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 ‘작가가 되길 바란다면’에서 부코스키는 당신이 작가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열댓가지나 열거해 놓았다. 그렇다면 작가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부코스키의 깨달음을 훔치면 된다. 너무 쉽잖아. 부코스키의 묘비에는 ‘Don’t try’ 한 마디가 씌어 있을 뿐이다. 그대로다. 애쓰지 말고 훔쳐라. 무엇을? 부코스키의 깨달음을. 깨달음은 무엇을 깨닫는가? 결을 깨닫는다. 결을 깨달은 목수는 나무를 깎을 수 있고, 결을 깨달은 석수장이는 돌을 쪼을 수 있고, 결을 깨달은 화가는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결을 깨달은 작곡가는 곡을 쓸 수 있다. 고흐는 그림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는데 어느날 결을 깨닫고 화가가 되었다. 그것은 간단한 발상의 전환이다. 화가는 무엇을 그리는가? 모델을 그린다. 그런데 왜 모델을 그리느냐다. 본질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그려야 할 것은 내 안에 들어찬 에너지의 결과, 캔버스의 결과, 붓의 결과, 안료의 결이 충돌하여 어우러지는 모습이 아닌가? 그러나 고갱은 고흐를 이해 못했다. 고갱은 지누부인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놓았다. 사실적으로 그려놓았지만 그 안에 사실은 없다. 어차피 그림은 사실이 아니다. 진짜 그려야 할 사실은 고상한 척 하고 싶은 지누부인의 열망 그 자체였다. 마음을 그려야 진짜다. 고흐가 진짜를 그렸다. 어차피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자는 건데 말이다. 부코스키는 소설가 지망생들이 가장 많이 모방하는 작가다. 그렇다. 다들 약빠르게 부코스키의 깨달음을 훔치고 있었던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제자들이 김기덕의 스타일을 훔치듯이 말이다. 애쓰지 마라. 그들처럼 훔쳐라. 인상주의는 노력하지 않는다. 대신 도구를 쓴다. 그 도구를 훔치면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다. 하긴 요즘은 훔치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그 안에도 경쟁이 있지만 말이다. 고흐처럼 그림을 전혀 못 그리던 사람도 문득 깨달아서 화가가 될 수 있다. 부코스키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다면 당신도 하루아침에 작가가 될 수 있다. 간단하다. 결대로 가는 거다. 결은? 대칭구도다. 대칭구도는?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되는 상호작용의 구도다. 예컨대 이런 거다. 기차역 근처에는 지갑을 잃어버려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차비를 빌려달라는 앵벌이가 있다. 집으로 돌아가면 갚아주겠다며 주소를 적어가기도 한다. 나는 그런 거지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왜? 그 자가 하필 나를 찍었다는 것은, 그 역 대합실 안에서 내가 가장 어리숙하게 보였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여행자의 행동거지를 살펴서 어리숙하게도 속아넘어가서 돈을 내놓을만한 호구를 찍어내는 재주가 있다. 자 여기서 여러분이 포착해야 할 것은? 거지라고 하면 일단 불쌍하다. 동정론 나온다. 자본주의 모순이 어쩌고, 신자유주의 폐해가 어쩌고 나와주신다. 이렇게 가면 망하는 거다. 왜 거기서 자본주의가 나오냐? 제발 의미를 버려라. 대신 관계를 얻어라. 중요한건 게임이다. 앵벌이 거지와 나의 일대일 게임. 누가 승자냐? 중요한 것은 그 공간과 시간이 매우 어색하다는 거다. 바로 그곳이 약한 고리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작품은 약한 고리에서 나와준다. 애초에 거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 시선을 마주치는 즉 상대방이 말을 걸어올 빌미가 된다. 한 마디라도 대답하는 즉 꼬인 거다. 이쪽에서 의견을 표명하면 상대방에게 대응할 권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선을 외면하고 재빨리 그 자리를 이탈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나 낚이고 만다. 간혹 거지가 새로운 기술을 선보일 때다. 며칠 전의 일이다. 지하철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먹고 있는데 할머니 거지가 말을 걸어왔다.‘1000원이면 국밥을 사먹을 수 있는데.’ 아! 이 거지 독특하다. 대개는 장님행세를 하며 하모니카를 불거나, 혹은 다리를 절뚝이며 사연을 적은 쪽지를 돌리거나, 혹은 1000원짜리 껌을 파는데 이 작은 할머니 거지는 대뜸 국밥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뭐시라! 국밥? 그러나 진부하다. 그 정도로 이 게임에서 나를 이길 수는 없다. 혁신의 시대이다. 이제는 거지도 혁신해야 한다. 세상은 진보하는데 왜 거지의 수법은 30년 동안 변하지 않느냐 말이다. 그 정도는 약하고 뭐 좀 산뜻한거 없어? 할머니 거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자리를 피하는데 이 할머니 보소. 아주 팔꿈치를 잡고 매달린다. 손끝으로 아주 살짝 잡았다. 그 할머니는 찰나에 간파한 것이다. 내가 0.5초 동안 허공을 보고 빙그레 웃는 장면을 포착한 거다. 어떻게든 반응하면 털린다. 짜증스런 표정으로 잽싸게 현장을 이탈해야 하는데 그넘의 국밥에 솔깃해서 뭔소린가 하고 잠시 귀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은 것이 들켰다. 등돌리고 마침 도착한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데. ‘아저씨 멋쟁이야. 아저씨 최고야!’ 갑자기 할머니가 이상한 대사를 치는 것이었다. '어쭈구리? 이건 새로운 기술인데?' 그 할머니는 동정심 유발전술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다른 기술로 변경했던 것이다. 넘어가고 말았다. 만원짜리 한 장을 빼줬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근데 할머니가 내가 멋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봤지? 이런 식으로 털린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건 게임이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게임의 시선을 얻을 수 있다면 작가가 될 수 있다. 부코스키의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꽁트 형식의 게임이 옴니버스로 진열되어 있다. 의미를 버리고 관계를 취하라. 관계는 게임이다. 게임을 취하라. 거지들에게 싸구려 동점심을 베풀 이유는 없다. 그것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다. 불쌍한 거지를 보고 상대적으로 안락한 자신의 형편을 위안하는 싸구려 행동이다. 나는 거지팔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식의 안도감을 일금 천원에 거래한 것이다. 조건없는 자선이 아니라 조건있는 상거래다. 반면 거지를 경멸하는 태도도 옳지 않다. 그것은 겁쟁이들의 심리적 방어행동이다. 부도덕한 자의 죄의식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경멸로 나타난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이 있고, 부도덕한 자는 항상 양심에 찔리고, 찔리면 아프고, 아프니까 화나고, 화나니까 거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지의 게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느 크리스마스날 서울역 앞 벌통방에서 부부거지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부부거지는 둘 다 키가 1미터 40쯤 되는 단신이었는데 그 때문에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 사람은 명동육교를 공략하고 한 사람은 남대문 육교를 공략했는데 대목이라서 벌이가 쏠쏠했던 거다. 재미있는 것은 거지는 절대로 행인의 자선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거다. 모든 거지가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부부는 그랬다. 부인거지가 명동육교의 쫙 빼입은 신사로부터 만원짜리를 떨군(?) 대목을 듣고 있자니 이건 뭐 흥부전이면 흥부 박 타는 장면이요 춘향전이면 어사출도 장면이다. 어떻게 기술을 써서 신사의 지갑으로부터 만원짜리를 사냥했는지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어찌나 신이 나는지 어깨가 들썩들썩. 잼있는 것은 그 신사를 단순히 작업대상으로만 보는 거지의 시선이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사냥하는듯한, 낚시꾼이 물고기를 낚는듯한 묘사. 그게 막노동 일당 1만 2천원 하던 25년 전의 일이니 지금의 화폐가치로 보면 5만원~10만원짜리 성공이다. 어쨌든 벌통방의 거지부부는 갖은 기술로 신사의 지갑에서 만원짜리를 추풍낙엽처럼 떨구어서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보냈던 것이다. 무용담은 남았다.
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view?newsid=20121205130703667 요즘 TV에 전우치전을 하는 모양이다. 모 평론가의 칼럼을 보니 작품을 아주 버려놓았단다. 전우치가 애국자가 되어 악당을 퇴치하는 사극이 되어버렸다는 건데 전우치의 본질은 도술장난이다. 도술은 게임이다. 전우치전의 묘미는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임금을 골탕먹이는 끝없는 장난에 있는데 뜬금없이 애국자가 되어 시련을 겪으며 나라를 구하는 드라마가 되어버렸다는 거다. 근데 도술과 애국은 너무 안 어울린다. 도술은 그야말로 못하는게 없는건데 주인공이 무인도에서 수련하는 설까치처럼 절치부심해서 온갖 고생끝에 악당을 퇴치하고 임금을 구한다면 너무 어색하지 않은가? 임금을 왜 구해? 임금을 혼내야지. 무엇인가? 전우치전의 드라마 작가는 부코스키의 게임에서 배워야 했다. 도술은 시트콤이다. 어떤 상황을 주고 그 상황에서 난관을 극복하며 하나씩 스테이지를 깨서 만렙을 채우는 게임이다. 어떤 닫힌 공간을 제시하고 거기서 어떻게 탈출하는가 하는 구조여야 한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대항행동과 그 시소구조에서 극적 긴장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성이 아니라 상대성이며 상대성이 두 번 반복되면 절대성이 얻어진다. 그 절대성을 제시하는 것이 부코스키의 깨달음이다. 부코스키는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는 이런 식으로 되갚아준다'는 대응논리 하나를 가지고 이차대전 전후의 미국 밑바닥 세계를 오디세이처럼 가로지른다. 그런데 그것이 반복되다보면 '네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나는 이렇게 한다'는 어떤 일관성이 획득된다. 그게 깨달음이다. 스타일이다. 캐릭터다. 상대성에서 절대성으로의 비약. 나는 '창의적인 거지에게는 만원을 준다'는 게임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부코스키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직장을 때려치는가 하면 그 반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분명한 게임의 규칙이 작동한다. 거기에 진정성이 있다. 결이 있다. 의미를 버리고 관계를 획득하기다. 부코스키는 돈이 아니라 그 공간의 구조에 관심이 있었던 거다. 전우치처럼 그 공간에서 끝없는 장난을 벌인 것이다. 거기서 스타일이 나와준다. 전우치의 도술이나, 필자에게 작업한 거지의 기술이나 부코스키의 되풀이되는 해고나 모두 어색한 공간이다. 어색할 때 전우치는 족자 속으로 숨어버린다. 필자가 거지에게 베푼 것은 자선이 아니라, 잠시나마 거지의 게임에 말려들어 함께 게임을 해버린 상황에서 그냥 도망치는 것이 어색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게임을 완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완전성의 미학 때문이다. 부코스키는 물론 그 어색한 장면을 술로 얼버무린다. 그 어색한 공간을 해결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결따라가면 된다. 결을 포착하라. 게임을 포착하라. 대칭구도를 포착하라. 부코스키의 너스레 중에는 성폭행과 같은 위험한 내용도 있다. 우체국 편에서 말이다. 그러나 게임이다. 필자는 어린시절 가끔 동생을 때렸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동생이 "나 때릴거지? 때릴거잖아? 때릴거면서." 하고 약올렸기 때문이다. 결국 때리게 된다. 동생은 "거 봐! 내 말이 맞았어. 역시 때리려고 그랬던 거야." 하고 의기양양해 한다. 게임이다. 동생이 이겼다. 그 여자가 이겼다. 치나스키가 졌다. 치나스키의 위험한 장면은 말하자면 게임의 심리가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부코스키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건 아니다. 아마 대부분은 동료 집배원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부코스키가 실제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믿는 독자가 있다면 순전한 머저리다. 그 게임에서 독자가 진 거다. 물론 부코스키의 수법을 간파한 정도만으로 팔리는 작가가 될 수는 없다. 부코스키는 일주일에 단편을 서너편씩 썼다고 한다. 어쨌든 부코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나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확신을 가진다. 단 일주일에 서너편을 쓸 에너지는 내게 없다. 사람과 사람이 어색하게 부딪힐 때 그 상황에서 게임의 구조를 면밀히 관찰하면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 부코스키는 수 없이 해고당했다. 그럴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그만큼 부딪혀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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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뒤집으면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상대성의 게임이 보이고 두 번 뒤집으면 '네가 어떻게 하든 나는 이렇게 한다'는 절대성의 게임이 보입니다. 모든 작품은 상대성의 게임 속에서 절대성의 게임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절대성의 게임을 찾으십시오. 갑이 될 수 있습니다. 게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권합니다.
http://gujoron.com/xe/?mid=Moon ∑ |
귤알갱이
금란초
깨달음의 글
차우
저도 귤알갱이님돠 같은 생각
어색한 상황의 구조를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어색한 상황의 구조를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오세
부처님은 그 어색함을 깨는 방법으로 염화미소를 시전. ㅋ
예수님은 그 어색함을 깨는 방법으로 포도주를 벌컥벌컥
소크라테스는 우선 상대방을 칭찬하는척하면서 어색함을 깨고, 또 상대방의 지를 무지로 깼지.
공자님은 어색함을 달래려 무려 시서예약을 꺼내들었지.
4대성인은 전부 알고보면 원조 부코스키.
차우
어제 모임을 하고 느낀건 전 작가는 안되겠다였습니다.
대신 다른 종류가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배운 것도 있고하니 한몫 두둑히 챙긴 기분입니다.
서울의 눈발이 아름답네요. 반가웠고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대신 다른 종류가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배운 것도 있고하니 한몫 두둑히 챙긴 기분입니다.
서울의 눈발이 아름답네요. 반가웠고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김동렬
번개처럼 다녀가는구료.
차우
넵^^ 팔잔가봅니다
김동렬
이름난 작가는 못 되어도 자신의 이야기는 만들 수 있어야 하오.
부코스키는 사실 굉장히 노력한 사람이오.
노력하지 않은척 하는 것은 깨달아야 할 본질이 따로 있기 때문이오.
중요한건 이야기를 만들어 스스로 작가가 되는것과
그것을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어 사회에서 집금하는 것은 별개란 것이오.
차우
집금의 뜻이 뭔가요?
김동렬
돈벌이 금벌이
차우
부코스키는 글을 쓰고 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면 되겠군요.
오늘도 구조론 글을 읽고 위안을 얻고 갑니다...아...오늘 정말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자다가도 하이킥을 할 처참한 경험을 했거든요...오늘 이 글이 없었더라면 회복 불가였을지도요...
"사람과 사람이 어색하게 부딪힐 때 그 상황에서 게임의 구조를 면밀히 관찰하면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
이 부분을 깊이 새기게 되네요.
어색하게 부딪힌 오늘의 일이
결국은 면밀히 관찰하지 않은 잘못에서 온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계기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