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 ? → ! )다. 철학이 물음표면 미학은 느낌표다. 둘은 서로 대칭된다. 그리고 완성된다. 문제는 그 사이의 메커니즘이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비례식이 성립한다. 얼마나 깊게 질문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큰 울림을 얻을지가 결정된다. 인생은 그 빈 칸 채우기다. (□ → □)에서 네모 안에 들어갈 숫자는 각자가 정하는 거다. 그리고 인생이 결정된다. 얕게 질문하면 얕은 느낌이 따르고 깊이 질문하면 깊은 느낌이 따른다. 큰 의문에서 큰 감동이 일어난다. 그것이 힘이다. 인생의 차이는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아니라 그 힘의 차이다. 오목을 두어 승리할 것인가 바둑을 두어 패배할 것이냐다. 오목을 두어 이겨봤자 힘이 없다. 그걸로 끝난다. 시시하기 짝이 없다. 바둑을 두어 패배해도 힘은 있다. 인생의 도전은 계속된다. 철학은 한 마디로 인간의 살아가는 힘을 어디서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말하자면 왜 사느냐다. 답은 미학이다. 미학은 완전성이다. 완전성의 동기부여가 삶의 엔진이다. 성공? 웃기지 마셔. 그래봤자 힘이 없다. 시시하다. 백원내기 오목이다. 그딴거 안 쳐준다. 인생 전체를 걸고 세상 전체에 맞서 거대한 한 판의 대국을 벌여야 한다. 승패는 초월해 있다. ( ? → ! ) 게임의 전개과정은 첫째 자기규정, 둘째 타자규정, 셋째 관계규정, 넷째 피아구분, 다섯째 상호작용이다. 단계들을 거쳐 철학의 질문은 미학의 화답으로 짝지어 완성된다. ◎ 자기규정 – 나는 누구인가? 주체성인가 타자성인가? ◎ 타자규정 – 신은 누구인가? 혹은 세상은 내게 무엇인가? ◎ 관계규정 – 둘 사이를 어떻게 잇는가? 믿음, 사랑, 자유, 존엄, 꿈 ◎ 피아구분 – 우리는 함께 어디로 가는가? 진리, 역사, 진보, 문명 ◎ 상호작용 – 완전성은 무엇인가? 디자인, 미학, 예술, 깨달음 나는 몸뚱이나 마음이 아니다. 육체는 소멸하고 마음은 변한다. 진정한 나는 나의 의사결정영역이다. 그것은 권(權)이다. 내가 세상의 어디까지 개입할 것이냐다. 먼저 나를 구획해야 한다. 주체성이냐 타자성이냐에 따라 나의 범위는 결정된다. 그 다음은 타자규정이다. 나를 확정했으면 그 나에 맞서는 너가 결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적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신이 될 수도 있다. 누가 나의 적인지, 어디가 나의 세상인지, 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정하기 나름이다. 얕게 정하면 졸렬해지고 크게 정하면 웅대해진다. 먼저 나를 구획하고 다음 너를 발견하며 더 나아가 둘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 다시 함께 가는 방향성을 결정하고, 각자 자기 안의 것을 토해내어 멋진 그림을 조직할 때 완전해진다. 남녀의 결합이라도 그러하다. 직장을 잡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분명히 해야 파트너를 만난다. 그것이 자기규정이다. 다음은 파트너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명히해야 한다. 하룻밤 관계인지 평생의 관계인지가 정립되어야 한다. 거기서 믿음과 사랑이 설계되는 것이며 비로소 팀을 이루어 먼 길을 함께 갈 수 있다. 그 목적지는 진리요 역사요 진보요 문명이다. 소인배에게는 개인의 성공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중요한건 혼자라면 역사도 진리도 문명도 진보도 없다는 것이다. 혼자 두는 바둑은 실패다. 함께라야 한다. 소인배의 성공은 이미 실패다. 나의 성공이 동시에 남의 실패를 결정한다면 이혼소송과 같다. 이미 실패다. 승소가 패소다.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진리, 문명, 진보, 역사의 방향성이 없는 개인의 성공은 게임의 실패다. 둘이서 앙상블을 이루어야 하는데 하나가 잘했고 하나가 못했다면 이긴게 아니라 실패한 거다. 그것이 피아구분이다. 마지막으로 자기 안의 전부를 끌어내어 상대방 전부와 만나야 한다.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야 한다. 결실이 얻어져야 한다. 깊은 산골에 숨은 은자의 정신승리법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바꾸고 트렌드를 바꾸고 유행을 바꾸고 디자인을 바꾸어야 한다. 이는 남녀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가 피아노를 연주하더라도 그러하고, 노동자가 일을 하더라도 그러하고, 병사가 전쟁을 하더라도 그러하다. 모든 게임의 메커니즘이다. 내가 연주자인지 명확해야 하고, 내가 연주할 것이 피아노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 둘 사이에 악보가 있어야 하고 연주의 목표가 제시되어야 한다. 대충 할 것인지 제대로 할 것인지다. 최종적으로 그 연주를 완성한다. 나와 타자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진행방향 그리고 최종적인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계속 진도를 나가서 이야기를 완결해야 한다. 하나의 사건은 기승전결을 거쳐 종료된다. 아름답다. 그리고 전파된다. 그러나 명상가들은 자기규정에 골몰해 있다. 진아(眞我)라는 표현을 쓴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 계속 찾는다. 그럴 뿐이다. 그 다음 계획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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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인간에게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노력해야 한다는 식의 자기계발서는 힘을 주지 않습니다.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힘을 달라니까요? 왜 힘을 주지 않고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지요? 진정한 힘은 팀플레이에서 나옵니다. 나의 성공이 아니라 세상의 성공을 욕망할 때 힘은 얻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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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도대체 어디서 계속 터져 나오는 건가요.
담아 놓은 걸 퍼오나요 아님 실시간으로 뽑아내나요?
누구나 구조론을 제대로 하면 우주에 빨데 꼽을 수 있나요?
누구나 가능합니다.
단 빨대의 크기는 제각각이겠지요. ㅎㅎㅎ
빨대라는 비유 정말 좋은 비유 같아요...ㅋㅋㅋㅋ쵝오
인류 공동자산
사유의 힘으로 영감을 계속 이끌어 낼 수 있음
가져다 쓴다 하여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제대로 쓰면 더 늘어남
가져다 쓰는 것이 더 공동자산이 늘어나는 것
가져다 쓰는 것이 인류 공동작업에 기여하는 것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거
단지 길어 올리기가 쉽지 않다는거
그러나 제대로 쓰면 쓸수록 풍요로워짐
절대 빈곤하지 않음
이것이 인문학!
동렬님 쓰시는 글은 대부분 문장마다 절마다 독립적으로도 의미가 가득함을 봅니다.
따라서 글마다 절 번호를 매길 필요가 있다 보여요.
이글은 교과사에 올릴 후보가 될 것 같습니다.
동렬님 쓰신글중 몇편은 이미 올리고도 남음이 있지않나요?
누가 힘을 달라고 하지, 왜 힘을 안쓰냐고 나무라면 할 말 없지요^^
에너지를 구할 빨대와 에너지원을 갈켜주는 구조론!
창조가 어디서 생기는가? 라는 질문은 하나마나.
창조는 행위지 존재가 아니기에, 존재를 보면 창조도 보이는 거겠지요.
사물이라면 샘의 근원이 좀 더 명확하고 설명하기 쉽겠지만,
그게 사람의 창조, 신의 창조라면 그러게 쉽게 설명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인문학이 필요한 거겠구요.
샘이 솟아오르듯,
잔에 물이 넘치듯,
바둑판의 다음 수를 두듯,
무궁무진한 인간의 가능성과 신과의 감응.......
이렇게 사는게 인생의 참 맛인가 봅니다.
어떤 일을 마쳤을 때, 아주 쉽게 당신은 실패했어! 라고 규정하는 인간이 있는 반면,
음~ 당신이 지금 한 일은 씨를 뿌리는 일이었으니, 10년, 20년, 30년 뒤에 아니 당신이 죽은 뒤에 그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신이 알거야)!
이 말은 실제 들은 이야기인데,
재밌는 것은 주변 한국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이내 실패로 규정했고,
나라는 인간을 아는 사람은 씨 뿌리는 일로 규정해 주었다는 거..........
지금도 그렇게 포석을 깔고 있는데,
가끔씩 몇 수 전에 둔 행보가 괜찮았다는 걸 고수인 상대방의 표정을 통해 읽곤 합니다.
지금 내가 둔 한 수,
그건 다음 또 한 수를 어디에다 두는가에 의해 결정 되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들려오는 소리,
개가 짖어대는데 (계발서니, 성패니 그저 아무 의미 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너무 괘념치 말아야 할 일입니다.
불교의 진아(眞我)에 대해 한 생각 덧붙입니다.
명상가는 끝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왜?"
진아는 "왜"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질문자의 포지션을 벗어나야 부처가 됩니다.
화두는 푸는 게 아니라 벗어나는 것입니다.
화두는 질문자의 포지션입니다.
화두의 글귀에 낚이면 영원히 질문자에 머무를 뿐입니다.
망상이오.
진아 어쩌구 하는 장난은
누군가가 진아를 찾았다고 말하면
그건 진아가 아냐 하고 꾸짖어주는 용도로만 쓰이오.
ㅎㅎㅎㅎ
멋진 요약이네요.
역시 정리 안 된 생각을 늘어 놓으니 바로 깨지는군요.
한 수 가르침 감사합니다.
진아든 뭐든
힉스입자의 발견처럼
상호작용, 게임의 구조 안에서 모형으로 기능합니다.
구조 없이 입자로 받아들이는 데서 코미디는 일어납니다.
여기 총이 하나 있다. 총구멍은 없어. 발사되지 않아. 멋진 총이지 않니?
누구도 이 총을 쏠 수는 없어. 크하하하하
완벽한 나의 승리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총을 쏠 수 없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총구멍이 없기 때문이지.
이게 진아라는 거지.
이게 화두라는 거지.
찾을 수 없는 경지,
깨뜨려지지 않는 화두
발사되지 않는 총.
이런 말장난은 입자 사고에 갇힌 겁니다.
총은 쏘아져야 총이고
진아는 타자 앞에서만 진아이며
타자와 상호작용 하지 않는 진아는 망상이오.
화두는 3초 안에 깨져야 화두입니다.
신의 입자도 발견된 마당에 깨달음의 표준모형을 찾으십시오.
감사합니다.
입자에 갇힌 사고였군요. 또 한 수 배우고 갑니다.
그러고보니 카톡 배경무늬 이름이 진아의하루
이유가있었네요. 어른을 공경해야겠습니다.
이리 살펴보니 자기계발서에는 인간소외가 바탕이 되고 있는듯도 하네요.
혼자 가는 길이 아닌 것이 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