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비인간이 갈리는 지점이 있다. 말이 통하니까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말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다. 약속된 변화가 없다면 언어는 필요 없다. 변화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약속을 어떻게 알아내는가다. 자연의 약속은 관성력이다. 사회의 약속은 권력이다. 인간의 약속은 신이다.
인간과 유인원 이들은 한번 갈리면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는다. 신중하게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관성력이 걸려 있으므로 궤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관성력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된다. 인간은 문명의 진보라는 형태로 관성력이 걸려 있고 유인원은 그냥 머물러 있다. 관성력이 걸려 있으므로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게 된다. 입구에서 출구를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이 약속이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것.
방향전환이 안 된다. 그것이 우주의 본질이다. 관성력이 걸린 궤도 안에서 포지션을 바꿀 수 없다. 받는 자에서 주는 자로 변신할 수 없다. 그 반대는 가능하다. 군자의 길을 가다가 소인으로 떨어지는 수는 있어도 소인의 길을 가다가 군자의 길로 올라서는 수는 없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막혀 있다. 세상은 깔때기다. 입구로 들어가면 출구로 나온다. 깔때기 내부에는 관성이라는 이름의 압력이 걸려 있다. 깔때기 안에서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들어간 문으로 돌아 나오지 못한다. 애초에 올바른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것인가? 그것은 만남의 형태로만 가능하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안과 밖의 차이다. 안에는 관성력이 걸려 있다. 에너지에 의해 지배된다. 미끄러져 들어갈 뿐 의사결정이 없다. 발견될 뿐 조립되지 않는다. 영화의 서스펜스, 스릴러, 서프라이즈, 스펙타클은 이미지 안에서 나온다. 주제의식, 감동, 교훈, 성찰, 진정성, 신파 따위는 감독의 의도에 의해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다. 안으로 가면 진리의 길이요, 밖으로 가면 엔트로피 증가다. 구조는 용감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발소 그림은 행복감을 준다. 무언가를 받아서 티켓값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관객들의 기호에 영합한다. 영화가 감동과 교훈을 주려고 하면 예술이 아니다. 진짜는 안에서 발견한다.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각도, 새로운 느낌, 새로운 충격에 전율하게 된다. 거기에 권력이 있다. 새로운 것은 모방되고 복제되기 때문이다. 모방되어야 진짜다. 홍상수는 장뤽 고다르를 베끼고 김기덕은 히치코크를 베낀다. 타란티노는 둘 다 베낀다. 하나의 복제가 또 다른 복제를 낳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하여 긴 맥놀이를 만들어가는 그것이 예술이다. 그 안에 관성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안에서 답이 나와야 한다. 좌파와 우파의 밥통들은 외부에서 무언가를 주입한다. 좌파는 환경, 소수자, PC정책 따위 정치적 이슈를 영화에 주입한다. 우파는 감동, 눈물, 신파로 티켓값을 건지려고 한다. 영화 외부의 요소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똥이다. 이들 쓰레기와 결별하고 진리의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 안에서 방향전환이 안 되므로 만날 것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므로 만나지 못하고,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음에도 때와 장소를 가리므로 만나게 된다. 만날 수 있는 위치에 가서 타이밍을 재고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