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화가 중 가장 많이 거래된 작가라고 하는데
이우환 화백의 이 그림이 비싼 이유는 무엇이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무엇이오?
잼있는 해설인데
과연 찍어야 할 장소에 찍었을까요?
제가 보기엔 그냥 지 꼴리는대로 찍은거 같은데
점을 아무데나 찍으면 어떻소?
이 그림 안에 17억의 가치가 있다는건 좀 황당한 생각 아니오?
저는 300원을 지불할 용의가 있소이다만.
인생을 통털어 하나의 점을 찍는다?
좋은 표현인데 제가 알기로 이우환 화백은 이곳저곳 아무데나 점 찍고 다니는 양반인데.
하여간 내가 그곳에 점을 찍으면 실패
내가 찍은 곳이 우주의 그곳이었다면 성공.
우주가 스스로 점을 내지 설마 내가 자의로 점을 찍겠소?
설마 그럴 리가.
급소를 찍었다는 표현은 좋소.
근데 누구의 급소냐고요.
종이위에 점이 있는 게 아니라 꽉찬 공간속 일부를 점으로 지운것 아닐까요?
점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백이 '실제'함을 보여주기위해
점은 어디까지나 여백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그린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나와 타인이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아니라
아무것도아닌 이라는 이름이 붙은 "관계"과 실재함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습니다.
인상주의가 작가 내면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면,
이 그림은 작가 외부의 세계가 존재함을
독자와의 관계가 실재함을 여백으로 보여주려고 한것이 아닌지..
유령같이 구조론게시판을 눈팅하지만,
그 관계도 실제함을, 서로 상호작용하며 서로의 영향을 미침을 보여주는 것 처럼요.
한번 찍어봤습니다. 질입자힘운동량은 잘 모르겠내요.
작품의 제목이 조응이라면, 조응은 존재와 존재가 관계속에서 만나는 것.
p.s) 정반대로 다 칠한다음에 귀퉁이에 작은 여백하나를
남기고 제목은 엇갈림이라 칭하면 어떨까요?
역발상의 시각은 좋소이다만
조금 더 사유의 범위를 넓혀보기요.
이왕 뒤집은거 통크게 한 번 더 뒤집어봄이 어떻소?
뭔가 보여주려들면 이미 그림이 아니고 텍스트이므로 아웃이잖소.
작가는 내면의 흘러넘침을 연출할 뿐 보여주지 않고
보여주어도 안 되오.
고전주의 그림을 보면, 형식과 비례의 아름다음을 볼수있고,
낭만주의 그림은, 인간내면의 강렬함과 역동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독자와 화가가 같은 지점에서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그림자체가 ' 무엇인가' 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와 화가가 같은 지점에 서 있고,
조응의 경우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하고,
그러한 궁금증으로써, 화가에게 묻게 하려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순간 그림을 사이에 두고 화가와 독자가 대치하게 되는 긴장.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
화가가 그리려고 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써 깨닫게 되는 화가와 독자의 만남.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키면 손가락만 보니까
아예 손가락을 지워버리는 것.
그니까 무엇이 만인에게 붓을 들고 싶게끔 했느냐고요.
캔버스와 물감의 만남
작가와 관객의 만남
만남에 의해 관계는 명확해집니다.
관계항은 관계속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밤하늘의 별들은 개별적으로 있지만
별과 별의 사이를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하면 별자리가 되듯
별과 별을 이어주는 실은 별을 더욱 명확하게 해줍니다.
날이 밝으면 별은 사라지지만 별자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값? 물건의 가격을 시장이 결정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소리고
평론가들이 결정합니다. 평론가들이 그림에서 어떤 희소성(질서)을 찾아낸 것이겠지요.
아무나 점찍는다고 다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대체로 비싼 그림들을 보면 어떤 강렬함이 느껴지는데
그 강렬함이란 대비의 효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비란 만남이며, 이질적인 대상끼리의 충돌이 강렬한 에너지를 만들어 냅니다.
대략 좋소이다만
조금 더 시야를 넓혀보기요.
그림을 두고 그림을 이야기하면 이미 실패가 아닐까요?
오세님 설명의 화폭의 '급소, 황금분할' 지점에 즉 우주 자연 인생의 급소에 캔버스의 결, 물감의 결, 붓의 결, 작가의 마음의결을 그대로 살려내어 그은 한 획이기때문에 비싼것 같으오. 질- 작가의 마음/ 입자-작가의 작업장/힘-작업대위에서 균형잡기/ 운동-획긋기/량- 세모시 자국; 이건 한국미의 발산으로 보오.
여전히 입자 수준에 머물러 있소.
시야를 넓혀 보기요.
이 문제 또한 어렵습니다.
답을 내놓기가 몹시 조심스럽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에는 맥락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그림 또한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닐 것 입니다.
이 그림은 이우환 화백 일생의 한 부분이고
그의 일생은 그 자신의 예술관, 철학에 따라 움직여 왔을 것 입니다.
그의 철학에는 원류가 있을 것이며
그 원류는 인류 지성의 발전 과정과 맞닿아 있을 것 입니다.
이우환 화백의 이 작품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우환 화백이 일생을 통해 추구하려고 했던 스타일의 정점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 스타일의 정점은 바로 그의 철학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숙한 철학은 이우환 화백 자신만의 것이 아니고
이 시대 지식인 집단이 추구하는 것과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을 것 입니다.
또한 그들의 추구는 인류 지성사의 발전 과정의 한 부분일 것 입니다.
즉 이 그림에는
1) 그림
2) 그림을 그린 화가가 일생을 통해 추구해 온 스타일
3) 화가가 일관된 스타일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자신의 철학
4) 지식인 집단이 공유하는 사상
5) 인류의 정신 문명 발전 과정
이라는 층차가 존재한다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처음은 좋았는데 갈수록 나빠졌소.
스타일의 정점에 서 있을 리가 없잖소.
설마 그럴 리가.
완숙한 경지일 리가 없잖소.
그건 인상주의가 경멸하는 아카데미즘이오.
맥락, 원류, 지성, 발전과정, 정신문명은 좋았소.
지구촌 인류가 하나의 그림이라면
화룡점정은 어디에?
뭐 이런 시각은 좋소.
그런데 완숙, 정점 이건 좋지 않소.
좋은게 좋을 리가 없잖소.
설마 그럴 리가.
관계를 표현한 그림이 아닐까요
그니까 관객과 작가가 어떻게 만났는지를 말하시라고요.
이건 그냥 이거 혹시 그림이 아닐까요 하는 것과 뭐가 다르오?
뭐 그림 맞소. 만남 맞고요. 근데 그게 뭐냐고요.
처음 보는 그림, 순간 나도 몰래 깜짝 놀랐음.(전율, 그 자체! 뭔가 세차게 지나가는 느낌이었음)
그대로 빗소리, 그대로 빗줄기,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 몸이 촉촉하게 젖어버린듯한 느낌.
머릿속 빗소리(소리공명)!^^
해가 뜨는 개운함까지.....
그냥 느낀대로 적어 봅니다.
인위적으로 느낌을 짜맞춘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오.
그냥 종이에 점 하나 찍은 건데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물일 뿐.
뭔가 느껴야만 좋은 그림일 리가 없잖소.
그림이 그림일 리가 없잖소.
좋은 그림에 좋은 감흥이 있을 리가 없잖소.
박물관 견학만큼 짜증나는 수업이 없잖소.
명화감상만큼 하품나는 시간때우기가 없잖소.
EBS 누가 본답니까?
이게 솔직한 거 아니오?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94271
리플을 보면 한국인이 얼마나 수준 낮은 자들인지 알 수 있소.
좀 안다는 오유의 수준이 이러니 박근혜가 일진 먹어도 전혀 이상할게 없소.
그림 속에 붓이 고스란히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세상 속에도 그림이 고스란히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그림의 가치는 당연히 그림 안에는 없소.
저 그림 그리는데 든 물감 재료랑 캔버스 값 다 합쳐도 얼마 안 할거요.
중요한 것은 저 그림이 관객의 급소를 찔렀다는 것이오.
남들은 졸라 소나기펀치를 날리면서 체력 다 낭비하고 상대를 제압할 때,
이우환 화백은 원샷원킬의 정신으로, 점 하나로 제압하고 있다는 것.
뻔뻔하게도 점 하나 찍어놓고 조율을 마쳤다고 큰 소리 치고 있다는 것.
그게 가능한 건, 다 강남 스타일 덕분이오.
이젠 인터넷 망망대해에 강남스타일 점하나 찍어도 10억명이 말춤을 추는 시대가 되었소.
그래서 이우환 화백도 점 하나 대충 찍고(고민을 몇 시간 했다는데, 그건 다 그냥 하는 소리고) 내가 지금 우주를 조율했지롱 하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오.
이제 급소 하나만 제대로 찍어도 신을 KO 시킬 수 있다는 것.
점 하나만 제대로 찍어도 60억 인류를 들었다 놓을 수 있다는 것.
그걸 보여주는 시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가격을 매겨 놓은 것 아니겠소?
그림값은 화상들이 값을 그렇게 매겨놔서 그렇고
화상들은 그림값이 비싸야 지들도 밥먹고 살테니 그렇고
한국출신으로 제일 잘나간다는 이우환이 고작 17억
(에구 쪽팔려, 난 또 170억인줄 알고 잠시 눈뜰뻔)
이면 어디 가서 명함 내밀 처지는 아닌거고.
점이야 이우환만 찍은게 아니고 개나 소나 다 한번씩 찍어봤을테고
그나마 이우환이 근사치로 화룡점정을 했다면
그 용은 어디에 사는 무슨 용이냐가 질문이지 않겠소?
우리가 어떻게 용을 키울 것인가 하는게 질문이 아니겠소?
그 용이 한류용일리야 당연히 없는거고.
일단 그림으로만 말하자면 짧고굵은게 딱 기분나쁘게 생겼습니다.^^
화백의 다른 그림을 찾아보니 몇십년간 일관되게 사각붓으로 그렸는데
온갖 공간과 모양을 실험하다가
형태와 의미를 모조리 지우고 달랑 붓 한자루를 남겼으니..
화백은 그림을 그린게 아니라 지워온 것이고
결국 이 그림처럼 붓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찡~ 합니다. ㅎㅎ
수십년간 수만명의 가슴을 먹먹하게 찡하게 만들었을테니그 값은 환산불가.
설마 그럴 리가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94271
리플을 보시면 알겠지만 수만명이 씨바와 조까를 날리고 있습니다.
물론 씨바와 조까비가 가장 비싸죠.^^
최악이오.
여긴 왜 왔소?
그런 식으로 개념없이 말하는 사람이
인류의 99퍼센트긴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모였잖소?
헉... 제가 점을 잘못 찍었군요.
조응하지 못한 제가 부끄럽습니다.
현대미술이란 뭐냐, 그림이란 뭐냐, 그려진 부분과 여백이란 뭐냐, 인생과 우주도 사건과 여백으로 나눌수 있느냐 등등.
그리고 점으로 보이지 않던데요. 점과 선과 밀도, 운동감이 가득차있지 않나요. 붓질은 한번이었지먼 마음에 든 붓자욱을 만들때까진 수천번 해보지 않았을까요.
그림값이 17억밖에 안한다는건 놀랍고 부끄럽고. 돈만 있으면 사두고 싶네요. 투자 대비 효과가 어떤 상품(?)보다 나아보입니다.
질, 입자... 잘 모르겠습니다. 내년부터, 열심히 공부해봐야겠다 다짐!!
그림이 좋다?
과연 그림이 좋을까요?
과연 그림이 좋아야 하는 걸까요?
가장 불쾌한 해설은 수천 수만번의 연습 끝에,
각고의 노력 끝에 이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해설하는 거.
만약 그렇다면 300원도 비싸지 않을까요?
차라리 컴퓨터에게 그리게 하지 왜 그런 수고를?
혹시 바본가?
그냥 떵 싸듯이 한번 내갈겨봤는데
우연히 잘 빠졌다, 그래서 하나 건졌다고 해야 더 멋있지 않을까요?
열심히 하면 빵점.. 구조론 사이트의 규칙.
열심히 하는건 아카데미즘이지 인상주의가 아니오.
인상주의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며 그냥 길에서 줍는거요.
예술이 예술인 이유는 인간을 일 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오.
노력은 컴퓨터에게 놀이는 인간에게.
만약 노력해서 얻었다면 그 사실을 비밀에 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점 하나 찍은(선 하나 그은?) 건데 점 선 면 입체가 다 들어 있긴 하네요. (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17억! 이건 납득이 안 되고.
"17억"이 운운되는 건 누군가 그 가격을 지불했거나 지불의사를 표명했다는 의미겠는데
제 경우엔 주식가격의 변동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주식 시장에서의 모든 거래행위는 제각기 개별적 사건으로
현재의 가격이 그 이전 가격에 영향을 받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딱히 없음에도,
종가, 호가, 거래량 등등이 임의로 가치판단의 준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경우도 17억이라는 임의의 호가가 제시되었고
누군가가 거기에 호응함으로써 가격이 형성되었다. 일단 이렇게 보는데, 호응한 이유는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100억짜리가 되리라 믿었을 수도 있고 작가에 대한 경애가 넘쳐 17억쯤 생계보조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 탄생하자마자 '가치'보다 '가격'으로 주목받은 예술품의 운명이 그렇게 복 받았다고 볼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있습니다.
그림 이야기에 그림 이야기로 대답하면 곤란하지요.
대한민국의 대표가격이 고작 똥값 17억이란 생각은 못해봤습니까?
그림들 자체의 소실점.
모래시계를 거치듯 모든 그림들은 한점을 통과해야 함.
그림 자체들의 흐름도 그 소실점을 통과하고 있는 중...
그렇다면 세계 예술의 변방국가의 하나인 한국작가의 그림이 알려져간다는 것은 현대 그림이 더이상 에너지가 없다는 뜻. 즉 이 말은 다시 역으로 에너지가 변방에 모여 있다는 뜻.
외부에서 중심을 타격해야 한다는 뜻. 그 타격을 받고 싶은 것은 예술 그 자체.
언뜻보니 그림 자체에서도 이 그림에서 저 위치가 안정감이 있으나 다른 그림들은 또 중앙에 있거나 다른 위치들이기도 하여...존재의 생겨남. 무수한 위치들 속...에서 무작위로 생겨남. 이라는 생각도 들고....
예전 양철통으로 만든 쓰레기통으로도 보이고, 물어보니 연탄으로 보인다고도 하고... 이는 막간의 양념을 붙여본 것이오.
그림에서 뭔가를 보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잖소.
그래봤자 그림일 뿐인데.
점으로 우주가 통째로 들어가 있고
점에서 우주가 펼쳐지오.
우주를 구겨 넣을 대상을 찾은 것이 점이오.
어느 시인이 노랑꽃 화분에 우주를 담은 것처럼.
우주값이 오르는 만큼 그림값은 더 오르겠구려.
계속 안 좋다가 막판에 건졌구려.
그림값이 우주값이라는 표현이 절창이요.
득의작이요.
점으로 우주가 들어가는 개고생 따위를 할 리가 없잖소.
점에서 우주가 나올 리가 없잖소.
집어넣느라 개고생하는게 아니고
우주를 표현하고 싶은데
우주와 나의 관계를 표현하고 싶은데
우주를 다 펼쳐보일 수는 없고
압축하여 하나로 나타낸다면 뭐여야 할까 하다가
돌도 두어 보고
쇠도 두어 보다가
폼이 안나니까
캔바스에 점 하나 찍은 것 아니겠소.
여기 붓하나 쥐어 줄테니
니가 그려라.
난 시키는 데로 하기 싫다.
사람마다 다를리가 없잖소.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의 입장 차이는 있겠소이다만.
눈감고 보는 사람들이 봤다고 우기는게 문제.
그림을 보고
비로소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면 이미 좋지 않소.
생각은 평소에 해서 머리 속에 쌓아 두는 거고
그림을 보고 '그래 이거야. 내가 노상 말하던 그거' 해야 맞죠.
그런 반응은 1초 안에 나와야 좋고
자본주의 나오면 대략 황이고
(자본주의 나오면 0점 처리하면 대략 맞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나)
화가의 손을 빌린 신의 작품이라는 표현은 좋은데
역시 그것이 그림에 표현되었다고 본다면 대략 좋지 않소.
더 좋은게 없으니까 대략 이걸로 땜방하는 거지 뭐.
어쨌든 포지션은 채워야 하니까.
땜방이 안되네요.^^;
고흐이후 현재까지 모든화가들이 고흐를 카피해서이고 고흐의 와 세잔의 설계대로 현대회화가
진행중이기때문이다.
또한 그시대 프랑스 파리가 지구에서 짱먹고 있던시대이기도하다
이우환 의 그림은 지구에서 현재우리의 값이다
세계인의 관심과 우리의 접점에 이그림이있다
본래 예술의역활이 너와나 사이의 접점찾기이기때문에 이우환의 그림을통해 그지점을 모색하려는것이다.이우환은 운이좋은것이나,
동렬샘 말씀처럼 아직 동시대 잘나가던 파리와 뉴욕화가들보다 저렴한갓같습니다,
아직 우리는 갈길이 멀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구조론접한지올해 9년째인데 머리가 나빠 진척이더딥니다. 그래도 하루에한번은 오는 꾸준눈팅입니다.
그림값은 부자들이 정하는데
한국의 그림값은(정확히는 재일동포지만) 한국의 국격을 나타내는 바
한국 부자의 수준이 한국의 국격이라면
대한민국의 가격은 대한민국에서 최고부자인 자의 기준으로 볼 때
최고부자는 이건희니까 이건희 몸값이 17억으로 견적이 나온거죠.
17억 모아서 건희를 사버리는게 어떨까 연구중.
그림은 개인이 사서 거실에 걸어놓는게 아니오.
그건 호랑이 담배먹는 시절 이야기고 지금은 집단지성을 나타내는 것이오.
지금은 그림을 거실에 걸어놓는게 아니라 일종의 퍼포먼스이고
센세이션을 일으켜 구성원 모두에게 전달시키는 소통의 역할을 하오.
그림값이 높다는건 소통값이 높다는 거고
그림값이 낮다는건 소통값이 낮다는 거고.
저 그림을 보고 떠오르는 느낌은
기타리스트에겐 한번의 스윙
피아니스트에겐 한번의 건반 스트로크
컴퓨터 프로그래머에겐 한줄의 코드
우주에겐 한번의 빅뱅
화가에겐 한번의 붓질
질 - 에너지
입자- 캔바스+화백+기타
힘- 캔바스와 붓의 만남
운동- 붓질
양- 작품
이 그림이 비싼 이유는?
태초의 근원을 연상 시킴
다 좋은데 마지막 줄이 안 좋소.
태초의 근원을 연상할 리가 없잖소.
연상할 이유도 없고.
다른 그림도 다 태초를 연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고.
빼도 박도 못하는 철저한 직시,
다른 데 다 돌아봐도 피할 수 없는..
뚜렷한 한번의 획, 점, 그 속을 채우는 작은 직선들..
처음에 쓰레기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더럽고 하찮은 것 하나가 내 눈을 끄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쩝.
우주가 다 그림인데 저 작은 그림에 눈길을 줄것 까지야.
그림으로 시선이 자꾸 가고 맙니다.
팽팽한 네트에 공을 던지면 네트가 출렁입니다.
공이 닿는 지점에서부터 일제히 그 충격은 퍼집니다.
물건이든 그 어떤 것이든
에너지가 지나간 흔적인 것이고
신이 그렇게 거기에 잠시나마 머물렀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신의 흔적, 입김, 발자국...
그림에 시선이 가면 좋지 않소.
진리에 시선이 가야 하지 않겠소?
그것은 신이 모든 것을 만든 원리를 표현하는 것
신의 관점
모든 것의 시작점
여전히 그림에 붙잡혀 있구료.
이제 그만 자신을 해방하는게 어떻소?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책을 쓰면 됩니다 생각을 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에 그림은 이미 적합하지 않습니다
한 점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는 것 사실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림에 뜻이 없을 리가 없잖소.
그림 안에는 뜻이 없지만 자연의 진리가 그림에 들어오기까지 왜 뜻이 없겠소?
만인의 시선을 한 지점에 어떻게 모았느냐가 질문이 아니겠소?
점 하나 찍어 붓과 캔버스가 만나고
작가와 관객이 만나고
인간과 신이 만나고 있소.
점은 접촉점이고 접촉점은 서로 다른 둘이 공유하는 토대이고 운명이오.
그 지점에 밀도가 걸려 있소.
뭐든 예술은 밀도를 드러내는 것이오. 단 한 점에 걸려 있는 강렬한 에너지를 표현하는 것이오.
키스로 마주친 두 입술에 사랑이 걸려 있고,
접촉사고로 마주친 두 차량에 트래픽이 걸려 있듯이.
누군가 찍은 점 하나로 이렇게 동렬님과 구조론 식구들도 만나고 있소.
그 만남은 계속되어야 하오. 마침내 신과 키스할 때까지.
그림값은 인플레이션이오.
1원이 10억되고 10억이 10조되고, 그 10조가 우주값이 되는 것이오.
작품 한 점에 걸린 상호작용의 밀도만큼이 그림값이 되는 것이오.
그림으로 한 명을 모으면 1원인거고, 이우환 화백만큼 모으면 17억 고흐만큼 모으면 1000억대.
만인의 시선을 모으는 방법은 간단하오.
서로 다른 둘을 충돌시키면 되는 것이오. 점찍는 건 충돌의 방법 중 하나일 뿐인거고.
중요한 것은 충돌의 크기만큼, 사고의 여파만큼, 그 에너지만큼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오
한반도로 세계를 들이박는다면, 저 그림값은 아마 최고가를 경신할 것이오.
나아가 그림 한 점으로 신과 박치기한다면, 그 그림값이 곧 우주값이 될 것이오.
퍼포먼스에서 힌트를 얻자면
평론가 낚는 그림
수준 이하는 오지마라
점은 무대며 공유의 토대
그림이 걸리는 공간을 공유하는 자들을 관객으로 삼음.
뉴요커가 보면 그들 뉴요커의 가격이 있을 것이고
한국의 저렴한 네티즌의 가격은 똥값.
그 가격만큼 신과 대화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알수 없는 위치의 점 하나로 최대의 집중을 얻어 최대의 대화를 이끌어 내고자 함.
작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많은 그림들 중에 하나일 뿐.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는 거지 특별한 의도가 있겠소?
작가는 삶의 어느 순간에 물감을 묻힌 붓을 들고 저 지점에 있습니다.
전 우주가 작가가 살아오고 쌓아온 깜냥만큼 쏟아져 나옵니다.
그 그릇의 크기와 모양을 본 사람이 값을 매겨봅니다.
느낀대로 솔직히 적어보려했습니다.
왜 느낌이 필요한지 모르겠소?
그림이 느끼는 거였소? 처음 듣는 학설이오.
자기 포지션을 느끼는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어떤 낯선 것을 포착한다면 대개 자신과의 인연을 들먹이면서 아는체 하지 않소?
명박이라면 - 내가 이거 해봐서 아는데
보통정치인 - 사실은 나도 이 지역 연고가 있는데
박근혜꼬봉 - 36촌 후손되는 손자뻘인데
차를 한잔 마시고 맛있네 하면 - 하수
음 이 차가 중국에서 건너온 차구먼 - 중수
차 달이기 좋은 분위기구먼 - 고수
대개 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들먹이는 걸로 인사를 삼지 않소?
바깥 쪽을 볼수록 고수
하수도 제대로 못되는데 고수 흉내는 어불성설이겠지요.
우선 그림을 느꼈다기 보다는 저 점을 찍는 순간의 화가의 마음을 느껴보려 한 것이었습니다.
인연을 들먹인다 말씀하시니 떠오르는건 서예입니다.
서예에서 다음획이 앞의 획을 보완해주고 앞의 글자를 뒤의 글자가 균형잡아주는 부분이 있는데
종이와 종이에서 확장되는 우주를 한 점으로 균형잡아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동렬님, 부족함을 채우기위한 구조론 책 읽기의 순서에 대한 가이드가 있을런지 여쭤도 될런지요?
저도 답을 모르겠습니다. 그냥 감상 몇 마디 남겨 봅니다.
점 하나 찍었을 뿐인데
잔이 어디엔가 놓여 있는 느낌입니다. 점 하나인데 보면 긴장감이 듭니다.
저 그림은 점을 하나 찍었는데 저절로 선이 보이고 저절로 각이 보이고 저절로 입체가 보이고 저절로 밀도가 보이게 합니다.
점 하나로 최상층 구조까지 한 달음에 올라가 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저 화가에게 붓을 빼앗아서 저도 점 하나 찍어 보고 싶어지는데,
저 화가가 다른 모든 사람의 점 찍을 기회를 다 앗아가 버렸네요.
예술가에게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젊은 피카소 - 어두운 그림을 그립니다.
젊은 고흐 - 어두운 그림을 그립니다.
젊은 이외수 - 어두운 소설을 씁니다.
성년 피카소 - 밝은 그림을 그립니다.
성년 고흐 - 밝은 그림을 그립니다.
성년 이외수 - 밝은 소설을 씁니다.
장년 피카소 - 묵직한 그림을 그립니다.
장년 추사 - 묵직한 글씨를 씁니다.
장년 이외수 - 묵직한 소설을 씁니다.
노년 피카소 - 유머러스하고 은유적인 그림을 그립니다.
노년 추사 - 유머있고 은유적인 글씨를 씁니다.
노년 이외수 - 유머있고 은유적인 소설을 씁니다.
말년 피카소 - 애들 그림을 그립니다.
말년 추사 - 애들 글씨를 씁니다.
말년 이외수 - 애들과 놉니다.
저 그림을 보면 대략 나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묵직한 느낌을 받아서 저 화가가 아직 장년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냅다 달려가서 점 한 번 찍었다가 냅다 뒤통수를 맞을 것 같은 묵직함입니다.
김동렬님께서 보시는 저 작가의 나이는 어느 정도입니까?
뭐 이게 딱 맞는 공식은 아니지만
대략 눈치로 때려잡자면 40대 후반이나
50대는 되어야 나오는 액션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저 그림을 그리는 나이 말이지요.
감사합니다.
추사체의 훌훌 털어버린 가벼움도 좋지만, 아직까지는 묵직한 게 더 좋은 거 보니 저도 아직은 젊은가 봅니다.
저한테 이 그림은 '100원'의 가치도 없습니다.
제가 수준이 낮아서든 아니든 그게 사실입니다.
그 증거로 이 글과 덧글을 읽으면서 딴 사람의 설명을 보면서
'어 그런가' 하면서 자꾸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즉 '1초'만에 반응이 와야 하는데 저 단순한 그림조차 기억에 정확히
남지 않아서 글을 보면서 자꾸 그림을 되풀이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확인하기 위해서)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그 그림의 정확한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위 덧글중 가장 비공감하는 부분은
"수십년간 수만명의 가슴을 먹먹하게 찡하게 만들었을테니그 값은 환산불가"
-> 어느 분의 이 덧글입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옆에 이 그림을 깔아놓고 있었더라도 과연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요? 이우환이라는 이름 지우고(누구 말대로 계급장떼고)
보여주었어도 척 보고 1초만에 '아 가슴이 먹먹하고 찡하다'라고 느껴졌을까요?
그래서 저는 '100원'은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300원은 너무 비싸요.
찾아보니 이 양반 1936년생이고 2009년도 작품이니 74세에 발표한 그림이네요.
그림의 구상은 50대에 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나이가 상당히 들어야 나오는
그림인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림에 겉멋이 안들어갔으니.
길가다 이 그림과 1만원짜리 지폐가 있으면 저는 1만원 먼저 줍습니다.
누군가 17억에 산다고 17억 가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무작위로 100명 불러다가 '이 그림 얼마에 사겠소?"(물론 누구
그림인지 안갈켜주고) 하고 물었을때 부르는 값의 평균이 그 그림의 '진짜가치'
라고 보여집니다.
17억이란 '그림의 가치' + '부자의 생색가치' + '이우환이란 이름이 주는 가치'
그리고 '희소성의 가치'(세상의 단 하나뿐인 그림이므로) 이지 그림 자체의 가치는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그림이 정말 너무 기가막혀서 덧글쓴 누구 말씀대로
"수십년간 수만명의 가슴을 먹먹하게 찡하게 만들었"다면 그냥 복사해서
보면 되지요. 그림을 보고 그랬다면 그림을 복사해서 보여주면 되니까요.
복사는 공짜이니 수십년간 수만명이 아니라 1년간 수십억명을 감동시켰더라도
17억의 가치는 아니지요. 저는 매일 유튜브에서 공짜로 '감동찡하게 먹는 동영상'
구경하니까요.
즉 그림의 가치는 제 기준엔 100원
동렬님 기준엔 300원
진짜 가격은 무작위로 100명 뽑아서 물어봐서 평균값
그리고 17억은 이우환의 가치, 대한민국 부자의 가치, 대한민국 원로 유명 예술가의 가치 같습니다.
그게 '유명화가의 어떤 그림'을 통해서 대신 매겨지는 것 같네요.
풀이를 읽어보고 또 이 댓글을 읽어보니 저도 그림에 계속 얽매여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1970년대 '점', '선' 시리즈>1980 년 대 '바람'시리즈 >1990년대 '조응'시리즈 라고 하네요. ㅋ~...
영화감독들도 50대가 되면 배창호의 정, 김기덕의 섬 하면서
제목을 한 글자로 짓기 시작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작가의 귀여운 오만으로 볼 수 있지요.
점 하나 찍고 작품이랍시며 내밀 배짱은 어느 정도 연륜이 차야 형성될 거.
토마스/솔직히 토마스님이 뭔가를 제대로 알고 하는 말씀이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
이 그림에는 백원도 아깝다면서 운동화는 꼭 브랜드값을 따블로 얹어주고 나이키를 신을 거 같은 느낌.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브랜드있는 옷, 신발, 제품은 절대 쓰지 마세요.
브랜드값이 안 붙은 제품이 어디에 있나요?
300원은 내셔야 합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백원이 뭡니까?
100원은 제가 저 그림 복사해서 저장할 '수고비'정도의 가치입니다.
제 운동화는 '풍물장터세일'때 산 2만원짜리입니다.
2만원도 사실 아까웠어요. 1년에 운동화신는 날의 숫자로 생각하면.
300원이 아까워서 100원으로 내린게 아니라 저에게 필요없는 것이고
굳이 감상하려면 복사하면되니까 실제 가치는 0원이지만 복사수고비
책정이었습니다. 제가 좀 더 비싼 인간이라면 복사하는 수고비에
드는 단가가 비쌀테니 한 1,000원 할 수도 있었겠죠.
결론은 저에게 '필요없는 물건'이니 가치가 제로라는 이야기죠.
남이 17억에 사던 170억에 사던 그건 자유이고.
그렇지만 300원 내라면 냅니다. 200원 적선해주는 셈 치고.
예술이 어떻게 삶으로 흐르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한다고 보임.
현재 우리삶이나 방식은 모두 예술이 반영되어 있다. 길거리 패션이든 아니든 백화점이든 시장이든...흐르고 흘러 도착한 것임. 좀 시간이 걸려 다소 유행이나 양식에 뒤쳐졌다 해도 모두 반영이 되어 있는 것임.
우리가 삶을 바로 대입해버리면 자기수준에서 혹은 관점에서 경제력이나 생활적 태도에서 배척해야 될 것이 너무 많아짐. 그렇게 마음에서 걸려버리면 흐름의 소통이 막힘.
자기 삶을 바로 대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흐르는지를 관찰해야 함. 그것이 상부구조를 보는 방법이라 생각됨. 하부구조를 바로 주장해버리면 원인을 보지 못하게 됨...
그저 이런 생각이 듬.
저 그림을 개인이 소장하고 혼자 볼 요량이라면 300원쯤 주겠다.
그림만본다면 답이 없다. 소승적 관점에서 탈피하라.
저 그림이 공동체에 노출되고 이슈가되고 자부심이되어 사람들을 움직이게하고 혁신하게 자극하려면
저 그림의 가격 17억은 싸다. 대승적 관점에서 보라.
그림만 보지말고, 그림이 나타난 표면적이유(예술가의 의도)도 보지말며, 근원적이유를 보라. 질을보라.
무엇이 예술을 낳았나? 또 예술은 무엇을 낳는가?
만남을 낳았는가? 공동체에 밀도를 만들었는가? 아름다운 하나됨이 있는가?
발자취를 따라 가며 정리해봅니다
그림이 좋다/나쁘다 하는 것은
그림 자체가 좋다/나쁘다는게 아니고
'저 그림을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그래 내가 평소 말하던게 바로 이거야' 하는 그런 것이오.
그런 평가는 1초만에 나오는 것이고,
저 그림을 보고 무릎을 친다면 1초만에 쳐야 하고 2초 지나면 이미 꽝이오.
그 짜릿한 쾌감은 충분히 300원어치가 되오. 100원은 아무 것도 못 느끼는 사람.
액수를 논하자는게 아니라 비유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
그리고 저 그림이 나올때까지의 오랜 기다림을 생각해야 하오.
목마를 때 콜라가 맛있는 것이오.
그대가 추사 선생의 그림 한 점을 산다면
글자 한 자를 사는게 아니라 추사의 인생 전체를 사는 것이오.
그림 한 점을 사는게 아니라 그 그림이 가리키는 시대의 방향성을 사는 것이며
더불어 그 세계로 진출하는 것이오.
말하자면 돈을 주고 그림을 사는게 아니라 증명서를 받고 돈을 투자하는 것이오.
백원을 지불하는 사람은 100원을 투자하고 백원의 지분을 가질 뿐이오.
어쨌든 점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이면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소.
점 하나는 부족하고 적어도 점을 백개는 찍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모여도 세상을 바꾸지 못하오. 점 백개의 위치 가지고 다툼 나서 의사결정 실패.
이 점 하나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정화 천지창조의
하느님의 손끝과 아담의 손끝이 닿는 접점을 보았다면 성공 못보았다면 실패.
점을 찍는건 쉽지만 이 점이 그 점이라는 점을 납득시키는건 쉽지 않소.
1. 이 그림이 비싼 이유?
급소를 찔렀기 때문이오.
아무데나 찌른다고 급소가 아니오.
찌를 곳을 찔러야 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고, 놓아야 할 곳에 놓아야 하고, 두어야 할 곳에 두어야 하오.
그렇게 에너지가 충만한 지점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이오.
이우환 화백은 바로 그 지점을 포착했소.
점을 찍어야 할 곳에 점을 찍은 것이오.
우연이것 같지만 화폭을 황금분할하는 지점에 점을 찍었음을 알 수 있소.
장고의 고민 끝에 찍은 점은 인간의 시선이 가장 자연스럽게 대상과 만나는 지점에 찍어졌소.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며, 결국 점이 있어야 할 곳은 저 곳 밖에 없다는 것을 작가는 깨달았소.
누구라도 저 화폭에 점을 단 하나 찍어야한다면, 그것은 저 위치일 수 밖에 없소. 구석에 찍으면 나머지 여백이 부담스럽고, 가운데 찍으면 시선처리가 불안해질 수 밖에 없소. 딱 저 위치여야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것이 있소.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17억을 받을 수 없소.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 전부라면, 황금분할의 안정감을 주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17억의 가치가 없소.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안정적으로 자리잡는 곳에 점을 찍되 작가가 그곳을 찍기까지의 고민과 에너지의 총량을 보는 이들이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해야 하오. 사람들이 저 그림의 점을, 그냥 점이 아니라 인생을 통틀어 단 하나의 점을 찍는 다면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여야 하오. 그것이 어쩌면 작가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나아가 신의 마음까지 꿰뚫는 단 하나의 점을 대표할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주어야 하오.
그걸 해내는게 진짜 예술이고, 적어도 이우환 화백의 저 그림은 사람들에게 저 점이 바로 그 점일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에 점 하나가 17억이 되는 것이오. 따지고 보면, 예수는 사랑이라는 점하나 찍고 갔는데 무려 지금까지 2000년을 넘게 인류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소. 예술이란 그런 것이오. 점 하나로 사람들의 마음을, 지구의 핵을, 우주의 중심을, 신의 가슴을 들었다 놓기.
2. 질 입자 힘 운동 량?
◎ 질 – 질은 소재이며 위의 그림에서의 질은 캔버스 그 자체이자 점을 찍기까지의 화가의 고민과 긴장이라 할 수 있소(지금 작가는 인류 전체를 대표해 단 하나의 점을 찍고 있소)
◎ 입자 – 입자는 질의 에너지를 끌어들여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 외부와 맞서게 하는 것이오. 그렇게 하려면 처럼 일대일로 바깥과 맞서고 독립해야 하오. 크게 보면, 작가가 그린 점이 캔버스와 맞서 독립하였으니 입자이고, 나아가 관객과 작가가 맞서 독립하게 하였으니 입자이고, 더 나아가 점 하나를 두고 인류와 신이 맞서게 하였으니 입자인 것이오.
◎ 힘 – 힘은 입자 내부에 저울이 하나 있어 판정을 내리는 것이오. 저울의 양쪽에 추가 걸려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이오. 흰 화폭과 검은 점, 큰 화폭과 작은 점, 점은 동그래야 한다는 관객 생각과 작가의 네모난 점. 가로로 긴 화폭과 세로로 긴 점. 물감의 번짐과 캔버스의 흡수, 그리고 고요한 화폭과 움직이는 점의 대결. 그러한 대립을 통해 요소들은 서로 맞물리며 그러한 맞물림은 교착이 아니라 운동을 낳소. 왜? 질의 단계에서 이미 그렇게 세팅이 되었기 때문이오. 화폭에 단 하나의 점을 찍어야 한다는 작가의 긴장과 고민이라는 에너지가 투입되었기 때문에 저울은 양쪽 팔 중 어느 하나를 들게 되어 있소. 작품에서는 작가가 투입한 에너지가 네모라는 형태, 획의 움직임, 검은 물감의 선택이라는 판정을 이끌어내고 있소.
◎ 운동 - 힘 단계에서의 팽팽한 대립은 교착으로 끝나지 않소. 작가가 질의 단계에서 선택한 소재와 투입한 에너지의 질이 결국 힘의 단계에서의 판정을 낳고, 그 판정은 운동을 낳게 되오. 작가의 작품에서 운동은 획의 위에서 아래로의 움직임, 물감의 번짐 등으로 표현되고 있소.
◎ 량은 최종적으로 화폭으로, 관객의 마음으로 침투하고 스며들며 마무리짓는 것이오. 작품에 대한 감상, 최종적인 그림 완성품 등을 량이라 할 수 있겠소. 그닥 중요하지 않으니 더 이상 논하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