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신의 의미 현대는 과학의 시대다. 과학으로 말해야 한다. 과학은 토대는 수학이다. 수학의 기반은 인과율이다. 지금 인과율이 모든 논리의 최종근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인과(因果)는 2다. 이거 이상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1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가 아닌가? 당연히 논증의 끝판왕은 1이어야 한다. 아라비아 숫자가 1에서 시작되듯이 말이다. 현대를 과학이 이끈다면, 과학을 수학이 이끈다면, 수학을 인과율이 이끈다면, 인과율은 무엇이 이끄는가? 최종적인 답은 마땅히 1이어야 한다. 그 1은 무엇인가? ‘일의적 동시결정 원리’다. 사과를 반으로 자르면 두 개의 단면을 얻는다. 단면의 수는 2다. 그런데 같다. 둘은 실상 하나다. 무엇인가? 1이 2로 복제된 것이다. 이는 인과율을 증명하는 이론이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대에서 과학, 과학에서 수학, 수학에서 인과, 인과에서 일의(一意)로 연결되는 연쇄고리에 필요한 것은? 신(信)이다. 신(信)은 어떤 둘의 사이를 잇는 것이다. 사이는 관계다. 물질 역시 관계다. 모든 것이 관계다. 인간 역시 관계다. 나란 무엇인가? 역시 관계다. 그것은 믿음이며, 믿음을 담보하는 것은 복제다. 1에서 2가 전개하였다. 자물통과 열쇠의 신(信)은 무엇으로 담보되는가? 인터넷 사이트 패스워드의 신(信)은 무엇으로 담보되는가? 도장이나 사인의 효력은 무엇으로 담보되는가? 은행권의 효력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국가의 시스템은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가? 가족관계의 신(信)은 무엇으로 성립하는가? 주식회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 모든 것은 신(信)에 의해 작동된다. 그 엔진은 일의적 결정원리다. 가족이 유지되는 것은 신(信)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 1에서 부모+자식 2가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막연한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물리적 원리다. 1이 2를 제한하는 것이 믿음이다. 질량보존의 법칙과 엔트로피 법칙으로 성립한다. 믿느냐는 물음은 권(權)에 의해 제한되느냐는 물음이다. 국가든, 회사든, 생물이든 모두 이러한 하나의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일의적이지 않으면 가짜다. 위하여는 가짜고 의하여가 진짜다. ‘위하여’는 후건이 전건을 치는 논리적 오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범죄는 현장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범죄 후에 속임수가 등장한다. 성범죄 후에 금전을 지불하고 무죄로 위조한다. 법을 모르는 피해자가 금전을 받으면 이를 구실로 무죄를 주장한다. 반대로 현장에서 관계에 동의했다가 사건 후에 자신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범죄로 몰아가는 경우도 있다. 박시후 사건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사건 후에 제 3자의 개입에 의해 스토리가 조직되는 경우가 많은데 가짜다. 믿음은 전건이 후건을 치는 일의적 결정의 논리구조 속에 있다는 거다. 일의적 결정은 사색이론으로 증명된다. 사색이론은 위상의 균일을 유지한 채 인접한 4개의 포지션이 정보를 공유하는데 따른 이론이다. 에너지가 투입하면 최대 5포지션까지 정보가 공유된다. 대신 그 상태가 유지되지는 않는다. 이때 포지션이 복제된다. 4색이론에 의해 5포지션에서 구조가 복제되어 1이 2로 전개하며 인과율을 성립시키므로 전건이 후건을 치는 신(信)이 성립한다. 그 신(神)에 의해 세계는 작동한다. 전건이 후건을 제한하지 않으면 믿음은 붕괴되고 조직은 파멸하고 시스템은 붕괴한다. 우주는 무너진다. 권에 의해 일의적으로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5포지션에서 위상균일이 성립하므로 포지션을 차례로 전개하면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된다. 이를 널리 알려진 기승전결 개념으로 대체하여 설명할 수 있다. 포지션을 줄이면 인과가 된다. 이때 전건이 후건을 쳐서 원본 1이 복제본 2를 제한하는 것이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이때 정보만 복제될 뿐 에너지는 증폭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에너지의 결핍에 의해 계가 통제되는 것이다. 자물통을 잃은 열쇠, 열쇠를 잃은 자물통은 쓸모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 원리에 의해 만약 내가 상대를 배신하면, 나의 존재 역시 일의적으로 몰수되기 때문에 믿음이 유지되는 것이다. 이때 1이 2로 전개할 뿐, 2가 1로 환원되지 않는 비가역성이 성립한다. 엎어진 물을 주워담을 수 없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포지션이 복제됐을 뿐 질량은 증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지션은 증가하나 질량은 불변하므로 최초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의 권(權)에 의해 세상이 일의적으로 통제된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인간의 내면에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행된 은행권은 다시 한국은행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때 한국은행이 에너지 공급자로서 권(權)을 가진다. 사건이 발달하는 기승전결의 기 포지션에 서서 승, 전, 결을 제한하는 것이다. 소유권, 특허권, 기득권, 인권 등 일체의 권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권에 의해 정부가 인권을 치면 자동으로 정부가 타격된다. 일의적으로 동시에 타격되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시스템이다. 세상의 모든 법칙, 모든 이론, 모든 원리, 모든 질서는 이러한 통제가능성에 의해 작동한다. 우주는 권의 일의적 통제원리로 창조되었으므로 특정환경에서 어떤 하나가 전체를 대표하게 된다. 그것이 신(神)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내부에도 이러한 일의적 결정원리가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상호작용하는 환경 전체를 상대한다. 사건 전체에 맞서 대표성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한 사람이 특정한 의사결정에 임하여 인류전체, 문명전체, 역사전체를 대표하는 현상이 소통이며, 이는 상호작용에 의해 가능하고 그것이 영적체험이다. 권의 위치에 포지셔닝한 느낌이다. 적이 없어지고, 피아구분이 없어지고, 경계가 사라지고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을 얻는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뇌가 그 지점에서 강렬하게 반응한다. 바로 이 지점이 믿음의 출발점이다. 세상과 나의 상호작용을 일의적으로 결정하는 믿음이다. 이는 자기 안의 발견이다. 최면술처럼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기이한 체험을 하는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엄마는 아기를 나로 느낀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아기는 남이다. 아기가 아프면 아기가 아프지 내가 아픈 것은 아니다. 무덤덤하게 대응한다. 그러나 본성을 드러내는 각별한 지점이 있다. 아기가 물에 빠졌다면 엄마는 본능적으로 물에 뛰어든다. 그것은 자기도 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몰카실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 앞에 귀신이 나타난다. 갑자기 조명이 꺼지고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다시 불이 켜지면 눈앞에 귀신이 나타나서 비명을 지른다. 이때 실험대상이 된 사람은 혼비백산하여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도망친다. 데이트 중의 커플에게 이런 실험을 했다가는 엑스트라가 위험해진다. 남자가 귀신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유부단한 사람도 데이트 중에는 강한 결단력이 생긴다. 남자의 허세는 아니다. 여자친구 앞에서 과시할 의도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포지션이 명백하면 무엇을 해야할지 일의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포지션이 불분명하면 결단을 못하고 우물쭈물한다. 이러한 일의적 결정상황은 스트레스로 나타난다. 이디오피아에 가뭄이 들어서 굶어죽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지만 스트레스를 받는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다. 무시해버리면 된다. ‘그건 그 나라 사람들이나 걱정할 일이지 나랑 상관없잖아.’ 그렇게 무시해 버리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상실한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 소외된다. 타자를 배척할 때 일의적 결정이 깨져서 전건이 후건을 치지 못하는 인간소외가 일어나며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의 지점이다. 이미 자신을 살해한 것이다. 죽음이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도 같다. 죽음 다음에 따라오는 후건은 없으므로 일의적 결정이 깨지기 때문에, 후건이 통제되지 않아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은 관계로 이루어진 존재다. 관계를 부정하면 소외가 일어난다. 내가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관계의 결과가 나다. 일의적인 관계를 부정할 때 상호작용의 대표성이 말소되는 것이 소외요 부조리다. 소통은 그 반대로 대표성의 획득이다. 이명박의 처묵시리즈가 소통이 아닌 이유는 대표성을 부정하여 소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반대로 관객이 영화에 공감하고 재미를 느끼는 것은 그러한 대표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대표성을 상실하면 영화는 재미가 없다. 사는 것은 어색해진다. 원초적 볼완전성의 노출이다. 그 점을 드러낸 것이 까뮈의 이방인이며 홍상수나 김기덕의 영화이고 부코스키의 소설이다. 나라는 것은 곧 나의 권(權)이며, 일의적 결정에 의해 믿음이 작동하는 나의 의사결정영역이며, 그러한 상호작용의 대표성을 부정하고, 타자를 부정할 때 그 권의 촉수는 떨어져 나간다. 권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진다. 판단할 일도 없고, 생각할 일도 없고, 걱정할 일도 없다. 죽음이다. 존재는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일의적인 관계다. 그 관계는 권에 의해 작동한다. 신(神)에 대한 개념은 대상과의 상호작용 레벨에 따라 정령신, 영웅신, 시조신, 관념신, 소통신이 있다. 일의적 결정을 성립시키는 신(神)의 개념은 소통신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허상이다. 소외가 일어난다. 대표성이 없다. 권이 없다. 1이 아니므로 2를 통제하지 못한다. 에너지가 없다. 기승전결의 기에 포지셔닝하지 못한다. 어색하고 불완전하다. 손뼉이 마주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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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적인 관계가 깨지면 범소유상 개시허망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의 일대일 관계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이때 나와 일대일로 대면한 세상이 신입니다. 그 지점에서 대표성의 획득 곧 소통이 일어나는 것이 즉견여래입니다. 내가 죽을 때 세상이 죽고, 세상이 죽을 때 내가 죽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얻지 못하면 삶의 완성도는 실패입니다. ∑ |
언어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시는데 공감합니다.
결국 표현을 못하면 모르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매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애매하게 안다는 거고 결국은 모른다고 봐야지요.
信은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 때 생겨나는 관계죠.
위에서 말씀하신 일의는 영어의 언약이란 단어 COVENANT는 두 사람이 언어로 하나의 약속을 세우는 거죠.
그리고 약속을 깨면 그 사람은 없어져야(죽어야) 합니다, .
그만큼 믿음이란 엄청난 단어죠.
믿음이란 일의고,
결국 일의가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격이 있는 사회가 되겠지요.
국가 못믿어.
대통령 못믿어.
법. 못믿어.......
결국 말을 못믿는다는 건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다는 거죠.
말은 곧 법이 되어야 하고 믿을 수 있는 거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