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마를 따라야 한다. 문제는 카스트다. 카스트는 다르마의 고착이다. 부단히 새로운 다르마를 개척해야 한다. 만남으로 가능하다. 다르마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약속은 만남에 의해 성립한다. 어떻게 만날 것인가? 평등으로 만나고, 이겨서 만나고, 합리성으로 만나고, 공적으로 만나고, 도덕으로 만난다. 평등의 논리, 힘의 논리, 합리성의 논리, 공사구분의 논리, 도덕의 논리가 있다. 만나게 하는 조건들이다. 평등해야 만난다. 아군은 평등해야 한다. 적은 만나지 못한다. 평등의 논리는 동시에 차별의 논리다. 적은 당연히 차별해야 한다. 차별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주위에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이 주변에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평등은 좋은 말이지만 뒤집어보면 무서운 말이다. 죽는 수가 있다. 많은 경우 이기지 못하면 만나지 못한다. 16강에 탈락하면 독일팀을 만날 수 없다. 합리적이어야 만난다. 합리적인 것은 효율적인 것이다. 많은 경우 지속가능하지 않다. 도박으로 만나면 곧 깨진다. 공적인가, 사적인가도 중요하다. 헷갈릴 만한 게 공자의 가르침은 공을 중시하고 사를 억누르는 것이다. 남의 자식과 내 자식이 똑같이 잘못하면 내 자식을 나무라야 한다. 그 반대도 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숨겨주고 변명해 줘야 한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부모가 자식을 고발하면 안 된다. 이상하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둘이 같음을 알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공이다. 부부관계도 공이다. 내가 살기 위해 부인을 고발하고 남편을 고발한다면 사를 공에 앞세우는 것이다. 공과 사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말고 에너지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언제나 전체가 먼저임을 알 수 있다. 도덕의 논리는 주로 어린이를 가르칠 때 쓰는 말이다. 사회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사회화 과정이다. 어린이에게 사회성을 가르쳐야 하므로 도덕을 강조하는 것이지 세상이 도덕과 평판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도덕에 따른 평판은 여러 가지 가치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도덕은 사회성을 발달시킨다. 사회성이 발달하면 만날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다. 공을 중시하면 만날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합리성을 중시하면 만날 사람을 만나고, 승리하면 만날 사람을 만나고, 평등하면 만날 사람을 만난다. 그 전에 적을 제거해야 한다. 방해자를 제거해야 만난다. 아닌 것을 제거하면 남는 것이 내가 만날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