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고리
1. 현실반복패턴 벗어나기
사람이 현실반복패턴에서 자유로워지기가 얼만큼 힘든가? 대개는 자신이 현실반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현실반복을 하는지 안하는지는 스스로를 관찰해야만 알 수 있다. 보통은 자신을 관찰하지 않는다. 자신을 관찰하는데 게으를 뿐더러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울하다. 쉽게 지치고 쉽게 낙담하고 쉽게 좌절한다. 우리는 대부분 남을 관찰하고 다른 사물을 관찰하는 데 온 힘을 집중한다.
외부세계는 바로 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말한다. 성경에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는 잘 보느니라’ 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도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외부에 집중 하다보니 내면에 집중하지 못한다.
어떤 작가는 이와 같이 말했다. ‘고시 공부하듯 나 자신을 공부하라’. 생각해보면 나는 다행히도 나 자신을 관찰할 기회가 다른 사람보다는 많이 있었고 자신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늘 염두해 두었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과 같은 소기의 성과는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내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찾아가는 과정에서 세련되지는 않은 나만의 투박한 방식이지만 그래도 잘 해왔다는 생각을 한다.
1) 자기 객관화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객관화’이다. 이게 참 어렵다. 나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나를 객체화(object)해서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 주관이 개입되고 감정이 개입되고 상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고 비슷한 행동들이 반복되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자기 객관화 과정이 실패하는 것 처럼 보여도 하나하나 쌓여가 시간이 지나면 남들과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찰을 하고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표현하는 과정은 새로운 매커니즘처럼 보이지만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인간의 지능을 고도로 끌어올리는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은 관찰이다.
관찰이 되는 사람이 있고 관찰이 안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호기심’ 의 유무이다. 호기심이 있는 사람은 열려있는 사람이다. 유연한 사고를 지니고 있다. 물과 같다. 처음에는 이것이 유전인가 생각을 했지만 유전은 인간의 성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충분히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도 호기심과 같은 마음가짐을 수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부터 되는 사람만 할 수 있다면 인격도야, 인격수양이 무슨 필요란 말인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가장 구분되는 특징중의 하나는 생각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학습능력이라는 하부 카테고리로도 설명할 수 있다. 고등동물일수록 생각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그 생각이 존재에 관한 물음, 본질에 가까운 물음일수록 그 동물은 점점 사람다워진다. 신을 닮아가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누구인지,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에 관해 호기심을 갖지 않는 자들에게 발전은 없다. 그것은 인류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
2) 감정을 보는 관점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다른 큰 특징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희로애락’이 있다. 기쁨과 슬픔, 우울과 환희, 사랑과 이별의 감정, 동료애, 연대의식, 공허함과 벅찬 감정, 증오와 질투, 화를 내고 용서하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은 인간들만이 가지는 전유물이다. 이런 감정들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사이코패스’라 한다.
감정이 있기에 인간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 감정은 인간을 힘들게 하는, 인간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도구일 수 있으나 반대로 감정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지금 내가 쓰는 글은 거짓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도 거짓이다. 말도, 행동도, 글도 모두 거짓이다. 하지만 가장 솔직한 것은 ‘순간의 감정’ 이다. 기분이 좋으면 그냥 좋은거다. 기분이 나쁘면 그냥 나쁜거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포장하려 애쓴다. 이것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진다. 우리의 몸뚱아리는 어른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신연령이나 심리구조는 유아기에 머무는 것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체면을 따지게 되고,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이게 된다. 어린 아이때는 자기 하고싶은 것 마음대로 해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교육을 받고, 직장에 들어가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간은 어떤 ‘선’을 중요시 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예절이란 것이 생겨나고 제도가 생겨났다. 이것들 모두 본래는 없는 것이지만 인간들이 자기들 편하려고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이런 것들에 집착한다.
심리학용어에 ‘원형’ 이라는 말이 있다. 이 원형은 사회에 흐르고 있는 인간의 집단 무의식을 뜻하는 말이다.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속으로 인정하는 어떤 것 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아버지로서의 원형, 학생으로서의 원형, 선생님으로서의 원형, 종교인으로서, 학자로서, 의사로서, CEO로서, 20대로서, 남편으로서, 남친으로서의 원형 등이 있다. ‘이런 사람은 이러이러해야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일종의 존재규정이다. 하지만 이 존재규정에서 인간은 쉽게 탈피하기 힘들다. ‘쉽게’ 가 아니라 ‘불가능’ 에 가깝다.
나만 그 원형에 반기를 든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것은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근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결’ 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결’ 이라는, 사회를 이루고 있는 에너지는 아이러니 하게도 ‘존재규정’ 에서 나왔을 수 있는 것이다. 사회를 이루는 에너지, 그리고 그 에너지의 방향의 근간에는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원형이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존재규정’ 자체로 힘든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 내면의 욕구와 내 실제의 모습이 불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좌절하는 것이다.
그 때 필요한 것이 자기 객관화의 과정이다. 포인트를 찾아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결여되었는지,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서부터 내가 힘든건지.
인간은 단순하다.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하고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들 조차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자신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훨씬 더 고등해 보인다.
예컨대 문자나 카카오톡에 ‘^^’ 를 붙이면 기분이 좋은 줄 안다. ‘ㅋㅋㅋ’를 붙이면 웃긴줄 안다. 반대로 ‘ㅠ_ㅠ’ 를 붙이면 슬픈 줄 안다. 아무말 없이 덤덤하게 글을 적으면 무뚝뚝하거나 덤덤한 줄 안다. 실제론 이모티콘이 표현하는 감정과 실제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이 일치할 때도 있지만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글도 마찬가지다. 내가 표현해낸 이 글자라는 것은 내 감정의 토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텍스트에 속으면 안된다. 이 사람은 글을 이렇게 썼으니 이럴거야, 이런 사람일거야라고 하는 것은 단정짓는 것이다. 이 역시 존재규정이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를 보면 그 사람의 사고를 알 수 있다. 당연하다. 그리고 명백히 그 사람의 사고를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전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착각이고 오만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감정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요동이 치고 그 순간순간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컨트롤은 일단 반응한 이후의 일이다. 물 엎지른 다음에 닦든지 말리든지 하는 것은 물이 엎지러진 다음에 우리가 판단할 내용인 것이다. 이미 쏟아져 버린 물을 우리는 어찌할 수 없다.
부모가 죽으면 슬프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면 슬프다. 칭찬을 받으면 기쁘다. 욕을 들으면 화가 난다. 그 순간에 우리가 당연히 느끼는 감정들이다. 다만 이것또한 훈련을 통해 단련이 될 수 있다. 조금씩은 무뎌진다. 하지만 그 무뎌짐이 감정이 없어지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충분히 감당하고 참아낼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수는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해서 억지로 바꿨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사람이었다.
나 스스로 내 감정을 잘 모를때가 있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대부분은 멘토나 스승을 찾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 대해 분석한 것을 토대로 자신을 본다. 내 언어가 아닌 그들의 언어로 나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진짜로 나를 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나를 존재규정하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로 나를 바라보려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더 현실반복패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현실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그들의 언어로 나를 표현하고, 그들의 방법을 사용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것을 버려야 한다. 내 언어로 표현하고 내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일’ 도 마찬가지다. 남의 방식을 그대로 배껴서는 곤란하다. 나만의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일의 ‘도(道)’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Good’과 ‘Great’의 차이점이다.
스승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치일 것이다.
3) ‘정보’와 ‘앎’의 차이
‘Information’ 과 ‘Knowledge’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전자는 단순 지식, 쌓아놓은 지식, 체득화 되지 못한 지식을 말하며 사전적으로는 ‘정보’라고 표현된다. 후자는 경험과 삶을 통해서 체득화된 지식을 말하며 이것을 ‘앎’이라고 표현한다. 체득화되지 못한 지식은 내공이 없다. 힘이 실리지 않고 영향력이 미비하다.
‘Great’가 되기 위해서는 ‘Information’ 이 아닌 ‘Knowledge’가 많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것을 흡수해서 벤치마킹 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모두 베껴서는 곤란하다. 훔쳐서 내 것으로 소화해야 비로소 그 지식은 내 것이 된다. 그리고 소화 후 배설해낸 나만의 지식은 본래의 것과는 다른 형태를 띄어야 할 것이다. 내 냄새가 배어있는 지식, 내 감정이 깃들어 있는 지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식이어야 만이 영향력이 실린다. 사람들은 귀신같이 냄새를 맡기 때문이다. 이 말, 이 지식에 힘이 실려있는지 실려있지 않은지.
그리고 실상은 훔쳐가도록 놔둔다고 해서 그것을 아무나 훔쳐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훔쳐갈 만한 사람은 훔쳐간다. 제대로 훔쳐가는 사람은 아마 일만 명 중 한 명 될까 말까일 것이다. 대부분은 흉내내기에 그친다. 마찬가지 이유다. 훔쳐낸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훔쳐낸 지식은 분명 자기 냄새가 베어있다. 그리고 내가 훔쳐낸 지식의 소유주 역시 다른 사람의 지식, 자연의 지식을 훔친 것이다. 그래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지식을 ‘재조립’ 하는 것은 인간의 역량이다. 그 ‘재조립’, ‘창조’가 다른 사람의 지식을, 세상의 지식을, 만물을 나만의 언어, 나만의 사고로 재창조해 낸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우린 자연을 훔쳐냈다. 도둑놈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인간되었던 것은, 그리고 지금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류가 자연을 잘 훔쳐왔기 때문이다.
그 지식이 체득화 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창조’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내면의 완성이다. 아니,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고, 그 완성됨을 찾아가고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와 친해져야 한다. 나를 컨트롤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나 됨을 받아들인다. 오류가 생기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것을 잘 관찰한다. 어린아이가 잘못을 했을때 무조건 고치려 들고 타박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 아이를 억지로 바꾸려 하면 할수록 아이는 엇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자신을 합리화 하는 법을 배운다.
‘아 나는 원래 이런 아이구나’
그것보다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이 중요하다. 왜 그랬을까,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하나하나 짚어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아이들 교육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스리는, 나와 친해지는 작업에도 필요한 것이다.
나를 억지로 바꾸려 하고 통제하면 할수록 나는 엇나간다. 내 내면에서 불일치가 일어난다. ‘포인트’를 찾아내서 바꾸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포인트’ 자체를 보는거다. ‘통제’가 아니라 ‘인정’하는 거다.
내가 소심하고 내성적이라면 그것을 억지로 바꾸려하면 탈난다. 사회는 우리에게 적극적이고 진취적이 되라고 요구하지만 그것은 사회가 보는 관점이다. 사회가 인류전체, 사회에게 내린 존재규정이다. 사회의 흐름이 우리 인류에게 내린 ‘프레임’에 불과하다.
프레임은 본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내 프레임의 설정권을 남에게 양도하면 그 순간 나는 주도권을 뺏기고 만다. 메타 프레임은 내가 설정하고 하위 프레임들은 양보한다. 어찌되었든 그 흐름을 주도한 것은 나다.
미국이 ‘아젠다’를 선점하고 다른 나라들은 미국이 설정한 아젠다 내에서 옥신각신, 갑론을박 한다. 결국 주도권은 미국에게 있다.
애인에게 음식 선택권을 양보해도, 이 애인을 만날지 말지를 내가 결정한다면 그 연애의 주도권은 내게 있다. 물론, 그 연애를 지속할지 말지는 내게 달려있지만 그것 또한 억지로 통제하는 것이 아닌 인정하고 눈높이에 맞추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고 예쁘고 몸매좋은 여자와 못생긴 여자가 있다면 백이면 백 예쁜여자를 선택한다. 성격은 둘 다 좋은데 한 사람은 돈많고 능력이 좋은 사업가고 한 사람은 백수라면 여자들은 백이면 백 사업가를 고를 것이다. 차를 고를 수 있는데 마티즈와 벤츠가 있다면 십중 팔구는 벤츠를 선택한다.
말하자면, 외적인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다. 오히려 자신이 그런 것에서 자유롭기 힘든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면 한결 편하다. 다만, 그런 외적인 것보다는 본질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정신건강에 좋다.
나는 밀을 심는 법을 알려주기 원하지만 대중이 원하는 것이 빵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충분히 효과적이다. 수준을 맞춰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그것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진짜에게는 진짜를 보여주면 된다. 빵을 보여줄 필요 없이 밀을 보여주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을 찾는 것이다. 타인에게도 선을 찾고, 내게도 선을 찾는다. 수준을 맞춰준다. 눈높이를 맞춰준다. 왜 대중들이 내 수준에 못 미치냐고 타박하는 것은 뭘 모르는 행동이다. 대중은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길을 가되, 더 높은 효율성을 추구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 충분히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줄 줄 알아야 한다.
아마도 그런 ‘선’을 찾는 것은 내 일이 될 것이다.
2. 가족의 고리
1) 관찰
어제였다. 갑자기 할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광화문 작은아버지댁에 계시단다. 작은아버지 보다는 10년째 ‘삼촌’ 이라는 단어가 편하다. ‘작은 아버지’는 무겁고 거리가 있으며, ‘삼촌’은 친근하다. 나는 그에게 계속 친근한 존재가 되고 싶고 그 역시 내게 그렇게 느꼈으면 하기 때문이다.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하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종종 서울에 올라오신다. 출장때문이라고는 하시지만 어제 느낀 바로는 대부분이 삼촌 때문이다.
삼촌은 5급 공무원이다. 단 3명만 뽑은 기술고시를 수석으로 패스했다. 5전6기다. 그게 벌써 12년전 일이다. 남들 같았으면 벌써 ‘서기관’을 달았어야 하는 몸인데 삼촌은 12년째 사무관이다.
이유가 있다. 삼촌은 6년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을 했지만 실패했다. 할머니를 제외한 가족들은 숙모를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가족이 이북출신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게다가 삼촌은 고시패스를 한 재원이었지만 숙모는 변변찮은 학교와 학과를 나왔기 때문이었다. 가끔 대학교에서 강사로 뛰었을 뿐이었고.
가족들에게 들은 바 삼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도박이었다. 공무원으로서 도박은 치명적이었다. 도박 때문에 장기간 출근을 하지 않는 적이 많다. 그래도 일은 잘하고 사교성은 있는지 상사들이 삼촌을 많이 봐준 모양이다. 우울증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삼촌이 그럴때마다 발벗고 나서서 삼촌을 끌고 온 것은 할아버지다.
주기적으로 이런 증세가 삼촌에게 찾아오는데 최근엔 좀 낫다 싶더니 어제 할아버지랑 만났을 때는 또 삼촌이 연락이 안된다는 것이다. 엊그제 할아버지가 삼촌을 서울에 와서 만났을 때도 피시방에서 삼촌을 찾았다고 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수염은 덥수룩하게 길렀으며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동료들이 볼까봐 빙 둘러서 피시방을 찾던 삼촌의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는 가슴이 많이 아프고 애가 탄다고 하셨다.
이번에는 아예 할아버지가 일부러 강원랜드를 데리고 갔다고 했다. 도박이 어짜피 해도 안된다는 것을 몸소 체험시켜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런곳을 기웃거리는 삼촌이 이해가 안된다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2) 발견
최근 내 자신을 관찰하고, 현실반복과 창조하는 법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나니 조금씩은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미쳐 느끼지 못한 것이 보인 것이다.
나는 삼촌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 문제는 삼촌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삼촌은 올해로 40대 중반이다. 할아버지는 올해 75세이시다. 70대 중반의 노인이 40대 중반의 한창나이 아들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할아버지가 삼촌의 뒤치닥거리를 한 지 7,8년은 된 느낌이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삼촌을 환자라 보고 늘 삼촌의 일에 개입했다. 아마도 고시패스를 하고 기대주였던 삼촌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엄청난 안타까움을 느끼셨을 것이다. 공부잘했던 큰고모도 서울대 씩이나 들어가서 데모하고 그런 고모의 머리채를 쥐어서 순천으로 데리고 온 것도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도 삼촌도 현실반복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삼촌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며 고시패스를 한 국가공무원이며 신경쓰이게 하지 않고 편안한 결혼생활과 안정된 직장을 유지하며 욕심없이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리고 공무원으로서 지켜야할 품위, 아들로서 해야할 도리 등을 삼촌에게 주입했을 것이다. 일종의 존재규정이다.
삼촌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내가 몇 년 전 한참 고시 공부를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삼촌과 신림동 순대곱창을 먹으며 내게 했던 말이 있었다. 당시 삼촌도 시험지 채점 점수상으로는 서울대를 들어갈 수 있었는데 답안지 마킹을 잘못하여 서울대를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들어간게 인하대 공대였다. 삼촌은 만족하지 못했다. 한참을 실의에 빠져있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자신의 대학과 상황에 만족을 하고 군대에 다녀와서는 무얼할까 고민하다가 큰 고모와 상담끝에 고시를 보게 되었다고 했다.
삼촌은 내게 말했다. 자기는 ‘5개국어’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그래서 군대에 다녀와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도 받고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6년만에 고시에 패스를 했다. 삼촌이 고시공부를 할 때쯤 집안의 가세는 많이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할아버지의 사업은 실패로 돌아가서 집은 빚을 떠안게 되었다. 할머니는 1000일 기도를 하며 삼촌의 고시패스를 위해 기도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삼촌이 포기하려고 할 때쯤 할아버지가 그동안 보던 교재를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하라고 해서 실제로 그렇게 한 이듬해에 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집안이 기울고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던 삼촌은 공무원이라는 직책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판이하게 틀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부모님께 금전적으로 보탬이 되고자 했지만 공무원 신분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집안이 망해가는 꼴을 그대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집안꼴이 우습게 돌아가고 다른 형제자매들도 충분히 힘이 되지 못하고 막장으로 치닫는 걸 보면서 삼촌도 가슴이 많이 답답했으리라. 그래서 삼촌은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도박을 선택했다.
내가 몇 년 전 순천에서 고모의 일을 돕고 있을 때 들은 말이 있었다. 큰 고모도 그렇게 살거면 삼촌에게 나가 죽으라고 했고 막내 고모도 삼촌에게 왜 그러냐고 책망했을 때였다. 그러면서도 막내 고모는 삼촌에게 조금씩 돈을 부쳐줬다. 고모가 삼촌에게 도박이 그렇게 좋냐고 물었을 때 삼촌이 한 대답은 그걸 하면 다른 생각이 안난다고 했었단다.
그 때 처음으로 삼촌이 이해가 됐다. 막장으로 치닫는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가족들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공무원 신분 잘리지 않도록 상사들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는 것과 환자로 둔갑해서 병원에 앉히는 일이 전부였고 가끔 연락 받지 않을 때 서울로 찾아가는 일이 전부였다.
삼촌은 20대 시절 신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었다. 목사가 되고 싶어했다. 믿지않는 할아버지에게도 자필로 편지를 써서 교회에 나가달라고 부탁했었다. 그 편지를 어릴 때 할머니를 통해 본 기억이 난다. 고시공부를 할 때도 교회에서 봉사를 하며 공부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삼촌은 지금 담배와 도박에 쩔어 있고 정신은 피폐해져 있다. 그리고 교회에도 거의 나가지 않는 것으로 안다.
직감적으로 어제 생각이 들었다. 이건 뭔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되었구나. 모두가 잘못되었구나.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겠구나.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이러다가 할아버지 삼촌걱정만 하다 돌아가시겠구나. 백발이 성성해지고 얼굴에 제법 검버섯이 피워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뭉클할 뻔 했다. 그리고 삼촌도 저렇게 자책하고 방황하다가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이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저번에 감정평가사 공부를 따로 하고 있었던 모습이 생각난다. 감평사가 된 후 공무원을 그만두고 자기가 알아놓은 인맥을 동원하면 그래도 승산이 있을 거라는 삼촌의 말이 기억난다. 아마도 그때 곱창집에서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혼한 숙모에 대해서도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함께지내왔던 세월을 끊을 수가 없었다고. 고시 패스한 기간을 기다려준 게 고마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숙모는 대단한 공무원 나셨네 하면서 결국 삼촌과 이혼했다. 지금은 가끔 만난다. 아이와 셋이서 얼마 전 여행도 다녀온 것으로 안다.
할아버지가 내게 의견을 구하셨을 때 나는 말했다. 이래가지고서는 늘 똑 같은 패턴의 반복이라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삼촌이 도박을 하는 이유를 할아버지는 아마도 잘 모르고 계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이론상으로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게임을 삼촌이 하고 있고 그 곳에 시간을 허비하고 출근하지 않고 대기발령이 나버려서, 6개월간 발령이 나지 않으면 이제는 공무원 신분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의 가장 큰 원인으로 도박을 두고 계셨다. 그래서 몸소 강원랜드를 데리고 가셨으리라.
삼촌은 월급도 압류가 되어있는 상태기 때문에 더 이상 강원랜드로 갈 돈도 없었다. 다만 염려하는 부분은 사채를 끌어다 쓸 까 하는 것이다. 아빠는 얼마전 겨우 파산신청에 성공해서 이제 새시작하려고 한다고 했는데 삼촌이 다시 그 바톤을 물려받을 까봐 걱정이 된다고 하셨다.
나는 말했다. 삼촌이 도박을 하는 이유는 현실 도피라고. 도박을 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고. 도박 자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도박하면 어짜피 잃을 것도 아는 데 삼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것뿐이라 이미 그것에 중독되었다고. 그래서 도박을 하는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할아버지는 그런 줄은 몰랐다고, 처음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할아버지가 지금 이렇게 삼촌을 찾아 돌아다니시는 것도 삼촌에게는 오히려 도움이 안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밖에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너는 이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시길래,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자살 충동도 있었으며 중독의 경험도 있었다. 내 경우에는 아마 섹스중독이었으리라. 이 거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치만 계속 나를 분석해보고 관찰해보면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멘토를 만나서 경영수업도 하고 이런 자기를 돌아보는 연습을 개인레슨을 받아가면서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내게는 신뢰가 간다고 말씀하셨다. 아마 더 이상은 졸업에 관한 이야기도 안하실 것 같다. 만약의 경우 대학을 중퇴할 수 도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대학 졸업장은 따야지 사회에서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예’ 하며 최대한 따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해결책은 뭐가 있냐고 물으셨다. 내가 현재로서 대답할 수 있는 수준은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그냥 할아버지도 삼촌을 바라보실 때 ‘공무원으로서’, ‘가족의 기대주로서’, ‘내 자식으로서’ 바라보시는 게 아니라 좀 더 객관적인 입장을 취해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게 어떠냐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도 삼촌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 삼촌을 인정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동시에 삼촌은 자신의 현재 모습을 돌아보고 어디부터 손봐야 될 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게 그대로 지켜질 거라 큰 기대를 가질 수 도 없었으며 내가 한 말도 역시 완전한 솔루션이 아닌 이상적인 이야기, 원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길 원하시는 할아버지에게는 그리 크게 와닿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쨌든 내게는 할아버지도 이런 생각을 한번 쯤은 하시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해결책은 뭐냐고 내게 물어보셨을 때 나 역시 답답했다. 확실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렴풋할 뿐이었다. 죽은 기업을 살리는 느낌이다. 심폐소생 시키는 느낌이다. 아직은 내가 원포인트를 만들어 그것을 재조립해서 보여주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성과는 있었다.
본래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으나 할아버지와 이야기가 길어져서 점심은 같이 하지 못했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소방서에 부탁해 삼촌의 번호로 위치추적을 해 놓아서 소방서에 연락이 왔었다. 그래서 종로소방서까지 걸어서 갔다. 나는 소방서로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우리 때문에 소방차와 소방관 아저씨들 7,8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적잖이 놀라면서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삼촌은 이런 사실을 알면 어떤 느낌일까. 기가막힐까. 할아버지는 꼭 이렇게 까지 해야했나. 삼촌이 가는 곳은 뻔하다. 벌써 오전에 근처 피시방을 둘러보셨다고 했다. 얼마전 갑상선 수술까지 하셔놓고 땀을 뻘뻘 흘리며 헉헉대며 돌아다니셨다는 할아버지. 한탄을 하면서도 그것을 계속 반복하신다.
가족들은 삼촌을 원망하고 안타까워하고 정작 삼촌은 그런 자기 모습에 실망하면서, 가족들에게 미안하면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할 지 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할아버지께 연락을 드리진 못했다. 또 반복할까봐서다. 해결책은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나은 해결책이.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지만 감은 온다. 적어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접근해야할 것이다.
광화문에서 할아버지를 만나고 빛나의 커피집을 들러서 빛나를 만났을 때도 좀 전의 그 기분때문에 마음껏 웃지를 못했다. 멍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최대한 그 기분에 영향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만으로 다행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장난도 치고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어제 교육을 마친 후로는 기분이 좋은 채로 있었다. 그래서 충분히 살가워질 수 있었고 즐거웠다. 그 즐거운 기분은 빛나 역시 느낄 수 있었다. 항상 결과값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를 보면 너를 알 수 있고, 나를 보면 사회를 알 수 있다. 반대로 너를 보면 나를 알고, 사회를 보면 나를 알 수 있다.
나 역시 지금까지 현실반복을 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 수 없었다. 내가 바로서야 사회가 바로선다. ‘나’ 라는 개인은 지구로 봤을 때는 아주 작지만, ‘지구’ 역시 우주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영향을 미치며 살아간다.
그 모든 것의 근본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
우린 비슷한 인자를 가지고 있나봅니다 ^^
세상을 뒤집을 연구를 합시다.
흐름이 감미로운 글 같습니다.
구조론 사이트에서 보는 큰 즐거움중의 하나를 맛봤다면 이것도 이미 존재규정^^?
상부는 철인의 글, 하부는 보통인의 글.
두 부분의 절묘한 대칭으로 이미 기승전결의 기는 완성!
'호기심 수련'으로 훔칠 능력을 배가시키겠다는 다짐이 서고...,
두분의 구조론 연구 시작을 축하합니다.
'호기심 수련' 으로 훔칠 능력을 배가 -> 굉장히 마음에 드는 표현입니다 ^^
감사합니다.
신용이 창출되고, 이상과 현실이 가까워지고, 생각과 행위가 일치 되어지면 안정이 생김. 신용을 창출하여 기대치를 스스로 가져야 함. 밖에서 보여지는 신용과 안에서의 자신과 그 대응에서 일치 시켜 가려는 의지가 필요함. 이런 작업이 위선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필요함. 이것이 인격임.
창출된 신용을 지배하면 도박은 더이상 할 수 없음. 더이상 뒷문으로 인생을 팔고 다니지 않음. 정문으로 당당하게 정면승부하게 됨.
귀족님의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어서 써봤네요.
쓰는 사람은 주관적이기도, 객관적으로 쓰기도 하지만, 대체로 읽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읽음. 그래서 모든 문학이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지네요. 읽는 사람이 자신의 주관을 개입하여 감정개입하는 것은 또 그 사람만의 문제이거나 일.
흠...한편의 에세이를 본 것 같아요.^^
맞아요. 내부에서부터 나에 대한 신용창출이 이뤄져야 겠지요.
그게 바로 창조로 가는길일테지요.
내가 스스로한테 신용이 있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남에게도 신용을 쌓을 수 가 있겠죠.
타인과 나의 신뢰, 다른 말로 래포는 나와의 래포와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방황하더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겠지요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요.
님 참 훌륭하십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쓰시다니.
일단 내면의 도구를 사용하려면 자기자신을 솔직히 관찰하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가져야죠.
참고로 '귀족님'은 지난주부터 저와 함께 구조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귀족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친구가 늘어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