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동차의 조립과 작동은 순서가 반대다. 조립은 부분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지만, 작동은 전체의 기능이 부분에 집약된다. 자동차 전체가 작동에 관여하지만 바퀴 한 부분으로 표현된다. ◎ 자동차의 조립 – 부분 > 전체 ◎ 자동차의 작동 – 전체 > 부분 인간의 인식과 행동도 같다. 인식은 눈, 코, 귀, 입, 몸이라는 신체의 말단부에서 오는 정보가 뇌에 모여서 전체의 인격을 형성한다. 행동은 반대로 전체의 인격이 손과 발의 몸짓으로 나타난다. ‘세팅’과 ‘작동’이라는 두 근본이 있다. 순서는 반대다. 인간의 모든 오류는 이 모순 때문에 일어난다. 이 모순 때문에 인간은 원래 세상을 잘못 인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한다. ◎ 인간의 인식 – 부분(개인) ≫ 전체(공동체) ◎ 인간의 행동 – 전체(공동체) ≫ 부분(개인)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멀쩡하게 사는 것은 인간이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체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다. 공동체가 인간 행동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 인간은 개인의 이기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걸려있는 집단의 스트레스가 개인의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개인의 모순을 공동체에 전가하고 빠져나간다. 공동체는 세팅과정이 없이 원래부터 존재하여 있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국가도 있고 가족도 있었다. 그러므로 세팅과정이 생략된다. 이에 인간은 세팅과 작동의 모순을 피해갈 수 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의지를 자기 행동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이 어떤 판단과 결정을 내렸다면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소속된 공동체의 명령을 실행한 것이다. 사이비 종교의 인지부조화 행동을 통해 이를 관찰할 수 있다. 인간의 잘못된 행동은 잘못된 인식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행동을 정해놓고 필요한 인식을 조달하기 때문이다. ◎ 인지부조화 – 정해진 행위에 맞추어 필요한 인식을 조달한다. 주사파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인식이 잘못되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행동을 정해놓고 거기에 필요한 인식만 조달한다. 잘못임을 알지만 행동을 바꿀 용기가 없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은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늑대가 사슴을 막다른 길로 유도해도 어쩔수없이 그 쪽으로 달려간다. 이미 가속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연속된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 이미 첫 단추를 잘못꿰어버린 이상 계속 그리로 달려갈 뿐이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작동원리 때문이다. 전체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어쩔수 없이 리세팅을 해야하는 경우다. 가족이 없는 고아로 태어났다면 자기 가족을 정해야 한다. 가족을 상실했다면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 인간은 행동에 돌입한 상황에서 방향을 바꾸지 못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바꾸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이혼했다면, 파산했다면, 실직했다면, 질병에 걸렸다면 어쩔수없이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 리세팅을 해야 한다. 국가도 정기적으로 리세팅을 한다. 선거다. 정부가 새로 들어선다. 사람도 리세팅을 한다. 연애다. 가족을 새로 맞는다. 이때 인간은 세팅과 작동의 모순에 고통을 겪는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공동체에 소속되며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로 삼아 세팅과 작동의 모순을 피해가지만 운명적인 리세팅에 직면하여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게 된다. 국가라면 정부가 새로 들어서는 절차가 있고 가족이라면 부부가 새로 맺어지는 절차가 있다. 이때 세팅과정과 작동과정은 반대다. 세팅모드에서 작동모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어렵다. 소통해야 한다. 공동체는 언어에 의해 기능한다. 문제는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하다는데 있다. 언어로는 충분한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 소통할 수 없다. 언어는 세팅원리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약속이며 사전에 약속된 범위 안에서만 소통이 가능하다.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세팅원리가 아닌 작동원리로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작동원리로 나타나는 것이 미학이다. 미학이 소통을 보완한다. 미학은 양식학이다. 양식은 문화다. 개인의 미학은 스타일이고 집단의 미학은 문화이며 공통되는 바는 양식이고, 양식에는 표준이 있으며 그 표준이 소통의 코드가 된다. 미학은 윤리, 도덕, 관습, 패션의 유행, 문학작품의 히트, 영화의 흥행, 유행어의 탄생 등 다양한 모습으로 표상된다. 변화하고 발전한다. 사회의 진보는 끝없이 새로운 소통의 표준을 세우는데 있다. 미학원리는 세팅원리가 아닌 작동원리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세팅원리다. 학교는 자동차의 조립을 알려줄 뿐 작동은 알려주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을 알려줄 뿐 사랑은 알려주지 않는다. 자동차 운전학원은 있어도 남녀 사랑학원은 없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인간은 기존의 소속을 잃고 새로운 자기 소속을 찾아야 할 때 이러한 번뇌에 빠져든다. 모든 것은 부분에서 전체로 세팅된다. 국가든 개인이든 자연이든 인간이든 마찬가지다. 이 방향은 플러스 방향이고 역방향이다. 모든 것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작동한다. 마이너스 방향이 순방향이다. ◎ 순방향 작동 – 전체 ≫ 부분 ◎ 역방향 세팅 – 부분 ≫ 전체 두 방향은 충돌한다. 남녀간의 연애라도 그렇다. 서로를 알아가는 인식과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실천과정은 상반된다. 연애는 손부터 잡고 키스로 가서 섹스로 전개하는 역방향으로 진행한다. 사랑은 반대로 그 사람의 전체를 보고 부분에 접촉한다. 손을 잡았다 해도 손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전체에 관심이 있다. 입술을 마주쳤다고 해서 상대방의 입술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섹스를 했다고 해도 실은 상대방의 인생 전체에 진지한 관심이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생겨난 오해가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흔히 볼수 있는 남녀 사이에 미의 기준이 다르다는 이야기들이다. 여자가 ‘예쁘다’고 말하는 것과 남자가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 다르다고 한다. 남녀사이에 미의 기준이 다른가? 아니다. 미의 기준은 같다. 남자에게 예쁜건 여자에게도 예쁘다. 그렇다면 왜? 남자는 여자의 전체를 보려고 한다. 여자는 연출된 부분만 보여주려 한다. 남녀 사이에 미의 기준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의도의 차이가 있다. 남자는 여자의 숨겨진 부분을 알아내고자 한다. 여자에게 예쁜건 남자에게도 예쁘다. 단 관심없다. 남자는 예쁜것보다 다른 많은 것에 관심이 있다. 여자의 지능이나 성격까지 알아내고자 한다. 특히 자신에게 우호적인지 알아내려고 한다. 남자의 ‘예쁘다’는 말에는 단순한 시각정보 이상의 많은 의미가 들어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게 된다. 소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남자든 여자든 의도와 다르게 행동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세팅과 작동, 인식과 행동 두 기준이 있지만 둘은 다시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된다. 우주는 작동이 중심이며 인간은 행동이 중심이다. 세팅의 기준과 인식의 기준은 그림자다. ◎ 세팅과 작동 두 가지 기준이 있다. ◎ 두 기준은 다시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되며 그것은 작동이다. 세상의 작동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므로 전체가 중요하다. 세팅보다는 작동, 인식보다는 행동이 중심이다. 세팅과정도 하나의 작동과정이며 인식과정도 하나의 행동과정이기 때문이다. 세팅은 기준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세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식은 기준이 될 수 없다. 아직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며 불완전하므로 기준이 될 수 없다. 전체를 기준으로, 행동을 기준으로, 작동을 기준으로, 공동체를 기준으로, 존엄을 기준으로, 완전성을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전체는 우주론이다. 우주의 모습에 따라 개인의 인격이 결정된다. 그 인격에서 동기부여 하여 개인의 행동이 촉발된다. 인격은 공동체 안에서의 자기 포지션이다.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다면 공동체의 규모가 작다. 그 사람의 인격도 작아질 수 밖에 없다. 집단의 리더가 되면 공동체의 규모가 크다. 그 사람의 인격도 그만큼 커진다. 인격은 공동체 안에서 자기가 찾아낸 포지션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되며 인간의 행동은 포지션에 의해 결정된다. 인식과 행동의 모순에 따라 인간은 원래 세상을 잘못 알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으면 이를 공동체에 위임하도록 되어 있다. 전체에 떠넘기는 것이다. 세상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므로 부분의 모순을 부분에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집단에 문제를 떠넘긴다. 아이는 울도록 되어 있다. 약자는 비명을 지른다. 철부지는 어리광을 부린다. 용사라도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있다. 인간은 눈물, 비명, 어리광, 스트레스로 문제를 집단에 떠넘긴다. 이에 따라 무의식중에 집단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집단의 의지에 조종된다. 어리광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주변인물을 자기편이라고 여기는 태도이다. 이는 사건에 임하여 집단을 특정해 내는 절차다. 인간은 국가, 부족, 가족, 동료 등 여러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이때 자신의 소속집단을 불러내는 절차가 어리광이다. 어리광은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얻은 공동체적 생존전략이다. 어린이는 자신이 잘못을 했어도 선생님은 자기편을 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는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본능이다. 머리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아도 본능의 명령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린다. 저절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무조건 자신이 억울하다고 말하게 된다. 억울하다는 말은 선생님이 당연히 내편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는 이유없는 본능적 당위다. 판단해야할 사실관계와 무관하다. 호르몬의 명령이다. 이때 자신의 잘못이 클수록 오히려 선생님이 더 강하게 내편을 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잘못이 크다면 중대한 사건이며 중요한 사건은 공동체를 개입시켜 해결을 위임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어린이라면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무조건 내편을 만드는게 더 생존에 유리하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도 이런 철부지 짓을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자기와 피부색이 다르거나 무엇 하나라도 다른 점을 찾아내기만 하면 곧 적대행동을 하며 주변사람들이 당연히 자기편을 들어야 한다고 믿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바로 행동에 돌입한다. 옳고 그름에는 무관심하다. 어떻게든 센세이션을 일으켜서 사건에 공동체의 관심을 집중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에서 공동체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목적이다. 센세이션 자체가 목적이 된다. 문제해결에는 관심없다.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소집훈련을 해야 위기때 작동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행위가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건수만 발견하면 비상을 건다. 외부의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적대행동에 돌입하고 울면서 비명을 질러 공동체의 개입을 요청하는 식으로 어리광을 부린다. 이러한 철부지 행동은 주변사람 모두를 곤란하게 만든다. 자신이 집단의 리더가 되었을 때 깨닫게 된다. 부하들이 어리광을 부리며 사고를 쳐놓고 자신의 개입을 요청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센세이션을 억누르고 문제해결에 집중하게 된다. 부하가 터무니없는 일을 저질러놓고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애원하며 ‘내가 사고친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한번 뭉쳤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오면 용서할 수 없게 된다. 부하의 어리광을 중지시키게 된다. 어리광은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들어 문제해결을 용이하게 한다. 다만 의도적으로 문제를 만들어낸다. 일체의 차별과 편견은 센세이션을 일으킬 목적의 어리광 때문에 일어난다. 인간은 과거부터 해오던 관성에 따라 집단의 행동을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필요한 인식을 짜맞추기로 조달한다. 그런데 개인 차원의 사소한 일은 그냥 개인 차원에서 알아서 해결한다. 그러나 이 때도 개인 전체를 중심으로 판단한다. 개인 전체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섭한다. 인간은 무의식 중에 과거를 감안하고 미래까지 계산하며 자기 행동의 바운더리를 의식해서 행동한다. 이때 문제해결보다 문제의 규정이 더 중요하다. 경마장에 온 경마꾼은 문제해결 곧 경마로 돈을 따는 일보다 문제규정 곧 자신이 참된 경마꾼인가에 더 관심이 있다. 공동체에 소속되고자 한다. 돈을 따서 이익을 얻는 베팅이 아니라 경마장이라는 낯선 공간에 확실한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베팅을 한다. 자신의 어리광 행동이 자연스럽게 경마장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게 한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경마꾼이 되는 베팅을 하면 돈을 몽땅 잃는다.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도 돈을 버는 투자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주식꾼이 되는 투자를 한다. 어리광 투자를 하면 당연히 거지가 된다. 어리광 투자는 경마꾼이 무의식중에 경마장이 자기편이라고 믿거나 주식꾼이 무의식중에 증권시장이 자기편이라고 믿는 것이다. 크게 잃어야만 그룹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문제는 자기규정이다. 범죄자는 남의 돈을 훔쳐서 이익을 얻는 목적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범죄자가 되는 범죄를 저지른다. 자신을 범죄자로 자기규정 하는 것이다. 도둑이 필요한 돈을 훔쳐서 재기하는 경우는 없다. 범죄자는 범죄자로서의 자기규정 때문에 결국 상습법이 되어 감옥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는 수구꼴통이나 좌파꼴통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기는 승부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파로, 혹은 좌파로 자기규정하는데만 관심이 있다. 좌파 혹은 우파를 자신의 소속으로 여기고 집단 안에서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패배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조치는 첫째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완전성에 대한 이해다. 우주, 세상, 진리, 문명, 공동체 전체에 대한 감각을 얻어야 한다. 모든 판단의 기준을 거기에 두어야 한다. 물론 사소한 문제라면 상관없다. 중요한 일에 직면해서, 리더가 되었을 때,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상실에 직면해서, 죽음과 이혼과 실직과 패배 앞에서는 바운더리 전체, 과거-현재-미래 전체를 통짜덩어리로 인식해야 한다. 둘째 언어의 부조리를 인식해야 한다. 깨달음을 말하는 사람이 ‘모른다’를 선언하며 인식의 한계를 넘을 것을 주장하곤 하지만 그 ‘모른다’는 말에 집착하는 것도 역시 언어에 의존하는 것이다. 어떤 단어로도 깨달음은 나타낼 수 없다. 미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언어는 지극히 작은 부분이고 인간은 윤리와 도덕과 패션과 관습과 유행과 문화와 차 한잔으로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낸다. 셋째 공동체를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소속한 가족, 집단, 교회, 국가, 인류의 집단적 의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반드시 조종되고 만다. 원래 그렇다. 이는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얻은 본성이다. 개인의 행동이 공동체에 센세이션을 일으켜 타인을 사건에 개입하게 하기 위한 어리광임을 인식하고 극복해야 한다. 이는 중간단계가 아닌 최고단계의 자기 소속을 찾음으로써 가능하다. 넷째 감성을 훈련해야 한다. 스트레스와 유머에 민감해져야 한다. 스트레스와 유머는 집단 안에서 개인의 위상 곧 포지션을 나타낸다. 누가 갑이고 을인지 누가 주고 종인지 상호관계로 나타난다. 집단에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도 자신이 전혀 스트레스 받고 있지 않다면 자신의 포지션이 낮은 것이다. 또 문제가 있을때 유머로 다독이지 않고 바로 스트레스를 발산하면 역시 지위가 낮다. 최고의 리더는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리광으로 나타내지 않고 유머의 통쾌함으로 극복해내는 사람이다. 집단의 스트레스를 능동적으로 제어해낸다. 이에 민감해져야 하고 훈련되어야 한다. 예술이나 패션이나 유행이나 문학은 이를 조율한다. 갑을관계, 주종관계, 상하관계로 인하여 일어나는 내부의 마찰을 해소하고 그 긴장을 전달한다. 다섯째 시대의 미션을 실천해야 한다. 인간이 공부를 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돈을 버는 것은 세팅이지 작동이 아니다. 공부하여 인격을, 연애하여 공동체를, 돈을 벌어 미션을 작동하는 것이 진짜다. 세팅만 하고 작동은 못한다면 자동차를 제작하기만 하고 타고가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대부분이 그렇다. 인생 헛살은 거다. 유명해져도 출세해도 성공해도 세팅의 성공은 진짜가 아니다. 보수주의로는 성공해봤자 시대의 미션과 다른 역주행이므로 실패다. 이는 축사의 돼지가 살쪄봤자 실패고, 서커스단의 원숭이가 곡예해봤자 실패인 것과 같다. 도둑이 범죄를 성공해봤자 실패다. 시대가 가는 방향, 인류가 가는 방향, 진리가 가는 방향, 공동체가 가는 방향으로 정주행 해야 한다. 작동을 해야하며 세팅만 계속한다면 곤란하다. 사랑을 해야 하며 미팅만 계속하면 곤란하다. 깨달음은 존재의 이해, 언어의 이해, 공동체의 이해, 미학의 이해, 미션의 이해이며 이를 세팅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시키는 것이다. 진리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함께 연주하는 것이다. 스님들이 이런 저런 말을 하지만 행하지 않고 말할 뿐이다. 실패다. 무사가 칼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벼리기만 한다. 선비가 글을 쓰지는 못하고 먹만 갈고 있다. 종교의 한계 안에서는 이미 실패다. 진정한 길로 가야 한다. 깨달음은 21세기에 우리가 세계를 리드하며 먹고살 양식이다. 물려받은 자산이다. 모든 아이디어와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그것은 세팅에서 작동으로 확 바꾸는 것이다. 언어의 난삽함을 버리고 미학적 양식의 명쾌함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스타일과 안목을 모두가 부러워하고 따라해야 한다. 그러러면 우리가 가장 앞서있어야 한다. 정치에서도 산업에서도. 구조론은 몰라도 된다. 그러나 구조론적인 마인드와 사고와 룰은 지켜야 한다. 구조론적인 삶의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 구조론적인 자연스러움 안에 있을 때 깨닫지 못해도 이미 깨달은 거다. 반면 역주행을 한다면 아는 것이 있어도 안 쳐준다. 보수는 근본 세상에 대한 안티이므로 배제된다. 보수인데 깨달았다는 따위는 성립될 수 없다. 진리의 역주행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안티다.
부처님이 심심해서 온 것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려고 온 것도 아니오.
2500년 전에 살았던 어떤 아저씨도 아니오. 그것은 우리가 함께 가야하는 큰 길이오.
알고 가든 모르고 가든 결국 그리로 가게 되어 있소. 역주행을 하든 순방향으로 가든 결국 모두가 가게 되어 있소.
우리는 이미 부처라는 큰 생명체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이 되어 있소. 당신이 부처의 발가락이든 손톱이든 혹은 손톱 밑의 때든 상관은 없소.
왜냐하면 어차피 구조는 전체에서 부분의 한 방향으로 작동하므로 당신이 어디에 위치하여 있든 당신을 거쳐갈 것이기 때문이오.
부처는 반드시 당신의 눈앞으로 지나가게 되어 있소. 그때 미소를 짓든 혹은 인상을 쓰든
당신은 이미 스틸컷 안에 있으며 그것은 순전히 당신의 몫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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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
여기 또 하나의 미소가 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