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수가 필요한 이유 무작정 점수를 하지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본질과 무관한 부수적인 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노상 ‘책읽지마라’고 꾸짖었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상좌는 서울대 출신으로만 채웠다. 게다가 본인도 꽤 많은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역설이다. 기본적인 책도 안 읽은 사람이 깨달음을 꾀한다면 넌센스라는 말이다. 절에 와서 책 펼친다면 애초에 틀려먹었다. 자기 수준대로 통하는 거다. 모르면 모르는데로 깨닫고 알면 아는데로 깨닫는다. 깨달음이라는 본질은 같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은 책읽은 깊이에 따라 달라진다. 깊이 들어가려면 출가하기 전에 도서관에 있는 책은 다 훑고 와야 한다. 필자도 책 안읽는주의자이나 전혀 책을 읽지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책에서 답을 구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진짜 필요한 것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능력, 곧 센스와 세상이 부를 때 세상의 편에 서는 결단력이다. 기본 상식은 있어야 한다. 무엇인가? 점수가 필요한 이유는 한 마디로 ‘무식’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과 대화해보고 느낀 점은 도대체 학교에서 뭘 배웠는지 아는게 통 없더라는 거다. 기초가 안 되어 있다. 그래서 점수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거 깨달음과 상관없다. 필자도 가방끈이 짧아서 모르는게 많지만 상관없다. 필자는 아홉 살때부터 ‘언어란 무엇인가?’ 이 주제에 매달렸다. 근데 이런 기초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예컨대 보편성과 일반성의 차이는? 특수성과 다양성의 차이는? 관념과 개념의 차이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이런거 10초 안에 즉답해야 한다. 궁금하지도 않던가? 도무지 기초가 안 되어 있다. 그런데 이건 공부고 학습이지 깨달음이 아니다. 점수는 학습이다. 관념은 스크린에 이미지를 띄우는 것이고 개념은 활로 그 이미지를 쏘아 맞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생하게 비유해서 말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국어사전 식으로 말하면 아직 모르는 것이다. 이건 누가 가르쳐 주는게 아니고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교과서에도 없다. 필자는 중고등학교 때 국가, 인간, 세계, 우주, 진리, 철학, 진보, 사회, 생명, 실존, 사랑, 자유 등등 주요 용어들을 이미지화 하는 훈련을 했다. 근데 이러한 초보과정을 안 거친 사람과의 대화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진리를 ‘합리적인 게임의 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하느님의 어떤 거룩한 비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애초에 불성립인 것이다. 개념과 관념은 원래 대화가 안 된다. 개는 개만큼 깨닫고 소는 소만큼 깨닫는다. 상관없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바른 방향을 지시해주면 되는 거다. 깨달음이 여럿 모이면 세가 형성되고 세가 형성되면 결따라 저절로 방향성이 생긴다. 여러분은 묻어가면 된다. 머리가 나쁜 사람도 있고 공부를 덜한 사람도 있다. 혜능처럼 공부를 전혀 안 한 사람도 있다. 상관없다. 방향이 옳으면 된다. 옳은 방향을 찾으려면 상호작용을 충분히 해야 하고, 상호작용을 하려면 일정한 세가 형성되어야 한다. 세가 형성되어야 현대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부단히 새로운 이슈가 터져나와야 우일신 하기 때문이다.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3명6통’ 이런 이야기하면 안 된다. ‘우담바라’ 이런것도 곤란하다. 왜 이런건 아닌가? 이건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다. 기본적으로 언어가 무엇인지 모르는 거다. 필자는 아홉 살때부터 이걸 알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6하원칙이 안 나오면 아닌 거다. 메커니즘이 아니면 아닌 거다. 이런 기초는 원래 그냥 아는 건데 이제 뒤늦게 배우려고 한다면 너무 늦은 거다. 언어는 단어로 표기되어도 그 안에 6하원칙을 갖춘 문장이 숨어 있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10하원칙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신족통을 얻어서 자유롭게 원하는 곳을 드나든다고 하자. 매우 곤란한 일이 생긴다. 어디로 갈까? 부산으로 가자. 부산의 위치는 어디지?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기 때문에 부산으로 가다간 우주로 튕겨나가게 되는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갔다가는 땅속에 갇히거나 허공에 뜰 위험이 많다. 이런 부수적인 곤란을 야기하는 것은 백퍼센트 거짓말이다. 이런걸 꼭 말로 설명해줘야 하나? 공중부양은 위험하다. 중심이 높아서 뒤로 자빠지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허공에서 균형을 못잡는다. 그러므로 공중부양을 할 것이 아니라 허공에 뜨다가 뒤로 자빠져서 무려 사망자가 발생해야 뭔가 말이 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우주 밖으로 튕겨나간다. 공중부양은 중력의 부정이며 중력이 반대로 작동하면 휴거된다. 공중부양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 중력교란이라고 해야 한다. 우주로 튕겨나가는 기술이라고 해야 한다. 이건 초딩도 아는 거다. 이런 기본 상식, 기초 지식이 없기 때문에 점수를 해야 하는 것이며 점수는 깨달음이 아니라 학습이며, 이제 시작하려면 늦었고, 일단 도서관의 책은 소년기에 대략 훑어보고 와야 하는 것이다. 현운 홍승덕님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기초가 안 되어 있다. 공부를 안 했다는 표시가 난다. 이름 앞에 호를 붙이는 재치가 있는데 이거 위험하다. 얼마전 SBS에 나온 사이비교주 박명호만 해도, 석선 박명호라고 호를 붙였는데, 이 양반은 항상 이름을 이중으로 쓴다. 예컨대 ‘돌나라 한농복구회 한농마을 유기농 생태공동체 석선 박명호’입니다 하는 식이다. 이는 갓 위에 갓을 쓰고 관 위에 관을 쓰고 한 마디로 무식이 통통 튀는 경지라 하겠다. 창피하지도 않나? 바보냐? 게다가 그 한농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한국농촌복구청년불빛회다. 울진에 ‘녹색농촌체험마을 도농교류센터’ 따위를 운영하는데 이름이 항상 이런 식이다. ‘돌나라 한국농촌복구청년불빛회 한농마을 유기농 생태공동체 석선 박명호 녹색농촌체험마을 도농교류센터’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잘 보면 20여개의 단어가 결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왜 스무개를 머리에 이고 다니지? 돌았나? 이건 뭐 최충헌의 벼슬인 벽상삼한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판병부어사대사 태자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判兵部御史臺事太子太師)와 맞장뜨자는 식이다. 삼천갑자 동방삭 이름부르다가 숨 넘어간다. 아랍에서 왔냐? 물론 홍승덕님은 재치로 그렇게 한 거겠지만, 수 틀리면 ‘혹시 무식해서?’ 하고 친절하게 오해해 드리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이순신이라고 하지 않았다. 순신이라고 한다. 성은 공적인 장소나 문서 따위에 붙인다. 조정에서 회의를 해도 신하들끼리 서로 이름을 부른다. 성룡은 이렇게 말했고 순신은 이렇게 말했다는 식이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자기 소개를 하며 스스로 아무개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선생은 원래 공자나 맹자처럼 죽은 선생이고 산 선생은 교사다. 선생에 님을 붙여도 엉터리다. 선생이 이미 극존칭인데 선생님이면 이중존칭이니 역전앞이다. 이 얼마나 코믹한가? 자기를 말할 때는 교사라고 하는게 맞다. ‘율곡 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면 귀싸대기 맞는다. 그냥 ‘이입니다. 성은 어디 이씨입니다.’ 이게 정답이다. 뭐든 이중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장이라고 해도 틀렸다. 학교장이다. 하여간 젊은이들에게서 기초가 안 된 장면을 많이 본다. 필자는 생각한 절대량이 많다. 양이 많아서 질이 형성된게 아니고, 질이 높으면 양은 저절로 넘쳐나게 된다. 여러분에게 필자가 생각한 과정을 다 거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불가능하다. 무리다. 그냥 팀에 들어오면 된다. 방향은 내가 지시한다. 혹은 일정한 세가 얻어지고 상호작용이 활발하면 저절로 방향이 생긴다. 편 먹고 따라오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이쪽 편에 가담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세상을 저쪽에 세우고 자신을 반대편에 포지셔닝 시킨다. 세상과 마주보는 자세로 핑퐁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게임의 규칙을 소총수의 개인화기로 삼아 인생을 살아간다. 그걸 바꿔야 한다. 세상을 등지고 세상의 편에 서서 세상을 빽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 마음이 딱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때 그 마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럴 때 자기를 바꿀 수 있다. 결론은 점수를 말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공부 안 한 티를 내는 거다. 보편성과 일반성의 차이를 10초 안에 이미지화 하여 말하지 못하면 기초가 안 된 거다. 문장이면 이미 틀렸고 그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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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단어는 하나의 사건이고 하나의 모형이며 하나의 그림입니다. 국(國)은 가(家)의 모임으로 보는 식이죠. 국은 개인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나아가며 그 과정의 집단적 의사결정단위입니다. 여기에 그림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국가설명은 개소리입니다.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단어를 이미지로 풀어내는 훈련은 누가 가르쳐주는게 아니고 원래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도(道)는 road가 아니라 way인데 TV드라마 전우치의 도술에서 쓰는 도는 road이므로 이미 가짜입니다. 딱 보면 가짜잖아요. road는 비번이고 way는 방향인데 이런건 1초만에 판단이 되는 거죠. 예컨대 다양은 한 나무에 뿌리가 여럿인건데 다른 나무를 심어놓고 다양성을 보장하라고 하면 곤란한 거죠. 그림을 딱 들이대면 분명하게 판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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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번획득은 권한획득인데 일대일 매칭이죠.
저울에 하나씩 다는거. 도를 일대일로 받아들이면 피곤한거죠.
도는 하나로 전체를 상대하는 것입니다.
봄의 파종은 전체를 상대합니다.
햇볕도 거름도 전체를 상대하지요.
가을의 수확은 하나씩 상대합니다.
원인이 아닌 결과를 본다는 거죠.
애초에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볼수 있습니다.
구조론은 사건을 따라간다는데 유의하시길.
기승전결로 세팅된 하나의 사건 안에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습니다.
나무 전체와 사과품종들이 어떻게 하나의 사건을 이루는지는 불명확하구요.
이쪽편이라 함은 당연히 구조론편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정말 든든하네요~~잘 따라갈게요
이쪽 편은 진리의 편입니다.
무의식적 생존본능이 아니라 길을 알고 가는 편입니다.
진리는 가만이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운행하여 역동하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가는 편, 세상이 가는 편, 진보가 가는 편에 서야 합니다.
문제는 알고가야 한다는 거죠.
무뇌좌파들이 헛소리를 해대서 진보가 어디로 가는지 헷갈리게 만들고 있으니
게다가 한농복구회 박명호 같은 사이비 교주들도 요즘은 유기농이니 생태니 하며
헷갈리게 하고 있으니 ..
초등학생이 라면 먹고 빵 먹었다고 교장이 종아리 200대를 때리는게 유기농은 아니지요.
그러나 답은 있습니다. 상호작용의 밀도를 증가하는 쪽이 정답입니다.
상호작용이 증가하면 자연의 결에 의해 저절로 질서가 찾아집니다.
진보가 워낙 다양한 헛소리를 해대고 있으니 헷갈릴법 하지만
road가 아니라 way임을 알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빵 먹고 라면 먹었다고 200대 때리는 교장은 유기농과 생태를 road로 보는 놈이고
단지 인간과 자연의 거리를 좁히는 방향으로 기동하자는 사람은 way로 보는 사람이지요.
진리를 천국으로 가는 비밀의 패스워드로 알면 곤란합니다.
진리는 70억 대중이 함께 가는 큰 배입니다.
슬프지만 그사람중의 하나는 제가 분명하군요. -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뭘하고 살았는지?
점수하는것도 쉽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