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지도로 본 현장 위치. 화살표는 목격자(?) 김용환이 주장하는 장준하 선생의 추정 등산로. 하얀 점은 시신 발견 위치. 사실상 절벽이랄 것도 없다.
이 지역은 주변에 군부대가 여러곳 있으며 등산금지구역으로 설정되었다가 해제된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곳으로 당연히 등산로가 없었으며, 산악회원들은 계곡을 따라 산행을 했고 절벽이 있는 작은 봉우리는 등산로도 없고 접근성이 좋지 않아 사실상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곳이다.
붉은 점이 있는 곳에서 산악회원들이 식사하고 있었는데, 장준하 선생이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갔는지 물어서 목격자(?) 김용환이 혼자 장준하 선생을 뒤따라갔다고 한다. 함께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곳은 등산할 봉우리도 없고 절벽쪽은 접근성이 좋지 않아 그쪽으로 갈 이유가 없다.
게다가 장준하 선생은 산악회원들의 식사장소에 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이전에 김용환에 의해 유도되어 옆길로 빠져서 산악회원들과 헤어졌고 공범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봐야 한다. 결정적인 증거는 식사장소가 상류쪽이고 시신발견장소가 10분 정도 거리의 하류쪽이라는 점이다. 장준하 선생은 식사장소에 가지 않았으며 그곳에서는 등산로가 없다.
사망 사건 정황(위키백과)
장준하는 평소에도 지인들과 산행을 즐겼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1975년 8월 17일 호림산악회의 산행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는지, 호림산악회 회장 김용덕 또는 최후 동행인 김용환의 강권에 의해 따라나선 것인지는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장준하의 비서 이철우는 대절된 관광버스 자리가 꽉 찼다는 말을 듣고 동행하지 않았다.
정오경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한 호림산악회 회원들은 차례로 계곡 등산에 나섰다. 이들은 약사계곡 중간 지점에서 오후 1시30분 경부터 점심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장준하가 점심식사 장소에 도착했는지에 대해서도 회원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최후 동행인 김용환의 진술에 의하면, 김용환은 점심식사 장소에 도착해서 장준하를 찾았는데 이 때 일행 중 누군가가 장준하가 산으로 올라갔다고 해서 뒤쫓아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장준하를 따라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하산 길에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어 김용환이 앞장 서서 계곡 쪽으로 하산을 했는데, 험한 암벽 지형에서 소나무를 붙잡고 내려가던 도중에 뒤에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장준하가 보이지 않아 실족하여 추락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김용환은 절벽 아래로 내려와서 장준하의 사체를 발견하였다. 산행에 동행했던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은 후일 당시 현장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 | 장준하는 두 손을 가슴에 나란히 얹고 편안한 자세로 자는 듯 누워 있었다. 등산모는 바위 중간쯤 나무 등걸에 걸려 있고 시계는 1시40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왼쪽 귀밑이 약간 찢어진 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7] | ” |
김용환은 이후 호림산악회 회원들의 점심식사 장소로 달려가 사고 소식을 알렸다. 김용덕 등 산악회원들은 김용환을 따라 사고 현장으로 갔으며, 20여분 뒤 사체를 발견하였다.
명진스님 주도로 문화재 환수운동의 혜문스님이 주지로 계신 흥룡사에서 천도재를 봉행하고 있다. 혜문스님은 근래에 기연으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인근에 장준하 선생 숨지신 곳을 여러번 답사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올 여름에 갑자기 선생께서 벌떡 일어나 몸소 증언하시니 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명진스님은 "파사현정이라 하나 구름이 걷히면 달은 저절로 드러나듯이 파사를 하면 현정은 저절로 이룩되는 것"이라고 법문하셨다.
나무기둥 표식의 왼쪽으로 10여보 떨어진 곳의 바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으셨다고 하는데 그 바위는 절벽에서 10미터 쯤 떨어진 지역이다. 즉 이미 옮겨진 것이다.
절벽을 아래에서 위로 오려다 보았다. 거칠어서 저기에서 구르면 온 몸에 상처투성이여야 한다. 그러나 후두부 함몰 외에는 상처 한 곳 없었으니. 당시 언론은 후두부 상처를 2센티로 축소 발표하였고 진실을 밝히려 한 기자는 긴급조치법으로 구속되었다.
진혼제가 준비되고 있다. 절벽은 왼쪽이다.
인파가 몰려있는 뒷쪽이 절벽이다. 앞은 계곡이다.
이 일대는 잡목으로 우거져서 등산하기에 부적당하다. 또 잡목 때문에 실족한다 해도 굴러떨어지기가 불능이다. 당시는 625 후 삼림이 없었다 해도 등산로가 아니며 등산하기에 부적절하다.
고맙습니다..
".... 구름이 걷히면 달은 저절로 드러나듯이 파사를 하면 현정은 저절로 이룩되는 것... "
모두 건강하시길.....
일단 텍스트는 구글 캐쉬에서 복구해놨습니다.
이미지는 동렬님께 요청해서 복원되도록 해놓을게요.
그리고 원본 사진은 메일로 보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