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인문학을 경원하는 이유는 족보를 모르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역사는 족보에서 시작되었다. 공자가 육예를 분류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류학을 창시하면서 인문학이 시작된 것이다.
육예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였는데 공자가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역경(易經), 춘추(春秋)로 대체했다. 그때부터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으로 분류했는데 하위 카테고리로 자연학 수학, 철학,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시학 등을 열거하였다. 문제는 인류의 정신이 여기서 멈추어 버렸다는 점이다.
동양은 공자에서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고, 서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1센티도 나아가지 못했다. 아직도 철학을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철학은 깨달음이며 그것은 구조를 보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유형의 구조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구조를 보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면 예술이다.
구조는 여러 가지 잡다한 것을 한 줄에 꿰어냄으로써 하나의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통짜 덩어리의 모습을 연출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성이다. 무엇이 다른가? 반응한다. 소리가 난다. 공명한다. 증폭된다. 전파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상주의다. 그리스의 이상주의가 처음으로 기준을 제시했다. 원형의 제시다. 밀로의 비너스는 완전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후 어떤 것을 만들더라도 밀로의 비너스 앞에서는 초라해져 버린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다. 다빈치가 하나의 소실점을 제시하자 팀플레이가 살아나서 불완전한 요소의 집합이 완전해져 버렸다. 밀로의 비너스가 혼자 우뚝하다면 다빈치의 원근법은 팀의 완전성을 제시한다.
그렇다. 정답이 나온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은? 당신이 그 어떤 큰 숫자를 말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거기에 플러스 1을 가하여 제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답은? 정답은 점점 커지는 것이다. 진화하는 것이다. 누구도 당할 수 없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그 광경을 보여준다. 처음 중앙의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과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여 백화제방 백가쟁명으로 전개해 간다. 점점 커진다. 그것은 커다란 주머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천년이고 만년이고 계속 커질 것이므로 그 어떤 것도 담아낼 수 있다. 비로소 완전하다.
그러나 역시 문제가 있다. 크면 클수록 비용이 든다. 집이 크면 땅값이 들고 사람이 크면 밥값이 들고 지식이 크면 책값이 든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미켈란젤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관계의 소실점을 보여준다.
유형의 소실점을 찾아내기는 쉽다. 무형의 소실점, 마음의 소실점, 에너지의 소실점, 기운의 소실점을 찾아낸 사람은 적다. 그것은 목록만 보유하고 명단만 보유하는 것과 같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구글만 있으면 검색할 수 있다. 사랑이 아무리 멀리가 버렸어도 전화번호만 알면 통화할 수 있다.
천지창조는 신의 손끝과 인간의 손끝이 만나는 아슬아슬한 경계지점을 보여준다. 그것이 명단이고 목록이고 검색어고 전화번호다. 비로소 완전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잊어버렸다. 그들은 다빈치의 소실점을 잊고 라파엘로의 방향성을 잊고 미켈란젤로의 관계를 잊어버렸다.
미켈란젤로가 전화번호를 알려줬는데도 잊어먹은 그들은 이 골목 저 골목을 쏘다니며 애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다빈치가 고기 잡는 그물을 던져줬는데도 잊어먹은 그들은 작살들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치고 있었다. 라파엘로가 고속도로를 닦아줬는데도 잊어먹은 그들은 산길을 헤매고 있었다. 그것이 매너리즘이다. 그들은 족보를 팔아먹고 각성받이로 퇴행하였다.
그것을 되살린 사람이 세르반테스다. 돈 키호테는 중세의 기사도라는 이상주의와 르네상스 시대의 현실감각을 충돌시켰다. 거기서 얻은 것은 마음 안의 소실점이다. 그렇다. 세상의 소실점은 다빈치가 알려줬으나 내 마음 안의 소실점은 세르반테스가 처음 알려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이후 모든 작폼은 돈 키호테의 복제다. 스탕달의 적과 흑은 붉은 색과 검은색 곧 혁명 혹은 사랑이라는 내면의 에너지와 인간의 존엄 곧 명예 사이에서 좌충우돌 하는 쥘리앵 돈 키호테를 보여준다. 쥘리앵은 출세라는 풍차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였다. 그리고 아낌없이 산화하였다. 하얗게 불태웠다.
하나 안에 서로 모순되는 둘이 충돌할 때 조형적 질서가 탄생한다. 그 충돌하는 지점이 악기의 현이다. 그곳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건드리면 소리가 난다. 그 지점이 약한 고리다. 이후의 모든 전개는 각자 자기 스타일로 그 구조를 창의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상주의다.
세잔은 형태에서 그것을 찾았고 고흐는 질감으로 표현되는 에너지에서 찾았고 추사는 기운에서 그것을 찾았다. 그것은 마음이며 마음 안에서 심이다. 중심이고 핵심이고 핵이고 센터이고 코어다.
채플린의 모든 영화는 주성치의 모든 영화, 김기덕의 모든 영화와 본질에서 같다. 단지 각자 자기 스타일로 나타낼 뿐이다. 주성치의 미학은 싸이의 ‘Dress Classy, Dance Cheesy’와 같다. 서로 모순되는 둘을 충돌시켜 웃음을 유발한다.
이 외에는 없다. 그것을 영화로 나타내든, 글로 나타내든, 음악으로 나타내든, 춤으로 나타내든 무방하다. 빛으로 나타내든 질감으로 나타내든 형태로 나타내든 무방하다. 자기 안의 조형적 질서를 드러내면 된다.
그것은 끼다. 자기 안의 민감한 센서가 반응하는 지점을 포착하면 된다.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같은 지점에서 반응한다. 여기에 보편성이 있다. 보편성이라는 그릇은 하나이지만 무한히 담아낼 수 있다.
노무현이 주류고 김기덕이 주류다. 왜? 정통성이 있으니깐. 족보가 있으니깐. 보편성이 있으니깐. 정통성은 족보에서 나온다. 곁가지는 안 쳐준다. 왜? 가짜니깐. 팀 플레이가 안 되니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없으니깐. 호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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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솟았다. 그러나 홀로 우뚝할 뿐 아직은 팀플레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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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팀플레이가 가능해졌다. 완전하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점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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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커져나가는 방향성이 있다. 점점 커지므로 어떠한 것도 담아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요소가 있다. 그림이 너무 커서 작은 캔버스 안에 담아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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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완전하다. 아담과 하느님의 손끝이 만나는 지점이 찾아야 할 급소다. 이것 하나면 충분하다. 캔버스의 크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작은 바늘귀 안에도 우주를 통째로 담아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잠시 반짝했을 뿐 이후 인류는 다시 잠들었다. 매너리즘이라는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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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가 잠든 인류를 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계속 잤다.
돈 키호테는 캐릭터의 등장이다. 한 사람 안에 두 마음이 있다. 마음 안에 소실점이 있다. 여기서 근대는 호흡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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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의 적과 흑은 돈 키호테의 근대버전이다. 적으로 상징되는 사랑과 흑으로 상징되는 존엄 사이에서 인간은 운명에 치인다. 제 안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꺼집어내고 깨끗하게 산화할 밖에. 봄날의 사쿠라처럼 한 순간에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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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는 서양의 원근법을 제멋대로 해석한 건데 사실은 동양의 전통적인 선종불교의 영향아래 있다. 원과 근의 충돌이 있는가 하면 정과 동의 충돌이 있다. 그림에 기운이 있다. 에너지가 있다. 동양화에는 원래 그것이 있다. 인상주의는 동양화에 천년 전부터 있었다. 다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왜? 평론가가 없어서. 추사가 설명해 주기 전까지는 그것을 제대로 짚어내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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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는 빛을 그렸다. 추사는 기운을 그렸다. 고흐는 에너지를 그렸다. 김기덕은 깨달음을 찍었다. 물론 평론한다는 밥통들이 그것을 알아챌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반응한다. 종이 소리를 내듯이 저절로 반응한다. 황금사자는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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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과 창녀가 만나는 지점이 약한 고리다. 사건은 그곳에서 일어난다. 아름다움도 그곳에 있다. 밥통평론가들이 끝끝내 보지 못하는 완전성의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다. 그래서 상쾌하다. 통쾌하다. 개운하다. 말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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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이나 주성치나 코드는 같다. 김기덕 영화가 이해되지 않으면 주성치 영화나 봐라. 이것 보고도 모르겠다면 고행석 화백의 불청객 시리즈나 봐라. 돈 키호테 이후 모두 같다. 구조가 같다. 오늘도 쥐벙커 저 강도는 풍차를 향해서 돌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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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의 모자와 수염과 지팡이는 부르조아 신분의 상징이다. 그것은 돈 키호테의 기사 갑옷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스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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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온 순진한 바보가 알고보니 슈퍼맨이었다. 자동으로 돈 키호테다. 둘시네아 공주는 박은하다. 마구만은? 당연히 산초 판사다. 산초 판사는 꾀 많은 하인이다. 마구만은 산초 판사의 꾀로 구영탄을 이기지만 구영탄은 초능력으로 제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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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빛은 작고 세잔의 형태도 좁다. 고흐의 에너지는 강력하다. 왜? 고흐는 붓의 마음, 안료의 마음, 캔버스의 마음까지 담아내기 때문이다. 마네의 그림이 빛과 어둠의 다툼을 드러내는 1차원이라면, 세잔의 그림은 물체의 양감과 빛의 음영이 다투는 2차원이다. 고흐의 그림은 작가의 마음과, 붓의 마음과, 캔버스의 마음과, 풍경의 마음과, 안료의 마음이 다투는 6차원, 7차원 그림이다.
마네가 바이올린 독주라면 세잔은 4인조 앙상블이고 고흐는 장중한 오케스트라다. 이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게임이 안 된다. 그래서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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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은 남조시대 혹은 당나라 시대부터 그런 그림을 그려왔다. 그러나 추사가 해설해 주기 전 까지는 막연히 느낄 뿐 그 이치를 소상히 알지 못했다. 선종불교가 모호하게 힌트를 주곤 했다. 그러나 불립문자에 묵언수행 하느라고 설명하지는 못했다.
추사의 글씨에는 금석에 새기는 돌글자와 목판에 새기는 나무글자와 종이에 쓰는 종이글자가 한 페이지 안에서 경쟁하고 있다. 작가의 마음과, 붓의 마음과, 캔버스의 마음과, 먹의 마음과, 자획의 마음이 엄숙한 오케스트라를 이루고 있다. 추사는 이미 고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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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활은 알아먹지 못하는 밥통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준 것이다. 너무 설명이 자세해서 미학적 가치는 떨어졌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 장면 안에 다 있으니까. 이 하나의 컷에 감독의 마음, 배우의 마음, 스크린의 마음, 스토리의 마음, 관객의 마음이 모두 모여 있다. 웅성대고 있다. 떠들썩 하다. 그래서 신명이 난다.
이 한 장면에서 신을 느끼지 못한다면, 소크라테스를 느끼지 못한다면, 공자를 느끼지 못한다면, 예수를 느끼지 못한다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인문학의 족보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빈치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와 세르반테스와 스탕달과 헤밍웨이와 고흐와 추사가 모여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실패다. 그러나 상관없다. 한 명이 알면 다 아는 거다.
왜? 오직 미켈란젤로 한 사람이 관계의 소실점을 찾았을 뿐인데 나머지 인류는 모두 잠들어 있었는데도 지금은 60억 모두가 알잖아.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하나가 깨달으면 60억이 깨달은 거다.
흔들리는 파도 위에, 떠 있는 배 위에, 불어오는 바람 위에, 실려가는 음률 위에, 가늘게 떠는 마음 위에, 지켜보는 시선 위에, 공명하는 북가죽 위에, 활과 현이 만나는 지점에서, 천 년의 역사가 연주된다. 제 울음을 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