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전도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주와 객은 흔히 전도된다. 주관적이라고 하면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과연 그럴까? 천만에. 주관적 사고는 실제로는 타자중심적 사고이다. 왜? 주객전도 때문이다.
주객은 당연히 전도된다. 조심해야 한다. 주인이 좋은가 손님이 좋은가? 당연히 주인이 좋다. 당신은 이 세상의 손님이 되지 말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주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왜 손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과학적이고, 주인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보는 것은 비과학적일까? 주인이 좋다며? 주인의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며?
번역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subjective는 내관적, objective는 외관적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주관, 객관은 어떤 멍청이가 번역을 잘못해서 망친 예다.
주인은 자기 차를 운전하므로 밖을 바라본다. objective는 주인의 시선이다. 손님은 남의 차를 얻어 탔으므로 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안을 바라본다. subjective는 손님의 시선이다.
이런 착오가 빚어지는 이유는 사물과 사건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조론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 중심이다. 존재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사물은 포장을 걷어내고 안을 뜯어봐야 내막을 알 수 있고 사건은 밖에서 봐야 전모를 알 수 있다.
생각해보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당황스럽다. 겸손을 배워온 한국인의 정서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왜 석가는 이런 오만방자한 말을 함부로 내뱉었을까? 이 또한 번역의 잘못이 아닐까?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차나 한 잔 들게.’ 하면 그 차를 권하는 이는 주인인가 손님인가? 조주는 주인일까 손님일까? 조주는 주관적일까 객관적일까? 뭔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자기중심적 사고는 주관이고 자기를 배제하는 것이 객관이다. 그러나 이를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곤란하다. 자기중심적 사고는 실제로는 타자중심적 사고이다. 전혀 자기가 판단의 중심이 아니다. 어린이는 매우 이기적으로 사고한다. 왜? 어린이는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이기적인 행동은 실제로는 부모중심적 사고이다. 어린이는 부모를 중심에 놓고 자기를 변방에 놓는다.
어린이는 자기를 위하지만 동시에 부모에 의한다. 여기서 의하여가 우선인가 위하여가 우선인가? 위하면 의한다. 나를 위하면 부모에 의한다. 이는 부모중심적 사고다.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고 믿기에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자기의 의견을 앞세우긴 하지만 모든 것이 부모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거기에 대항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갑이 아닌 을로 보는 것이다.
의존적인 사람이 항상 자기를 앞세운다. 독립적인 인격자는 절대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다. 앞세우면 손해기 때문이다. 밥을 먼저 먹는 자가 설거지 당번이다. 자기를 배제하는 것이 객관이다. 그러려면 도리어 자신이 천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자신이 배제된다. 자신이 우주적으로 커져서 신과 동급이 되어야 자기가 사건에서 배제된다. ◎ 전제(질문) ≫ 진술(답변) 언어는 전제와 진술의 구조를 가진다. 인간이 주관에 빠지는 이유는 진술포지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때 상대방은 전제 포지션이 된다. 상대가 묻고 내가 답하는 형식이다. 이건 자신이 중심에 선 것이 아니고 변방에 선 것이다. 주어가 중심이고 동사는 변방이다. 문장은 주어=동사+목적어로 조직된다. 여기서 주어편이냐 동사편이냐다. 주관은 주어가 아니고 동사다. 이런 헷갈림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가 언어를 반대로 쓰기 때문이다. 빌다/빌리다, 더하다/덜다, 붙다/빼다는 어원이 같다. 매/매, 임대/임차는 흔히 거꾸로 쓰인다. 쌀 팔러 장에 간다는 말은 쌀 사러 장에 간다는 뜻이다. 한국인은 앞이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
우리말로는 가까운 곳이 앞이기도 하고 영어로는 먼 곳이 앞이기도 하다. 정리하자. 언어에는 포지션이 있다. 주관적 사고는 위하여이며 위하여는 의하여에 치인다. 의하여가 주가 되고 위하여는 종속된다. 주객이 전도되어 자신을 위할수록 손해를 본다.
남에게 주는 자는 사장이고 자신의 몫을 챙겨가는 자는 노동자다. 사장은 항상 주고 노동자는 항상 받는다. 정신차려야 한다. 겸손한 사람은 의존적인 사람이기 쉽다. 오만한 사람이 책임지는 사람이다. 겸손한 이유는 남의 것을 베끼기 때문이고 오만한 이유는 자신의 것을 창의하기 때문이다.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주관은 종속적 사고, 객관은 주체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주체적 사고를 해야 한다. 주체적 사고를 하려면 사건전체를 장악해야 하고 그러려면 사건 밖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objective는 사건 바깥에서 보는 관점이다. subjective는 사건 안에서 보는 즉 우물 안의 개고리 사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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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관점의 존재를 알아채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대략 주워섬기는 피상적인 관찰로는 거꾸로 되기 십상입니다. 주관은 전혀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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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보고, 그들은 싸가지 없다 그랬어요. 고작 늘어놓은 증거들은 고졸...
사법시험은 그렇다 치더라도, 싸가지 없다는건 감정표현이고,
'책임'지는게 필요하죠. 노무현은, 죽음으로 가족에 대한 애증을 책임졌습니다.
스스로 정치하면서 불필요하게 고난당한 가족에 대한 애증을 책임졌습니다.
물론, 한국사와 세계사에는 이미 다했지만요.
김대중은 그걸 알고 있어서, 가슴아파, 1년후에 간겁니다.
제발, 싸가지 없다고 욕하지 말아요.
그 욕은, 자기가 가진게 없다는걸 방증하는거니까.
누군들 '일베'라는 말로 욕먹고 싶을까만요...
내가 세상이 되어 보겠다는 배짱 정도는 있어야 뭔가 해 내지 않겠습니까.
주객이 전도되었군요.
늘 사용하는 용어 Subjective 와 Objective를 늘 사물의 관점에서 보았네요.
아란도님의 왜 주인의 입장에 서지 못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
사물과 사실을 분리해서 보지 못하는 것임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러는 것임과
주관 객관을 잘못 번역한 언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객전도지요.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 안되면 관측자와 관측대상을 노트에 그려보면 됩니다.
사물은 안을 봐야 하는데 안을 보려면 보는 관측자는 밖에 있습니다.
사건은 밖을 봐야 하는데 밖을 보려면 보는 관측자는 안에 있습니다.
헷갈리는건 당연한데 헷갈리는게 정상입니다.
너무 문장의 자구에 집착하지 말고 맥락을 따라가십시오.
맥락에 따라서 밖에 있다는 말이 동시에 안에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거울을 본다면 밖을 보는 것이지만 동시에 안을 보는 것입니다.
예술은 밖을 보는 것이지만 동시에 안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빨간옷을 좋아한다면 내 안이 결정하지만 실제로는 밖이 결정한 것입니다.
자기를 지켜보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했기에 빨간옷이 좋아보이는 것입니다.
집을 보려면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안에서 안을 보지 밖에서 어떻게 안을 보겠습니까?
그러나 포지셔닝으로 보면 이미 자신은 밖에 있습니다.
보는 관측자 자신은 집의 일부가 아니라는 거죠.
반대로 사랑을 보려면 사랑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보는 자신은 이미 사랑 속에 있습니다.
밖에서 보는데 포지션은 이미 안에 있다는 거죠.
여기서 앞에서 말한 밖과 포지셔닝의 밖은 다른 밖입니다.
결국 헷갈리는게 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