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이란? ◎ 자기를 바꾸는 것이다. ◎ 어떻게 바꾸는가? ◎ 두려움을 의연함으로 바꾼다. ◎ 인간은 어떨 때 변하는가? ◎ 아기는 엄마가 지켜보고 있으면 태연해진다. 인간은 신이 지켜보고 있으면 태연해진다. 태연히 불 속으로 뛰어들 수도 있다. 인간은 빽이 있으면 태연해진다. 돈이 있으면 태연해진다. 총이 있으면 태연해진다. 진리 안에 있으면 태연해진다. 물의 흐름을 타면 태연해진다. 수영을 배우면 태연해진다. 자전거를 배우면 태연해진다. 유행을 알면 태연해진다. 변화를 다루게 되면 태연해진다. 역사와, 진리와, 공동체와, 자연과, 신과 하나가 되면 태연해진다. ◎ 인간이 변해야 하는 이유는? ◎ 인간이 위기를 감지하면 공동체에 구조신호를 보내도록 되어 있다. 그 구조신호는 자기파괴로 나타난다. 그 결과는 괴로움이다. 물론 사이코패스는 그러한 위기감지 본능이 없으므로 깨닫지 않아도 무방하다. ◎ 인간의 삶이 괴로운 이유는? ◎ 자연의 흐름과 반대방향으로 역주행 하기 때문이다. ◎ 인간이 역주행하는 이유는? ◎ 사건의 원인에 대응하지 못하고 결과만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상부구조를 보지 못하고 하부구조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전체가 아닌 부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흐르는 방향의 반대방향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 자연이 흐르는 방향은? ◎ 자연은 에너지의 결을 따른다. 에너지는 원인에서 결과로 간다. 원인에는 에너지가 있고 결과에는 에너지가 없다. 역주행하면 에너지가 없으므로 사태를 장악하지 못하고 환경에 휘둘린다. 갑이 못되고 을이 된다. 그러므로 괴롭다. ◎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 인간은 공동체적 동물이다. 공동체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동료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려 하므로 원인은 제쳐놓고 결과만 포착한다. 그 결과 자연의 흐름을 거슬러 역주행하게 된다. 무엇이든 타인에게 전하려고 하면 거짓이 된다. 반면 자기 안의 넘치는 에너지를 분출시키면 참이 된다. ◎ 깨달음은 무엇이 다른가? ◎ 자연의 결과 인간의 시선을 일치시킴으로써, 공동체에 위기를 전파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본능을 극복하고 태연해진다. ◎ 깨달음은 무엇이 다른가? ◎ 깨달음은 결과가 아닌 원인을 보며,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며, 하부구조가 아닌 상부구조를 봄으로써 세상의 흐름과 인간의 인식을 일치시킨다. 세상은 에너지에 의해 작동한다. 에너지는 원인에 있고, 전체에 있고, 상부구조에 있다. 깨달음은 에너지를 획득하므로 태연해진다. 빽이 있는 사람이 태연하듯이, 돈이 있는 사람이 태연하듯이, 총을 가진 사람이 태연하듯이 진리와 신을 빽으로 삼고 의연해지는 것이며, 진리의 관점, 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 깨달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을 180도 틀어야 한다. 인간은 벽을 등지고 설 때 편안하다. 배후의 기습을 염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를 등지고 설 때 편안하다. 신을 등지고 설 때 편안하다. 인간은 개인의 위기를 공동체에 전파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명령 때문에 진리를 등지고 서지 않고, 진리의 맞은 편에 가서 선다. 그러므로 불행해진다. ◎ 어떻게 진리를 등지고 설 수 있는가? 완전성을 훈련해야 한다. ◎ 완전성은 무엇인가? ◎ 완전한 것은 관계다. 북도 불완전하고 북채도 불완전하나 그 둘의 만남은 완전하다. 그 만남을 기록한 악보는 완전하다. 너도 불완전하고 나도 불완전하나 너와 나의 만남은 완전하다. 그 둘의 사랑은 완전하다. ◎ 불완전한 것은 무엇인가? ◎ 불완전한 것은 관계의 결과인 의미다. 의미는 타인에게 전하는 것이며 또 그 사건에서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소득이다. 그것은 목적, 위하여, 행복, 쾌락, 소득, 돈, 성공, 출세, 명성 따위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 완전한 것은 그것을 낳는 만남의 장 그 자체다. 붕어빵을 버리고 붕어빵틀을 취하라. 의미를 버리고 그 의미의 자궁을 취하라. 물고기를 버리고 낚시대를 취하라. 그것이 완전하다. 낚싯대가 물고기와 사람을 만나게하기 때문이다. ◎ 어떻게 관계를 볼 수 있는가? ◎ 관계는 결과가 아닌 원인에 있으며, 부분이 아닌 전체에 있으며, 하부구조가 아닌 상부구조에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싸움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있다면 그 둘을 만나게 한 그 비좁은 공간이 원인이며 전체이고 상부구조다.
◎ 진정한 깨달음은 무엇인가? 관계의 상대성을 넘어 관계의 절대성을 보는 것이다. ◎ 완전한 관계는 무엇인가? ◎ 어떤 둘이 만나면 상대성이 성립한다. 상대성은 역설로 나타난다. 역설은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건이 반복되면 그 둘을 가두는 공간의 구조가 드러난다. 이때 관계의 절대성이 드러난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상호작용이 관계의 상대성이며, ‘네가 어떻게 하든 나는 이렇게 하련다’ 하는 것이 관계의 절대성이다. 그것은 구조의 축을 장악함으로써 가능하다. 공유하는 토대를 지배함으로써 가능하다. ◎ 관계의 절대성은 무엇인가? ◎ 관계의 절대성은 시소구조의 축을 장악하고 자유로이 제어하는 것이다. 둘이 공유하는 토대를 노출시키고 그 토대를 흔들어버리는 것이다. 그 토대가 작용하여 사건을 원위치 시키는 것이다. 그 토대를 진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 입체적 모형은 무엇인가? ◎ 관계의 상대성은 원인과 결과를 선상에 나란히 놓고, 원인이 끝나면 결과가 온다는 식의 선형적 사고이고, 관계의 절대성은 원인 안에 결과가 있다는 입체적 사고이다. 깨달음은 선형적 사고에서 입체적 사고, 모형적 사고로의 비약이다. ◎ 손가락은 무엇이고 달은 무엇인가? ◎ 손가락은 관계의 상대성을 보는 것이고 달은 관계의 절대성을 보는 것이다. 사랑할수록 오히려 미워지는 것은 관계의 상대성이고, 그러한 밀당과정을 거치면서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는 것은 관계의 절대성이다. 시소에 올라타고 있으므로 상황이 반전되는 것이 관계의 상대성이고 그 시소의 축을 지배하므로 상황이 일관되는 것이 관계의 절대성이다. ◎ 돈오는 무엇인가? ◎ 돈오는 관계의 성립 그 자체다. 그것은 신과의 관계정립, 진리와의 관계정립, 역사와의 관계정립, 공동체와의 관계정립, 자연과의 관계정립을 통하여,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180도로 바꾸는 것이다. 진리의 편, 신의 편, 역사의 편, 공동체의 편, 자연의 편, 진보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것을 빽으로 삼아 등지고 서며 거기서 에너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 점수는 무엇인가? ◎ 점수는 깨달음을 타인에게 증명하려는 노력이다. ◎ 깨달음은 신을 빽으로 삼고 진리를 빽으로 삼는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은 큰 세력을 이루어 그 세력과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그 세력을 빽으로 삼는다. 거기서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창의하고 혁신한다. 점수는 혼자 고립된 수행자가, 그 빽이 없어서 깨달음이 의미를 잃은 상태에서, 에너지가 없는 상태에서 동료들의 인정을 바라는 행동이다. ◎ 현대성은 무엇인가? ◎ 진리는, 역사는, 생명은, 자연은, 문명은 고요히 머무르지 않고 기운차게 생동한다. 에너지를 얻어 에너지를 소통시킨다. 깨달음은 그 에너지의 흐름을 타고 세상과 부단히 상호작용한다. 상호작용에는 유통기한이 있고 마감시한이 있으므로 시간이 촉박해져서 계에 강한 밀도가 걸린다. 거기서 에너지의 방향성이 성립한다. 낳음의 자궁이 세팅된다. 그리하여 창의한다. 부단한 창의와 혁신 속에서 깨달음은 입증된다. 깨달음이 세상을 바꾼다. ◎ 존엄은 무엇인가? ◎ 존엄은 위대한 만남이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그 만난 세력과 상호작용함으로써 빽이 있는 것이요 돈이 있는 것이요 총이 있는 것이다. ◎ 잘못된 깨달음은 무엇인가? ◎ 존엄이 없는, 현대성이 없는, 결과를 추구하는, 행복을 바라는, 위하여라고 말하는, 하부구조에서 움직이는, 혼자 고립되는, 점수로 시간낭비하는, 상호작용하지 않는, 진리의 편에 서지 않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쓸데없이 히죽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평안하다며 자기소감을 발표하는 그런 것은 가짜다. 그것은 에너지를 태움으로써 자연히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두려움을 없애려는 노력이다. 그 경우 혼자서 평안을 주장해봤자 부단히 변화하는 환경이 인간을 괴롭힌다. 시달림은 계속된다. ◎ 왜 잘못된 깨달음인가? ◎ 깨달음은 관계이고 관계는 공하다. 그 안쪽은 비어 있다. 관계는 둘의 사이다.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는 관계의 토대를 보지 못한 것이다. 사이에는 토대가 있다. 너와 나는 한 배를 타고 있고, 너와 나의 사이에는 배가 있다. 너와 나의 사이에는 지구가 있다. 너와 나의 사이에는 진리가 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인터넷이 있다. 에너지의 밀도가 걸려 있다. 그리고 그 토대에 의하여 닫혀 있다. 그 닫힌 공간이 낳음의 자궁이다. 열린 공간은 에너지를 통제하지 못한다. 가짜는 깨진 종처럼 소리를 내지 못한다. ◎ 바른 깨달음은 어떤 것인가? ◎ 바른 깨달음은 신의 편에서 신의 일을 한다. 진리의 편에서 진리의 일을 한다. 역사의 편에서 역사의 일을 한다. 진보의 편에서 진보의 일을 한다. 그 신과 진리와 역사와 진보를 빽으로 삼으므로 존엄하다. 만남을 통해 관계를 만들어낸다. 상호작용 가운데 현대성이 있다. 마음이 편안하다는 식의 쓸데없는 자기소개를 하지 않고 대신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의 울림소리를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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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깨달음인가? 다른거 없소. 이쪽을 보라고 해도 사람들이 자꾸만 저쪽을 보기 때문에 시선을 교정하려는 겁니다. 그냥 이쪽을 보라고 주문할 때 이쪽을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원래 안 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훈련을 시키려는 겁니다. 문제는 알고보니 저 빼놓고 다들 그게 안 된다는 거.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라고 백번쯤 말해도 악착같이 손가락을 보더군요. 이제 그만 항복하세요. 제발 달을 보세요. 관계를 보고 토대를 보고 상부구조를 보세요. 의미를 보지 말고 관계를 보세요. 보이는 것을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세요. 관계는 변합니다. 그 관계의 변하지 않는 항상성을 보세요. 진짜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변하게 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손가락은 석가의 손이든 달마의 손이든 혜능의 손이든 변하였으나 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관계는 변하나 그 관계의 집은 변하지 않습니다. 흐름은 변하나 그렇게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습니다. 소금은 썩지 않고 금은 녹쓸지 않습니다. 신뢰는 변하나 신뢰 그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어떤 신뢰이지 신뢰 그 자체는 아닙니다. 빛의 밝기는 변하나 빛의 주인인 태양은 변하지 않습니다. 결과를 보지 말고 원인을 보며 그 원인의 공(空)함을 보고 다시 그 공의 항상됨을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빨대꽂고 에너지를 빼쓰십시오.
http://gujoron.com/xe/?mid=Moon ∑ |
잘보았습니다 그런데,
동렬님 혹시
P. D. Ouspensky의 Tertium Organum:제3의 논리학 읽어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