 판단할 줄은 아는데, 이들이 실제로는 하나라는 사실을 모른다. 게다가 이름도 붙여놓지 않았다. 미추는 알아도 하나의 art는 모른다. 그러니 파인아트와 이발소그림의 차이를 모른다. 과학과 종교의 차이를 모른다. 그것을 표현할 언어도 없다. N극과 S극은 알아도 둘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자기력선은 모른다. 그 선은 하나이며 음양, 남녀, 상하, 좌우, 전후, 고저, 장단, 원근, 미추, 광협, 경중, 농담에도 모두 둘을 통일하는 하나의 선이 있다. 자기력선 역할을 하는 무엇이 있다. 단지 이름이 없을 뿐이다. 앞뒤가 있으면 진행이 있다. 앞뒤는 둘이나 진행은 하나다. 반드시 그것은 있다. 그것은 이름이 없으므로 모형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장단에는 길이가 있고 광협에는 넓이가 있고 경중에는 무게가 있다. 찾아보면 다 있다. 오른팔과 왼팔이 박자를 못맞춰서 서로 헐뜯고 싸우는 판이다. 누가 박자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식훈련 할 때는 소대장이 호각을 불어가며 왼발 오른발 하고 구령을 불러 주는데 사회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에 갈가리 찢어졌다. 구조론이 세상의 호각이 되어야 하고 구령이 되어야 한다. 박자를 맞춰줘야 한다. 사회는 의사결정모형이 정답이고, 자연은 에너지의 작동모형 정답이다. 둘은 같다. 세상을 하나의 통합된 모형으로 이해할 때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다. ### 아래는 일부 중복 및 새로 추가된 내용입니다. 구조론은 통합된 모형으로 설명한다. 모형은 상부구조를 복제한다. 가장 높은 상부구조는 우주의 탄생이다. 기독교라면 창세기다. 탄생의 첫 순간에 있었던 일을 계속 반복한다. 우리가 아는 우주의 처음은 빅뱅이다. 빅뱅이전, 우주의 탄생 이전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이 부분을 인간이 상상할 수 없다. 빅뱅이전은 어떤 것이냐는 물음은 자체모순이다.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빅뱅이전이 있겠는가?
무한모형 – 논리가 없는 막연한 모형이다. 보통사람의 우주에 대한 인식은 그림과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모형이다. 이는 무한개념의 수용을 전제로 한다. 자연에 무한은 없으므로 이미 틀렸다. 시간으로 끝이 없고, 공간으로 끝이 없는 무한의 바다에 그냥 툭 던져진 모양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형이 없는 것이다. 원시인들이 지구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이런 형태가 된다. 막연하게 세상이 무한히 크다고 여기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로 무한하고 사방으로 무한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양자론에 따라 무한은 없다. 인정해야 한다. 무한모형은 논리가 없으므로 모형이 될 수 없다.
단선모형 – 시작에서 끝까지 일직선 모형이다. 빅뱅이후만 생각하면 이 모형이다. 기독교의 창세기 모형과 유사하다. 세상은 시작과 끝이 있으며, 시작에서 출발하여 끝까지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문제는 하느님 뒤로 숨었다는 거다. 하느님의 창조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우주의 종말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이는 진리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비겁한 태도다. 두 눈 뜨고 정면으로 태양을 바라보아야 한다. 눈이 아파도 말이다. 단선모형은 앞뒤를 잘라낸 불완전한 모형이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유의미하다.
순환모형 – 같은 패턴이 무한히 반복되는 모형이다. 영원히 팽창과 수축이 반복되는 순환모형도 생각해봄직 하다. 빅뱅이후 우주가 팽창하다가 어떤 한계점에 이르면 다시 축소한다. 그리고 또다시 빅뱅과 수축을 반복한다. 불교의 윤회모형과 유사하다. 아이디어가 신선하지만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모형은 빅뱅이전을 논하므로 부자연스럽다. 빅뱅이전은 시공간이 없었으므로 논할 수 없다. 재밌지만 버려야 한다. 순환모형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꼼수로 대답한 비겁한 모형이다.
평행모형 – 무한히 많은 우주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형이다. 양자론을 엉뚱하게 해석하여 파도의 물거품처럼 무한히 많은 나가 동시에 존재하고 혹은 거품처럼 순간적으로 사라진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평행우주 가설이다. 매트릭스의 스미스요원이나 홍길동의 둔갑술처럼 무한히 복제되기도 하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말로 우길 뿐 모형으로 그릴 수 없다. 이는 과학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아니다. 평행모형은 소년의 호기심을 끌어낼 의도로 꾸며진 거짓 모형이다.
생사모형 –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가 출렁이는 모형이다. 우주는 무와 유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다. 무와 유는 입자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결과가 아닌 원인, 아기가 아닌 자궁, 대칭으로 보고, 일의성으로 보고, 의사결정으로 보고, 에너지의 출렁임으로 보고 생과 사로 보아야 한다. 존재는 작은 알갱이들의 뭉쳐져 이루어진 덩어리가 아니다. 커다란 하나가 다양한 모습으로 출렁이는 것이다. 그림의 솟아오른 돌기들은 각각의 시공간대이다. 이웃한 돌기와는 시공간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 사이의 시공간은 죽어있다. 블랙홀을 연상할 수 있다. 우주가 통째로 블랙홀 속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블랙홀 속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므로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블랙홀로 빨려들어도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곳에는 별도의 시간대가 작동하는 것이다. 본래의 하나가 내부에서 복제되어 널리 펼쳐진다. 입자는 출렁임들이 꼬인 것이다. 꼬임이 풀리면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 사라진다. 꼬임이 얽히면 살아나서 형태를 이루고, 꼬임이 풀리면 죽어서 형태를 감춘다. 꼬임이 풀리면 시간도 공간도 물질도 없다. 파도는 가라앉고 물거품은 사라져도 바다는 그대로 남아있다. 생사모형이 우주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바른 모형이다. 이상의 다섯 모형들은 대개 불완전하나 연결되어 하나의 형태를 끌어낸다. 무한모형은 모형이 없는 막연한 생각이지만 모형에 대한 궁금증을 끌어낸다. 단선모형은 앞뒤를 잘라낸 불완전한 모형이나 확실한 논리가 있다. 순환모형은 이를 시간적으로 확장하고, 평행모형은 공간적으로 확장한다. 생사모형은 이 모두를 통합한다. 생사모형이 다른 모형과 다른 점은 양자역학을 받아들여 딱딱한 입자의 형태가 아닌 출렁이는 파도와 같은 불확정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평행모형은 복제본이 원본에서 이탈하여 여러개로 분리되어 있는데 반해 생사모형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사계절에 따라 지구는 태양의 이쪽에도 있고 때로는 반대편에도 있지만 별도로 두 개의 지구가 있는게 아니다. 우주는 합쳐서 하나이며 절대로 2가 되지 않는다. 단지 출렁이는 모습이 둘일 뿐이다. 남자와 여자는 둘이지만 인간은 하나다. 빛과 그림자는 둘이지만 빛 입자는 하나다. 생사모형이 우주의 바른 모습이지만 구조는 복잡하므로 이 다섯모형을 합쳐서 생각해야 한다. 이미지 한 컷으로는 출렁이는 에너지의 세계를 모두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중력은 공간의 출렁임이다. 공간이 출렁이므로 매 시간단위마다 의사결정을 새로 해야하고, 물체의 중심을 새로 잡아야 하고 그때마다 지구에 조금씩 가까워지는게 중력이다. 태양계는 광막한 우주에 가만이 떠 있는게 아니라 팽창하는 지구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고요한 정적인 우주가 아니라 출렁이는 동적인 우주를 머리 속에 그려야 한다. 죽은 우주가 아니라 살아있는 우주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
◎ 무한모형 – 모형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시킨다. ### 양자역학은 중력을 중력자의 교환으로 설명하지만 모형으로 볼 때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새가 날개짓을 한 번 하면 날개짓이지만 천번 하면 날개짓이 아니라 날개의 진동이다. 벌새는 많은 경우 1초에 65번 날개를 움직인다고 한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프로펠러 속도와 같다. 자동차로 치면 무려 4000 RPM에 해당한다. 전자는 1초에 수억번 광자를 교환한다. 과학자들은 이를 투수와 포수가 공을 주고받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흐름과 진동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 갈매기의 날개짓과 벌이나 파리의 날개짓은 다르다. 벌은 노젓듯이 날개를 젓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부르르 떤다. 사람이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과 추워서 부르르 떠는 것은 다르다. 고개를 흔들 때는 목뼈를 이용해서 신체와 대칭을 만들지만 추워서 떠는 동작은 고유 진동수를 이용해서 대칭을 만든다. 공간적 대칭이 아니라 시간적 대칭이다. 대칭을 만드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단어로 설명하면 안 된다. 의사결정방법이 다르면 다르다. 물레방아가 도는 것은 방아가 물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주고받는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양자세계의 상호작용을 입자의 교환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벌의 비행과 새의 비행이 같을 수는 없다. 그 차이는 공진에 의한 타코마 브릿지의 붕괴를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다. 많은 사람들이 태보운동의 뜀띄기에 의한 테크노마트의 공진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적합한 사유의 모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파도는 몰아칠때보다 가라앉을 때가 더 위험하다. 파도가 자면서 큰 너울을 만들기 때문이다. 팽이는 쓰러질 때 큰 궤적을 그린다. 이는 입자의 교환모형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물레방아의 회전은 입자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계가 에너지를 처리하는 것이다. 공간은 계를 이루고 양자적인 방법으로 에너지를 처리한다. 우리는 중력을 통해 물질이 에너지를 대칭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대칭을 비대칭으로 바꾸려면 입자를 만들 핵이 필요하다. 그것이 물질이다. 상호작용을 입자의 교환으로 설명하는 방법은 모형적 이해에 있어서 혼선과 오해를 유발한다. 계가 에너지를 처리하는 개념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소립자가 가진 터무니없이 큰 에너지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다. 파도가 출렁이면 물거품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우리우주는 빅뱅으로 생겨나서 언젠가 사라진다. 그것은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창세기처럼 시작과 끝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하나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최초의 시작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시간적 이전으로 가는게 아니라 공간의 다른 층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시공간적으로 닫혀 있다. 우리 우주 바깥에도 많은 물거품들이 있을 수 있다. 그 물거품들은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다. 존재는 사건이다.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의 닫힌계 안에서 완결된다. 그것은 죽었다가 깨어난다. 이 모형을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분명히 말한다. 벌새의 정지비행과 참새의 수평비행은 다르다. 헬기와 제트기만큼 다르다. 노와 스크류만큼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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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로 쓰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과 같은 의미라면 맞는 말씀입니다.
부분이 합쳐서 전체가 되는게 아니고
전체를 쪼개서 부분을 발굴하는 거지요.
0은 전체로서의 0이어야 합니다.
0의 정의를 앞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항상 1과 -1 뿐이라 0 은 보는 것이 아니라 알아야 하며, 이는 동렬님 말씀처럼 사고의 모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존재는 1+(-1)=0
이 아니라
0 = 1+(-1)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