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란 무엇인가? 신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다른데 구조론의 결에 따라 다섯 가지 형태로 각자의 신관(神觀)을 구분지을 수 있다. 명명하자면 신관이 발달정도에 따라 ‘정령신, 영웅신, 시조신, 관념신, 소통신’이 된다. 1) 정령신.. 애니미즘, 물신.. (강자에 대한 복종심) 늦게 팬 장작이 위로 올라가는 법칙에 따라 가장 발달한 신관이 가장 늦게 나타난다. 정령신이 가장 원시적인 신관이고 소통신은 근대적인 신관이다. 구조론의 결에 대면 량≫운동≫힘≫입자≫질이다. 신관은 역설적인 의미에서의 자기규정이다. 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같다. 신관이 높을수록 그 사람의 인격도 높다. 한 사회의 신관은 그 사회의 발달정도에 비례한다. ‘나란 무엇인가?’는 자신이 세상의 어느 지점에 맞서는가다. 그러므로 ‘신이란 무엇인가?’는 세상의 어느 지점이 나의 부름에 응답하는가다. 혹은 삶의 동기 측면에서 어느 지점에서의 응답을 기대하는가다. 그것이 격이다. 곧 인격이다. 인격은 공동체 내에서의 사회적 포지션이다. 옛날이라면 카스트에 비유할 수 있다. 카스트가 존재하는 이유는 결혼제도 때문이다. 누구와 결혼하는가에 따라 신분이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누구와 맞서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된다. 신을 어떻게 보는가는 어떤 신과 결혼했느냐에 비유된다. 노예와 결혼하면 노예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관은 세상과의 상호작용이고, 상호작용은 반드시 상대가 있으므로 그에 따른 레벨이 있다. 내부에 코어와 밸런스가 생겨난다. 포지션이 굳어져서 한 번 정해지면 당신의 인생 전체를 일관되게 규정한다.
인류학자의 보고에 의하면 수렵채집에 종사하던 부족민이나 유목민이 농민으로 바뀌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농민이 상인으로 바뀌는 일도 드물다. 상인이 상인인 이유는 상나라 사람만 상업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상인은 행상이었다. 점포를 열고 영업하는 것이 아니라 봇짐을 짊어지고 만리 타향을 걷는다. 수백명이 대상을 이루고 12개파 산적이 웅거하는 12개의 산을 넘어 양자강 남쪽에서 차를 운반하는 식이다. 직업이 한번 정해지면 좀처럼 바뀌기 어려운 이유는 완전성의 문제 때문이다. 카스트가 바뀌기 어려운 이유가 결혼의 문제 때문이듯이 미학적 완전성의 문제는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하려면 상대와 뜻이 맞아야 한다. 신관(神觀)도 마찬가지다. 어떤 신관이 정해지면 잘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의 격을 총체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인생은 그 격에 맞추어 완전히 바뀐다. 야구 초보자가 동네에서 야구놀이를 하는데 우연히 포수를 맡았다가 평생 포수를 한다거나, 동네 형들이 축구시합을 하는데 멤버 한 명이 부족하다고 끌려가서 우연히 골키퍼를 맡았다가 평생 골키퍼를 하는 격이다. 그것이 잘 바뀌지 않으며 손뼉이 마주쳐야 하는 미학적 완전성의 문제 때문에 원래 그게 어렵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신관이 자기를 규정하고 자기규정이 삶을 총체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정령신≫영웅신≫시조신≫관념신≫소통신으로 갈수록 점점 구체적인 사물에서 추상적인 사건으로 바뀐다. 신을 어떤 구체적인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추상적인 사건 곧 상호작용으로 볼 것인가다. 이러한 차이는 나를 인식하는 형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나와 타자를 어느 선에서 구분하는가이다. ‘우리가 남이가’ 할 때의 남과 나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이다. 원시신앙에서 그것은 주로 행동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술이나 부적 혹은 기도 따위다. 그러한 신앙행동에 의해 나와 타자가 대응된다. 이때 그 대상에 자기투사가 일어난다. 자기 마음이 반영되는 것이다. 예컨대 바위를 숭배함은 바위의 힘을 가지고 싶다고 하는 것과 같고 호랑이 뼈를 부적으로 소지함은 호랑이의 힘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과 같다. 그런 식으로 신앙대상에 자기의 의지를 투사하는 것이다. ◎ 원시신앙 .. 구체적인 사물, 자기투사 원시 신앙은 자기 자신과 상호작용하는 대상을 신으로 바꾼 것이다. 그 대상은 자기보다 강한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원래 강자에게 복종하는 심리가 있다. 어린이라면 부모에의 복종은 생존의 불가결한 요소다. 어린이다운 복종심리가 강한 것(바위, 강, 나무 등의 자연물) 무서운 것(귀신, 질병 등 권력요소) 사나운 것(호랑이, 곰과 같은 맹수)에 대한 의존심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말하자면 정령신이다. 정령은 알 수 없는 자연현상을 추상화 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센 것은 지식이고 지식보다 더 센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정령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복종할 마음이 생겨난다. 그래서 숭배한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 단결하여 인간이 힘을 얻게 된다. 여러 사람이 뭉치면 맹수도 제압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영웅신이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 학문의 신, 사랑의 신과 같다. 영웅신들은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표한다. 전쟁이든 사랑이든 불화이든 공동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집단적으로 결사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한 것이다. ◎ 마나(멜라네시아), 마나토이(북미), 프라나(Prana, 인도), 기(氣, 중국) 이 시기에는 마나의 힘이 등장한다. 마나(Mana)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이 가진 속성이라는 점에서 추상성이 있다. 위력이 아니라 추상적 요소를 숭배한다는 점에서 정령신보다 영웅신에 가깝다. 정령은 대상 자체로 존재하지만 마나는 인간이 부릴 수도 있다. 주문을 걸어 비를 내리게 하거나 혹은 적을 쓰러뜨릴 수도 있다. 즉 당순한 복종심리가 아니라 적극적인 획득요소라는 점에서 정령신과 다르다. 무속이나 주술은 정령신적 요소와 영웅신적 요소가 공존하지만 한국 특유의 기복신앙이나 기독교의 복음주의는 모두 마나의 변형된 형태로 볼 수 있다. 행운이나 복을 빌거나 점괘를 기대하는 것도 모두 영웅신이다. 정령신이든 영웅신이든 결국 자기의 의지를 투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신의 주관적인 욕구를 개입시킨 것이다. 결국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정령신은 자신의 맞서는 대상이며 영웅신은 자신의 행위다. 자신이 어디에 맞서고 어떻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그들의 신관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여전히 객관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추상한다는 것은 자기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사건 자체의 결을 따르는 것이다. 세 번째 시조신 단계부터 자기배제가 일어난다. 이 단계부터는 강령이나 교리가 등장하며 종교가 객관화 되어 근대종교로 발전한다. 정령신은 자신이 상대하는 대상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나타내고, 영웅신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강한지를 나타낸다. 기도나 터부나 부적이나 고행이나 점수(漸修)나 주술은 모두 영웅신에 해당한다. 시조신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대표한다.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줄 대표자로 조상신이 등장하며 더 나아가 유일신 개념으로 바뀐다. 율법, 체계, 강령이 나타나며 이 시기부터 종교가 인간을 통제하는 기술로 바뀐다. 거대종교가 출현하며 종교가 정치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교가 상대하는 대상이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점이다. 사물이냐 사건이냐는 추상화 된 정도로 구분되며 공동체의 규모로 구분된다. 개인에게 나타나면 사물이고 집단에 나타나면 사건이다. 호랑이는 개인에게 나타나지만 전쟁은 집단에 나타난다. 호랑이 숭배가 전쟁숭배로 변질되는 식으로 종교가 추상화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보이다. 종교가 바뀌는 이유는 사회단위가 부족에서 도시로 커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공동체의 긴장과 결속이며 그것을 유발하는 원인이 호랑이와 같은 사물이 아니라 전쟁과 같은 사건으로 되기 때문이다. 1) 정령신.. 대상이 나다. 대상은 세고 무섭다. 복종한다. 어떤 신을 보는가는 어떤 나를 보는가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센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내가 누구를 상대하는가다. 카스트의 원리에 따라 결혼상대자의 세기가 나의 세기를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힘이 세고 무서운 존재를 상대하는 것이 나라고 주장하는 것이 정령신이며, 특별한 방법으로 마나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나라고 주장하는 것이 영웅신이다. 소속집단을 앞세우는 것이 시조신이다. 관념신은 정통성을 앞세운다. 소속집단에는 체계가 있고 그 체계를 장악하는 것은 권(權)이며 권(權)을 지배하는 것은 정통성이다. 시조신은 족보를 대표하며 조상에 제사를 지낼 권리를 앞세운다. 장남이 특권이다. 그것은 권리다. 일신교는 그 권리가 최초의 창안자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에 대한 모든 권리는 최초에 인간을 창의한 인간발명자에게 있다. 창조주가 인간을 발명했으므로 창조주에게 특허권이 있는 것이다. 한글에 대한 권리는 세종대왕 1인에게 있다. 이러한 정통성을 추구하는 것이 이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통성을 추구하다보면 신에도 저작권이 생긴다. 내가 신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이신론이 등장한다. 인간이 신을 발명했으므로 인간이 신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혹은 무신론으로 변질된다. 최초 발명자에게 특허권이 있다면 그 발명자는 인간이고 인간이 가장 세다. 모든 신앙의 뿌리가 강자에 대한 복종심에서 비롯된다면 인간이 신보다 세므로 신을 숭배할 이유가 없어진다. 불교에서 부처를 숭상하거나 혹은 도교에서 도를 숭상하는 것이나 유교에서 이(理)를 숭상하는 것도 같다. 도나 이는 모두 루트이며 그 루트는 족보이고 그 족보의 정점에는 창조자가 특허권을 쥐고 있으며 그 이치를 따지다 보면 가장 센 것은 특허청이다. 불교나 도교나 유교는 어느 의미에서 특허청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 네번째 관념신 단계는 합리주의가 등장한다. 합리주의는 권리의 족보를 추구하며 혹자는 부처를, 혹자는 도를, 혹자를 리를, 혹자는 이성을 그 최종 특허권자로 내세우며 최종적으로 무신론으로 귀결된다. 신은 인간의 발명품으로 치부되며 무신론에 이르러 더 이상 상부구조를 고민하지 않게 된다. 유교나 불교가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 극단적인 실용주의에 빠져서 공동체를 공격하기도 한다. 종교의 규모는 공동체의 규모와 같다. 종교가 정령신에서 영웅신, 시조신, 관념신으로 커져가는 것은 사회가 커져가는 규모와 같다. 또 그 사회에서 가장 센 것이 무엇이냐와 같다. 각각 자연물, 마나, 국가, 진리가 된다. 무신론으로 가는 이유는 국가 위에 더 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세다지만 말이 그렇고 진리가 개인에게 위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사회에서 가장 센 것은 국가이고 국가 이상의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신이 없다. 국가 위에 세계가 있지만 세계가 나를 징벌하거나 상찬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틀렸다. 가장 센 것은 낳음이다. 최상부구조는 소통이다. 가장 위에 하나가 아니라 자궁이 있다. 고흐나 세잔은 개인이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특허권은 개인에게 있지만 실제로는 시스템이 낳는다. 인상파가 고흐나 세잔을 낳은 것이다. 시스템은 개인이 아니므로 권리를 부여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면 세종도 글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이사 위에는 주주총회가 있다. 대통령보다 국회가 높다. 진리보다 낳음이 높다. 이 지점에서 사회에서 먹어주는 힘이 아닌 본질에 접근하게 된다. 정령신, 영웅신, 시조신, 관념신은 사회의 발달정도에 따른 권력규모를 나타낸다. 무엇인가? 이는 타자에 대한 태도다. 즉 자신이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상대가 결정한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의 지점에서 자신이 그것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누구와 결혼했는지가 아니라, 자기가 누구의 친구냐가 아니라, 소속집단이 아니라 낳음에 의해 자신의 위치가 결정된다. 소통이냐 소외냐다. 정령신, 영웅신, 시조신, 관념신은 타자에 대한 태도이며 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며 이는 소외된 것이다. 자기소외가 일어난 것이다. 자신이 아닌 대표자로 자기를 설명한 것이다. 유권자는 정치적 대표자에게 위임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지만 작가들은 그냥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의지를 나타낸다. 창의하기 때문이다. 가장 센 것이 창조자라면 작가는 곧 창조자이다. 일찍이 이 단계를 말한 사람은 신비주의자였으며 그들은 영적체험을 강조했다. 누구를 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신과 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체험은 적이 사라지는 마음이다. 보통은 긴장이 걸려 있고 적이 있다. 인간의 사회적 포지션은 사회 안에 긴장의 공기가 감돈다는 전제 하에 성립된다. 그것은 결혼과 같은 축제이거나 전쟁 혹은 질병과 같은 재난이다. 공동체에 긴장이 걸렸을 때 소집이 일어나서 포지션이 정해진다.
긴장상태는 가상적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상대하는 적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엄마 품의 어린이는 그 적이 없다. 혹은 무아지경에 빠진 수행자도 적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작가들은 창작에 성공할 때 적이 없다. 스포츠맨은 우승했을 때 적이 없다. 남녀는 사랑할 때 적이 없다. 엄마는 적이 없다는 전제 하에 출산을 한다. 피아구분이 사라지는 소통과 합일의 지점이 있는 것이다. (계속.. 이상은 오세님의 목요모임 강의를 참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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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믿건 안믿건 상관없이, 세계에 대한 당신의 태도, 삶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이 안에 있습니다. 무신론 역시 여러 신관의 하나입니다. 세상과 당신의 맞서는 지점이 존재하며 그 지점이 역설적으로 자기규정을 일으켜 당신의 사고와 행동을 제한합니다. 당신이 제한당하고 있다는 본질을 직시하십시오. 먼저 자신을 해방하십시오. 낳음에 이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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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적 사유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