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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깨달음을 얻으면 만사형통-도깨비방망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깨달았더라도 그 범위-효과는 한계가 있다.
비유를 해보자.
자전거를 타려고 애쓰다가 갑자기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몇시간을 애쓰다가 갑자기 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게 깨달음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해도, 그 활용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자전거를 타고 물속으로도 공중으로도 갈 수 없다.
자전거타기가 해당이 되지 않는 영역이다.
자전거로는 땅에서만 갈 수 있다.
자전거는 진흙탕도 자갈밭도 갈 수 있다.
그러나 매우 적합하지는 않다.
자전거 보다는 걷기나 뛰기가 나을 수도 있다.
또 아주 멀리 갈때나, 아주 가까이 갈때는 자전거보다는 자동차나 걷기가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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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깨달음이나 혹은 세상을 해석하는 모델은 적용분야에 한계가 있고,
적용은 가능하나 별로 적합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무시하고, 깨달으면 만사가 형통되는 양 하고 있다.
또 하나의 해결모델을 가지고서 온갖데 다 적용하려고 하고 있다.
바둑두는 사람들은 바둑에 세상의 이치가 다 있다고 한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고 절대로 세상의 모든 영역에 다 적용할 수는 없다.
여기에 구조론도 해당될 수 있다.
연속극 끝나는 걸 못내 아쉬워하는 사람 같소.
돈오와 점수는 불가분의 관계다 뭐 이런 말이오?
명탐정코난의 코난은 십수년째 아직 초등학생이고, 그의 여자친구 란도 십수년째 고등학생이오.
랑그니 빠롤이니 좋아하는 건 자유지만...
쓸데없는 참견이오.
의사가 병만 고치면 되는 거지
환자의 불노장수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는 거요.
병고쳐 봤자 어차피 늙어죽을 건뎅? <- 이런 말은 필요없소.
병고쳐 봤자 교통사고로 가버리던뎅? <- 이 또한 필요없소.
병고쳐 봤자 도박으로 홀랑 말아먹고 거지되던뎅. <- 이런 말도 필요없소.
깨달음을 깨달음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쓸데없는 분야에 써먹으려들다 보니
쓸데없이 쓸데없는 분야에 써먹지 못했다고 해서 화를 내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쓸데없는데 써먹으려 들지 마시오.
의사는 병만 고치면 되오.
그걸 누가 그르다고 하리오.
그러나 그 병을 고쳤지만 불완전하게 고쳤단 말이지요.
잠재적 위험이 여전히 있단 말이지요.
고쳤다고 디지탈식으로 0.0 => 1.0 로 비약하는 게 아니라
0.0 => 0.5 =>1.0 으로 변화하는 연속에 있는데
0.3 에서 => 0.5에 다다르면 고쳤다고 하니 그렇다는 거지요.
고쳤다고 다 고친건 아니란 거지요.
언어란 전기회로이오.
회로가 아무리 복잡해도 전파사 아저씨는 테스트기로 1초만에 판명할 수 있소.
전구에 불이 들어오면 합격이고 아니면 고장이오.
언어도 마찬가지오.
모든 언어는 문장으로 존재하오.
한 단어가 문장이 되는 수도 물론 있소.
그러므로 말을 아무리 꼬아서 하고 개념을 아무리 복잡하게 갖다붙여도
1초만에 판명이 되는 거요.
달마가 주장자로 법상을 꽝 내리치면
양혜왕은 이게 뭔짓인가 하고 눈을 두리번 거리겠지만 그러라고 한 거요.
한 마디도 법어를 베풀지 않았지만
자다가 깬 사람에겐 자다고 깨라고 한 말이오.
놀라서 애 떨어진 사람에겐 애 떨어지라고 한 말이오.
정신차린 사람에게는 정신차리라고 한 말이오.
각자의 관점이 따로 있는게 아니오.
작용 반작용이 성립한 만큼만 의미가 있는 거요.
문장이 아무리 길어도 답은 동사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수식어에 불과하오.
각자의 관점이 있는게 아니고 말이 통하는 관점이 있고 안 통하는 관점이 있는 거요.
결론은 나는 A와 B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데
상대방은 A나 B를 보고 있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되는 것이며
원래 A나 B를 보면 안 되는 거요.
그 관점이 틀렸소.
화성에 모래알이 몇개냐고 물으면 자연수로 말하면 안 되오.
지구에 100개일 때 화성은 50개다 이런 식으로 비례식으로 말을 해야 하오.
내가 민주당이 이긴다고 하면 '아니 새누리당이 이길 수도 있는뎅?' <- 이러면 안 되오.
확률로 이야기해야 하오.
비례와 확률은 모두 관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므로 바른 관점이고
비례와 확률이 아닌 다른 걸로 말하면 설사 운좋게 맞혔다 해도 그게 맞힌게 아니요.
그건 그냥 뻘짓이오.
그건 비과학이고 멍청한 소리요.
돈오는 관계로 말하고
점수는 그 관계의 양 당사자로 말하기 때문에
돈오는 바른 관점이고 점수는 틀린 관점이오.
말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오.
퇴계의 횡설은 수평으로 놓으므로 이미 양당사자가 되어서 틀렸소.
율곡의 수설은 수직으로 놓으므로 하나를 이루어서 옳은 것이오.
하나라야 통제할 수 있고
둘이면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으므로 통제할 수 없어서 틀린 거요.
빛은 하나이므로 옳고 밝음과 어둠은 둘이므로 틀린 거요.
빛은 통제되나 밝음과 어둠은 통제되지 않소.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해도 그건 틀린 대답이오.
관점이 틀렸소.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고 물었는데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를 말했으므로 그건 틀린 거요.
만유인력은 사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오.
사과와 상관없소.
그게 정답이고 바른 관점이오.
앞의 글 돈오와 점수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논리적으로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다만 이 글에서 쓰신 깨달음에 대해서,
깨달음의 수준이 다 다를거라고 하셨는데 동의하기 힘듭니다.
종교라는 말이 원래 최고의 가르침을 의미한다면,
최고의 가르침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겠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르침은
산상수훈에서 붓다가 말한 '세상은 불타고 있다, 세상은 고통이다' 라는 현실인식이 아닌가 합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자각을 일깨우는것이죠.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게 바로 그 일체고액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겠는데,
유교처럼 처세를 통해 고통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억제하는 실천적인 방법도 있겠고,
불교처럼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않는 심리적인 방법도 있겠죠.
제법과 오온이 모두 '공'하다 라는 자성,
이 자성의 실체는 문자로는 표현되지 않고 오직 느낌으로서만 존재하죠.
마치 5월의 보리밭의 흙냄새를 문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듯이.
어쨌든, 어떻게 보면 불교는 세상은 모두 고통이다 라는 인식을 가르침이라고 줘놓고 나서,
또 그 고통이라는게 사실은 모두 '공' 하다 라고 하는 일종의 병주고, 약주고 게임입니다.
그런식으로 해석한다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는 말은, 깨닫기 전의 산과 깨달은 후의 산은 객관적으로는 같지만 주관적으로는 다른 사물이 되어있다 정도인거죠.
요즘은 고통에 대한 처방으로 이도저도 아닌,
공동체속에 내재하는 구조를 건드리는 정치적인 방법이 유행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삶에 공동체가 미치는 영향이 전에 없이 커져서 그런것 같기도 하네요.
삶의 근본자세에 대한 통찰 혹은 깨달음이 아주 중요하오.
그러나 어느게 근본인지, 또 어느게 근본의 근본인지 한계지을 수가 없지요.
왜, 왜, 왜를 캐들어가면 결국 무한에 부딪히거나 순환에 걸리지요.
그래서 알맞은 수준에서 그만두게 되는데
여전히 허전한 점이 있다는 거지요.
하긴 허전함에도 그걸 안고 사는 게 어쩔수 없긴 하지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괜히 했다 싶네요.
선불교의 니힐리즘적인 경향을 말하려던것은 아니었습니다.
불교적인 세계관이라는게 단순화하면 고통에서 벗어나서 대자유를 만나라 정도겠죠.
그런데 문제는 그게 최후의 목적은 아니라는 겁니다.
수단일뿐이고 정신적, 육체적 활동을 위한 일종의 도구일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육체가 통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듯이,
정신이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듭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몸을 돌보는 것이고,
통증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할일을 못하지 않는 것이겠죠.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이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는것, 그런 상태를 만들어 놓는것, 그것이 경험은 못했지만 이른바 "깨달음"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깨달음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 말은 동렬 주인장께서도 강조하는 말인것 같습니다만, 삶의 의미는 be동사에 있는것이 아니라, 일반동사에 있는것,
깨달음의 상태에 머무는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자신의 할일을 하는 것,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야하지 않나 합니다.
그 할일이란것이 각자가 다르겠지만, 그것에도 8정도라는 준칙이 있죠.
써놓고 보니 후대의 반야심경이 원시불교의 8정도를 앞서는 논리역전의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랫만에 보는 멍청한 소리군요.
이 사이트에서 노출되기에는 너무 수준이하이오.
공부 좀 하시길.
늘 하는 이야기지만
숫자 1은 사과 하나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과를 가리키는 손가락 하나에 있는 것도 아니오.
둘 다 아니오.
숫자 1은 실상 사과나 손가락과 아무런 관련이 없소.
숫자 1은 비례식이오.
세상의 모든 것은 상호작용을 나타내는 비례식 혹은
그 비례식을 100에 대해 나타내는 확률로만 나타낼 수 있소.
이건 초보 중에 초보 중에 초보이오.
근데 이게 안 되는 사람이 꽤 많소.
한국사람과 한국말로 대화가 안돼부러.
숫자 1은 사과와 손가락 사이를 가리키며정확하게는 (±1/1)이오.
이게 안 되면 0을 발견할 수가 없소.
어떤 사람은 0이 숫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0이 숫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이건 관점의 차이가 아니고 지와 무지의 차이요.
한글을 익혀야 대화가 가능하오.
심오한 진리는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게 아니라
언어가 안 되는 거요.
언어로 충분히 나타낼 수 있소.
문제는 한국어를 모른다는 거.
아직 0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
제발 0을 발견하시오.
숫자 1은 사과 하나가 아니오.
포지션이오.
포지션은 관계요.
관계는 비례식이오.
비례식은 상호작용이오.
이러한 기초를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는 불능이오.
나가야 할 진도가 잔뜩 밀려 있잖소?
깨달음을 말하는데 구조론을 말씀하시는것 같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진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드리면,
언어에 대한 반응은 자신의 경험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게 제 견해입니다.
사막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 처음으로 산의 개념과 관련된 여러 언술을 접했을 때 가지는 심상의 혹은 육체의 반응과
산을 직접 올랐을때의 심상이나 육체의 반응과는 다를 수 밖에 없지요.
말씀하시는 심오한 진리라는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지만,
먼저 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언술만으로 그것을 정확하게 알기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세하게 혹은 독창적으로 설명을 해도 힘들다는 것이죠.
선가의 모든 공안이 진리를 언어적, 논리적으로만 파악하려는 위험에 대처한 수단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진리의 발견을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위험에도 대비하는 것이겠죠.
그런 막연한 이야기를 하면 곤란하죠.
그건 진리를 논하는 사람의 대화법이 아닙니다.
개가 사람의 말을 못 알아먹는 것은 오로지 개의 탓이지
진리의 탓도 아니고 언어의 탓도 아닙니다.
누구든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때는 정확하게 짭니다.
오류가 있으면 컴퓨터가 작동을 하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오류가 개선될때까지 작업을 계속하는 거지요.
수학계산을 할 때도 정확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두루뭉수리로 말하는 것은
굳이 그 정확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충 해도 알아먹으니까요.
오류개선작업을 굳이 안 하거든요.
해고될 위험이 없으니까.
그러나 달나라에 로켓을 보내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모호함으로의 도피를 꾀한다면 곤란한 거죠.
그 사람은 당연히 나사에서 해고되고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요.
말귀 알아듣지 못하는 개를 가르치느니
말귀 알아듣는 사람을 찾아내는게 현명하지요.
컴퓨터 프로그램 자체가 하나의 언어임을 이해해야 하오.
건축 설계도는 언어가 아니라면 곤란하오.
자동차의 구조도 그 자체로 언어이오.
이건 백퍼센트 정확하게 됩니다.
왜? 안 되면 다시 하니까.
수천만번 뜯어고쳐서 나로호를 발사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언어도
대법원 가면 사과박스로 30박스 분량의 단어들을 정밀하게 조직합니다.
그 골때리는 짓을 누가 하느냐고요?
법무법인 사무장들이 합니다.
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에요.
물론 수학자들이 더 엄밀하게 하지만.
연역도 귀납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