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없다. 그림자다.
성욕은 없다. 식욕도 없다. 권력욕도 없다.
욕망은 거품같고 환영같고 꿈같다.
욕망의 핵심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인들은 보통 그 바라는 정도에 따라 욕망의 실체성을 규정한다.
보라! 내 배가 창자에 들러붙을 지경이다! 이것이 식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보라! 내 좆이 꼴려서 천장을 뚫을 기세다! 이것이 성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보라! 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라면 5.16도 불가피하다고 말할수 있다! 이것이 권력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귀납이다.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보고 여기 그림자가 있다고 외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광원을 치우면 그림자는 사라진다. 그림자는 어디로 갔는가? 애당초 없었다. 빛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욕망이라고 입에 담는 것들은 원인이 아니다. 결과다.
그림자를 낳는 광원이 존재하듯, 욕망에도 근원이 존재한다. 온갖 이름의 잡다한 욕망을 낳는 자궁이 존재한다.
그 자궁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번뇌가 사라진다.
본진 털면 게임 끝나는 스타크래프트처럼, 욕망의 본진을 털어야 한다.
그래야 끝난다. 번뇌가 다하는 누진통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욕망의 본진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을 실체처럼 여겨선 결코 찾을 수 없다.
욕망을 낳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추상해야 한다.
욕망의 근원을 프로이트처럼 리비도라는 어떤 실체에서 찾으면 안된다. 엉터리 불교도처럼 전생의 업에서 찾아도 안된다. 기독교처럼 원죄 따위에서 찾아도 실격이다.
순수하게 추상할 수 있어야 한다. 잡다한 욕망을 관통하는 하나를 찾아야 한다.
그것을 찾았는가?
그것을 찾은자는 더 이상 욕망에 몸부림치지 않는다.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혹은 비굴한 표정으로 욕망을 탓하지 않는다.
어떠한 말도 고삐 하나로 제어하는 마부처럼 두려움없이 의연하게 욕망과 마주한다.
귀납이 아니라 연역이다.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
수원(水源)을 찾아 욕망의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귀납이 아니라
수원으로부터 욕망의 강으로 내려오는 연역이어야 한다.
출발점을 검룡소로 찍어야 한다. 한강에서 검룡소로 거슬러 올라가려면 개고생이다.
종교인들처럼 욕망으로부터 해탈로 거슬러올라가려면 피곤하다.
해탈로부터 욕망으로 내려와야 한다.
구조론에서는 무조건 탑다운이다. 다운탑은 안 쳐준다.
욕망도 마찬가지. 욕망의 상부구조를 먼저 찍고 그다음에 하부구조로 내려와야 한다.
욕망의 상부구조는 세상이다.
욕망은 당신이 세상과 맺는 관계로부터 유도된다.
식욕은 당신이 생태계와 맺는 관계로부터 유도된다.
성욕은 당신이 이성과 맺는 관계로부터 유도된다.
권력욕은 당신이 공동체와 맺는 관계로부터 유도된다.
재물욕은 당신이 시장과 맺는 관계로부터 유도된다.
욕망의 자궁이 있다면 그것은 관계 그 자체이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맺고 있는 일체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구조론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구조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외부로 노출되어서 자기 존재의 절반을 바깥에 의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 환경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렇게 외부 환경과 관계를 맺어야 포지션을 얻는다. 일단 축구장에 들어가야 공격수와 수비수의 포지션을 얻는다. 일단 시장에 들어가야 장사꾼과 구매자의 포지션을 얻는다. 일단 숲에 들어가야 사냥꾼과 먹이감의 포지션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포지션이 있어야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외부 환경과 주고 받는 것이 가능해진다.
욕망은 바로 이 상호작용을 부추기는 신호이다. 우리가 외부 환경과 어떤 형태로도 좋으니 무엇이 되었든 일단 관계를 맺으라고 마구 부추기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즉, 욕망은 "관계하라!"는 명령이다.
상호작용의 결과 외부환경과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만족스럽다면 욕망이 사라지고, 반대의 경우에는 욕망이 계속 남아서 목소리를 높인다. 자꾸 상호작용하라고 부추긴다. 예를 들어, 먹이를 잡아서 내 뱃속으로 넣었다면 식욕은 그 순간 사라진다. 이성을 유혹해 내 몸 안에 받아들였다면 성욕은 그 순간 사라진다. 공동체 중심으로 깊숙이 들어가 리더가 되었다면 권력욕도 사라진다. 그렇게 욕망은 해소된다. 하지만 배를 채우지 못한다면, 이성과 성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중심에 서지 못한다면 욕망은 계속 당신을 호르몬으로 자극한다. 언제까지? 될 때까지!
이를 마음의 구조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신: 구조적 불완전함으로 인한 외부 환경과의 관계맺기 >> 의도: 관계 속에서의 포지셔닝 >> 행동: 외부 환경과의 구체적인 상호작용(욕망은 이 구체적 상호작용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발생, 호르몬으로 자극해서 과정을 다시 반복하게 만듦)
신체를 유지하려면 생태계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냥꾼이되어 사냥을 하던지, 유목민이라는 포지션에서 목축을 하던지, 혹은 농부라는 포지션에서 농사를 짓던지, 아무튼 생태계와의 관계에서 능동적인 포지션에 서서 먹는 자, 포식자가 되어야 신체를 유지한다. 식욕은 생태계와의 관계에서 포식자라는 포지션에서 포식 대상과 상호작용을 할 때 유도되는 것이다.
사자를 보고 식욕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호랑이를 보고도 식욕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아마 당신에게 총이 없다면, 사자나 호랑이를 제압할 수단이 없다면, 미칠듯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사자와 호랑이가 포식자이고 당신은 포식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를 보고는 식욕을 느낄 수 있다, 닭을 보고는 배고픔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소와 닭과는 포식자의 포지션에 서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사자와 호랑이와는 그 반대의 경우이고.
식욕은 또한 문화라는 상부구조와의 관계를 통해서 유도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은 길가에 쑥을 보고 쑥떡이나 부침개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지만 미국인에게 쑥은 그냥 잡초에 불과하다. 각 공동체가 환경과 맺은 관계는 공동체의 문화를 통해 정형화되어 전수되며 이렇게 정형화된 관계는 우리의 식욕을 대부분 좌지우지한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얼마든지 다시 맺을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의 관계를 재설정하거나 다른 공동체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 식욕도 변화한다.
미국인이 한국 문화와 관계를 깊숙이 맺는다면 로버트 할리처럼 김치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김치를 보고 침을 줄줄 흘릴 수 있다.한국인도 미국 문화와의 관계를 깊숙이 맺는다면, 예전엔 느끼해서 못먹었던 치즈가 줄줄 흐르는 소고기버거를 게눈 감추듯 먹을 수 있다.
이처럼 식욕은 우리가 어떤 생태계와, 혹은 어떤 공동체 문화와 관계 맺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식욕은 우리 안에 새겨진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바깥 환경과 맺고 있는 관계의 반영이다.
모든 식욕은 관계의 산물이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을 유지하려면 인간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해야 한다. 그 속에서 지기의 포지션을 찾아야 한다. 웃기 울기 화내기 어르기 달래기 짜증내기 등 온갖 방식으로 상호작용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성을 유지한다. 홀로 고립되면 웃을 일도 없고 울 일도 없고 짜증낼 일도 없다. 어색하다. 그렇게 표정이 사라지고 바디랭귀지가 사라지고 말이 사라진다. 인간성 상실이다. 그래서 인간은 극도의 고립싱태에서 환상이라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환상과 말을 주고받고 화도내고 소리도 지른다. 그래야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지성을 유지하려면 지성인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해야 한다. 독서, 교육, 글쓰기 등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성의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야 지성이 유지된다.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다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관계망 속에 없으면 인간이 안 된다.
늑대인간 빅토르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한 마리 늑대로서 외부환경과 맺은 관계를 끝끝내 버리지 못했다. 교화와 교육이 결국 먹히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지속적으로 인간 관계망에 노출되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다. 타고난 인간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퀴벌레 공동체 속에 집어넣으면 인간은 한 마리 바퀴벌레가 된다. 공동체라는 자궁없이는 인간이라는 존재도 없는 것이다.
혹자는 인간이 성욕을 타고난 것처럼 말한다.
온갖 이름의 성욕들을 나열한다. 그것들이 마치 원소처럼 인간 안에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이성애, 동성애,소아성애, 네크로필리아(시체성애), 페티쉬(특정 물건에 대해 성적 욕망을 강하게 느낌, 예를 들면 팬티) 등 일반적인 성욕에서 변태적인 성욕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졸라 다양하다. 하지만 아무리 나열해도 끝나지 않는다. 매년 새로운 성욕이 보고될 지경이다.그러나 성적 욕망의 이름을 잡다하게 열거할 필요 없다. 전부 외부 환경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요즘 문제가 되는 아동성애가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이를 어떤 극소수의 특정인에게 있는 성향으로 간주한다. 그 사람 안에 있는 '나쁜 피'처럼 간주한다. 그것이 입자처럼, 알갱이처럼 단단하게 한 사람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에 따라 주장한다. "그런 놈들은 거세해야 해!" "그런 놈들은 싸그리 죽여야 해!" 그렇게 없애고 죽이면 나쁜 피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없애고 죽이면 나쁜 성향을 가진 존재가 사라지고 그러면 아동성애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리석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든 욕망에는 자궁이 있다. 그리고 그 자궁은 우리가 환경과 맺고 있는 관계이다.
원래 아동성애라는 욕망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실체처럼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없는 건 없는 거다. 우리가 아동성애라고 부르는 것은 성적 에너지의 잘못된 표현이다. 거기엔 권력의 문제가 명백히 개입해 있고 이성과의 대등한 관계 맺기의 실패가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관계 맺기의 결과이다.
한 개인이 어려서 어른들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하고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상태에서, 아이와 어른이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잘못) 학습하고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였다면,
커서는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과 신체적, 정서적, 심리역학적으로 대등한 혹은 우월한 관계를 맺지 못하였다면,
그리고 아동성애를 포함한 아동학대에 관대한 공동체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그 개인은 아동성애를 나타낼 확률이 높아진다.
그것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총체적인 관계의 문제가 아동성애로 나타난 것이다.
이 중 하나의 관계만 현저히 개선되어도 아동성애를 막을 확률이 높아진다.
개인이 어려서 당한 성적 학대에 대해 이후 이에 대한 철저한 심리치료를 행하고 그로부터 완벽히 보호하면,
성인이 되어서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과 대등한 성적, 정서적, 지적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그리고 아동성애를 포함한 아동학대에 대해 매우 엄격한 불관용의 태도를 취하는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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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성애라는 욕망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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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란 그런 것이다.
근본적으로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서 유도되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생태계와, 이성과,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라고 자꾸 신호를 보내는 것이 욕망이다. 욕망은 파란불이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관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라고 신호한다. 식욕이라는 신호를 통해 성욕이라는 신호를 통해, 권력욕이라는 신호를 통해 우리를 생태계 속으로, 이성 속으로 공동체 속으로 유인한다. 자꾸 오라 손짓한다.
그 손짓을 따라야 한다. 욕망을 긍정해야 한다. 그것이 그림자임을 긍정해야 한다. 그리고 빛으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당신의 빛,유일한 욕망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단 하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구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관계가 아니라 미학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외부 환경과 최선의, 최적의, 최고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그것이 우리의 유일무이한 욕망이다. 모든 욕망은 그로부터 나왔고, 또 그로 수렴된다.
궁극적으로 식욕도, 성욕도, 권력욕도 최선의, 최적의, 최고의 관계를 맺겠다는 욕망으로 수렴된다.
그것을 그림 한 폭으로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옛 사람들처럼 지옥에서 천국까지, 즉 낮은 욕망에서 높은 욕망까지 하나의 화폭에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이 그림이 유치하다면 서원아집도도 괜찮다. 선사들의 퍼포먼스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아니면 하루에 떠오르는 그 모든 욕망들을 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들이 전부 한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으면 된다. 잡다한 욕망들이 결국 이 세상 전체와 통째로 멋진 관계를 맺기 위함임을 깨달으면 마치 거품처럼, 환상처럼, 꿈처럼 욕망은 사라진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장1~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