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언어는 전제와 진술의 구조로 되어 있다. 전제가 call이면 진술은 why다. 혹은 because라 할 수도 있다. 둘은 대칭을 이루며 언어를 구성한다. call은 상부구조, because는 하부구조다. 안다는 것은 진술에 대해 전제를 아는 것이며 because에 대해 call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공동체 중심으로 사고한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보다 높은 권위를 들이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엄마가 call을 친 권위자가 되고, 초등학생은 선생님이 권위자가 되며, 중학생은 잡지나 서적이 권위자가 되며 어른이 되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 하고 되묻게 된다. 권위부정이다. 어린이 사이의 논쟁이라면 ‘울엄마가 그러던데.’ 하고 권위를 들이대는 아이가 논쟁에서 승리한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권위자를 찾게 되어 있기 때문에 논쟁은 점차 포지셔닝게임으로 가게 된다. 일기를 쓸 때 무심코 ‘나는 오늘~’로 시작하게 되듯이, 사전에 정해진 루트를 찾아간다. 권위자의 포지션만 대면 아는 걸로 착각한다. 문제는 이러한 무의식에 의한 공동체중심적 사고가 과학을 해친다는데 있다. 예컨대 영혼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묻는다면 가족이나 부족의 계속성에서 답을 찾게 된다. 영혼이 있는 이유는 가족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부족의 전통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천동설이 주장되는 이유도 신의 권위 때문이다. 우주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미리 정해놓은 포지션으로 자리를 찾아간다. 지식은 because이며 답은 call이고 call은 권위다. 여기서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로 올라간다는게 문제로 된다.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가는 것이다. 자연은 원인에서 결과로 이행하므로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넌센스다. 개인의 상부구조는 집단이다. 무작정 집단에 권위를 부여한다. 개인의 문제를 집단에 전가하는 것이다. 더 올라가면 우주와 자연과 신이 된다. 틀렸다. 사건은 행동이며 원인은 뇌다. 유전자다. 인간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유전자가 그렇게 세팅되었기 때문이며 집단과는 관련이 없다. 지구가 도는 이유는 신과 관련이 없다. 개인≫집단으로 가면 오류이며 행동≫유전자로 가는게 정답이다. 과학적 사고를 하려면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안 된다.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밥의 결과는 먹다이다. 밥을 먹는 것이다.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버이 수령님 은혜, 혹은 박정희 독재자 이런게 나온다. 그대가 밥을 먹는 이유는 박정희 은혜 때문이 아니고, 김일성 은덕 때문이 아니고 단지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그대의 행동이 칼로리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칼로리가 그대를 순환하는 것이다. 위(밥)와 아래(먹다)와 더 아래(싸다)의 대칭구조, 순환구조에 답이 있다. 그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 정답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원인으로 거슬러 가려는 태도가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판단을 엉뚱한 데로 인도한다는데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긴장 때문이다. 공동체에 걸린 스트레스 때문이다. ‘이게 다 명박이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 정답을 찾으려면 재현하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명사에서 동사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패턴을 찾아 짝을 지어 대칭을 이루는 것이다. 그 다음엔 비례를 찾아야 한다. ◎ 빛은 밝고 그림자는 어둡다. 흐린 날은 그림자도 덜 어둡다. 밝을수록 그늘은 더 깜깜하다. 명암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칭시켜 내부의 비례를 찾을 때 그 대상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바람의 비례는 기압이다. 기압을 통제하여 기상을 바꿀 수 있고 기상예보를 할 수도 있다. 안다는 것은 서로 대칭되는 둘을 전개시켜 짝을 지은 다음 비례를 확보하여 1을 이루는 것이다. 비례는 1이며 한 번의 개입으로 대상이 통제된다. 보통은 한 넘이 들어오면 동시에 하나가 빠져나가게 된다. 안철수가 들어왔지만 동시에 그만큼 무언가 빠져나갔다. 그러므로 대상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비례를 확보할 때만 대상이 통제가 가능하다. 비례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분야에도 응용될 수 있다. 비례는 하나의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그것이 지식이자 과학이다. 비례까지 가야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있어야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빛도 변하고 그림자도 변하지만 비례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의 대칭구조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항상성을 찾아서 비례식을 유도해 냈을 때 비로소 대상을 통제할 수 있으며 비로소 진리에 근접한 것이며 그것이 다른 것에 응용될 수 있는 진짜 지식이다.
###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공동체에 판단을 떠넘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대가 긴장하기 때문이며, 그대가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며, 그대의 스트레스가 공동체로 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무의식적으로 상대가 무엇을 질문하든 '이게 다 명박이 때문이다' 하고 대답하도록 뇌가 세팅되어 있습니다. 권위자에게 문제를 떠넘기려고 하는 거죠. 이미 뇌에 길이 나 있습니다. 뇌가 잘못 길들었기 때문에 잘못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확 바꾸십시오.
∑ |
어쩌면 예술이라는 것도 현실과 조응하는 또 다른 대칭구조를 만들어내어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전체를 관통하려는 가장 근원적인 언어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