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대(선불교 22조)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
원오극근선사가 묵적 다선일미를 호구소룡에게 써서 줌.
원오선사의 문하에 크게 촉망받는 제자가 두 명 있었는데 바로 대혜종고(大宗?:1089~1163)선사와 호구소륭(虎丘紹隆:1077~1136)선사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어려서 출가하여 협산사에서 원오 선사를 20여년이나 스승으로 모시며 정진하였다.
원오극근선사의 묵적과 일본다도의 다선일미의 비밀
일본 다도의 본격적인 시작은 난포조묘(南浦紹明·1235∼1308)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800년 전 난포조묘 선사가 남송 시대 고승 허당선사(虛堂 智偶·1185∼1269)로부터 ‘경산다연’(茶卓, 茶典)을 가져간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난포조묘는 숭복사(崇福寺)의 개산조였다. 일본 고불서(古佛書)인 ‘속시청초(續視聽草)’와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에는 “난포조묘가 송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차 탁자와 차 도구를 숭복사에 가져왔다”고 했다. 이때 경산에서 중국의 차전(茶典) 7부도 일본에 전했는데 ‘차전’ 중에 ‘다도청규’ 3권도 들어 있었다.
중국 차학의 대부격인 좡완팡(莊晩芳) 선생은 “경산다연은 일본으로 건너가 화(和)·경(敬)·정(精)·청(淸)·도(道)·덕(德)을 널리 알렸다”고 말했다. 허당의 다풍은 난포조묘를 거쳐 잇큐소준(一休宗純·1394∼1481)으로 이어졌다. 허당이 난포조묘에게 글씨를 한 폭 준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뒤로 차어(茶語)가 있는 족자를 걸고 차회를 하는 풍경이 일본에서 자리를 잡았다. 난포조묘는 25세에 중국 송나라에 가서 양기파인 허당선사의 시자로 있다가 법을 받고 33세에 귀국하였다. 난포조묘의 제자 다이토국사(大燈國師) 슈호묘초(宗峰妙超·1282∼1337)는 대덕사(大德寺)를 개창하고, 묘초의 제자 간잔에겐(關山慧玄·1277∼1360)은 묘심사(妙心寺)를 개창했다. 이들 3대를 오도칸(應燈關)이라고 하며 임제종 대응파(大應派)라 불린다. 이 법맥은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인 하쿠인에카쿠(白隱慧鶴·1685∼1768)를 거쳐 오늘날까지 임제종의 정통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 친필인 ‘류(流)의 묵적(墨蹟)’에 대한 다른 견해가 제기됐다. 지금까지 원오극근의 묵적은 한중일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중국 닝보(寧波)시 인민정부(닝보 칠탑사)가 대회를 유치하면서 한국의 ‘차의 세계’(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가 공동주최한 ‘선차문화의 동전(東傳)’을 주제로 한 ‘제5차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2010년 4월 23∼26일) 학술연토회에서 베이징대 쉬안팡(宣方) 교수는 ‘송원 불차의 다연’이라는 논문을 들고 나와 “원오극근 선사가 구큐조류(虎丘紹隆·1077∼1136)에게 써 준 인가장(도쿄박물관 소장), 즉 ‘류(流)의 법어’는 다선일미의 정맥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법어에 불과하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일본 무라다 슈코(村田珠光·1442∼1502) 연구의 권위자 구라사와 유키히로(倉澤洋行) 교수는 경악했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한·중·일 차학계는 긴장했다. 구라사와 교수는 대회가 끝난 뒤 ‘류의 묵적’은 종래 일본의 주장이 맞지만 또 다른 ‘원오 묵적’(圓悟墨蹟, 슈코·珠光 소지)은 원오가 쓴 것이 아니라 남송 시대 선승 대혜종고가 대신 써준 것이라는 내용의 글 ‘슈코의 원오묵적’을 ‘차의 세계’(2010년 10월호)에 기고함으로써 원오묵적을 둘러싼 논쟁은 가열되고 있다. 더구나 ‘화경청적’도 백운수단(白雲守端·1025∼1072)의 어록을 일본이 즐겨 쓰면서 일본 다도의 진결(眞訣)이 되었다는 중국 측의 주장이 나왔다. 백운수단은 임제의현(臨濟義玄), 황룡혜남(黃龍慧南)에 이은 양기방회(楊岐方會)의 제자이다. 백운수단의 제자가 원오극근이고, 원오극근의 제자가 구큐조류이다.
일본 다도가 신주처럼 모시고 있는 ‘화경청적’과 ‘다선일미’의 신화가 뿌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이 같은 발언은 일파만파가 되어 동아시아 차계에 풍랑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일본인들은 선차의 맥이 원오극근을 통해 일본에 전해졌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차계의 원로인 다다 유지(多田侑史) 선생은 1992년 3월 원오극근 선사가 다선일미를 제창한 협산 영천사를 찾아 감격한 나머지 “일본 다도의 조정은 석문 협산에서 나왔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신선소각사지(新選昭覺寺志)'에 따르면 무라다 슈코가 중국에서 원오극근 선사를 참배하니 선사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고 ‘다선일미’라는 묵보를 증송하였다고 한다. 무라다 슈코는 귀국하면서 태풍을 만나 대나무 통에 넣어둔 ‘다선일미’를 잠시 잃어버렸으나 나중에 일본 혼슈(本州) 강변에서 잇큐소준이 발견해 대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무라다 슈코에게 다시 전해졌다.
일본 승려들은 이 묵보를 통해 깨우쳐 후에 저술하니 그것이 ‘선다지도(禪茶之道)’이다. 묵보는 그 후 다케노 조오(武野紹鷗·1502∼1555), 센리큐(千利休)에게 전해진다. 이 묵보는 센리큐 사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수중에 들어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
2001년 5월 중국 경공업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차엽대사전’에는 다선일미라는 말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다선일미(茶禪一味·Same sense in tea & buddhism): 불교용어. 선미(禪味)와 차미(茶味)는 동일한 종류의 흥취임을 가리킨다. 본래 송대 원오극근(1063∼1135)이 선수행을 하던 일본인 제자에게 써준 네 글자로 이루어진 진결로, 일본 나라(奈良)현의 다이도쿠지에 보관되었으며, 나중에 불교계와 민간에 널리 유행하는 말이 되었다.”
현재 도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선일미 묵적의 설명에 따르면 “원오극근은 66세 되던 때인 1128년 2월 12일 남송 고종의 명을 받아 운거산으로 가고 있었다. 금릉(金陵)을 지나다가 잠시 쉴 때에 특별히 배웅을 나온 법제자 구큐조류에게 준 법어이다.” 이를 일본에서는 ‘조류에게 준 인가장’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인가장이 아니라 단순한 법어라는 것이다.
일본의 어떤 선종과 차 관련 저술에도 ‘다선일미’라는 글은 나오지 않았고, 단지 묵보로서만 대덕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할 뿐, 이 사실조차도 세상에 알려진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일본의 차 정신을 다선일미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중국 측 주장이다. 그만큼 다선일미는 오늘날 동아시아 차 정신으로, 차 브랜드로 어떤 글귀보다도 요약과 힘이 강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센리큐에 의해 소장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일본 차 정신의 요체가 바로 ‘다선일미’라고 하는 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다선일미’와 ‘화경청적’이라는 묵적의 출처와 진위가 어떻든 간에 일본은 이것을 가지고 근대 다도의 신화를 완성하는데, 이것이 근본에서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현재 동아시아 삼국 간에는 선차문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보이지 않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제5차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에서는 또 중국 측의 여러 발표자가 대회 명칭인 ‘선차(禪茶)’를 ‘다선(茶禪)’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해프닝 성격의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그 뒤 중국과 일본, 한국의 논문들이 ‘선차’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일제히 쏟아내고, 중국 닝보 당국의 사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중국 다예연구의 권위자인 위웨(余悅) 장시성 난창(南昌)대 교수는 ‘선차대회’가 동아시아 차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장문의 기고를 통해 한국의 입장을 앞장서 지지해주었다. 일본의 다도신화는 앞으로 한국과 중국의 차 문화 부흥에 따라 종래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입장의 재조정이 요구될 전망이다.
대혜종고(大宗?:1089~1163)선사 대혜선사는 특히 간화선(看話禪)을 주창하였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묵조선(默照禪)의 병폐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고 하겠다.
묵조선(默照禪)을 비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흔히 말하는 지관(止觀)과 묵조(默照)의 방편으로 선의 안목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선의 도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가운데에서 선의 도리를 알았다고 하면 그저 탁론을 이룰 뿐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 관과 허공의 도리를 어떻게 하면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 도리조차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했다면 간화선이란 분수밖의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무수한 수행자들이 간화선에서 고개를 돌려 위파사나 관법이나 다른 방편을 뒤적거리면서 길을 찾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어떤 이가 묵조와 지관의 방편에 머문다면 신위(信位)는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위(人位)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못할 것이다. 조(照)라는 글자를 관법의 관으로 아는 것은 병폐이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에 눌러앉는 것을 결국 대혜선사께서도 우려한 바가 아니었겠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대혜선사의 묵조사선이라는 비판은 묵조선, 간화선의 문제가 아니라 수행자의 문제라고 하겠다.
50대(선불교 23조)응암담화(應庵曇華)/ 51대(선불교 24조)밀암감찬(蜜庵減儏)/ 52대(선불교 25조)파암조선(破庵祖先)/ 53대(선불교 26조)무준원조(無準圓照)/ 54대(선불교 27조)설암혜랑(雪岩慧郞)/ 55대(선불교 28)조급암종신(及庵宗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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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대(선불교 29조)석옥청기(石屋淸琪)
**허당지우선사(虛堂智禺禪師)(경산차=경산다연)
백운수단선사의 和敬淸寂을 허당지우선사 이어감 - 이는 다시 일본 원통국사에게 이어짐.
일본에서는 원통대응국사(圓通大應國師)가 다담선의 개창조이다.
허당,지우선사(虛堂智禺禪師- 백운수단선사의 법손자)에게 수참(修參), 허당선사로부터 선장(禪杖)으로 인가를 받았다. 和敬淸寂은 일본 茶道의 근본정신을 나타내는 숙어로 통용되게 되었다.경산차가 일본다도의 원류는 경산차=경산다연.
**석옥청공선사(1257~1352)원나라 때 스님.
태고보우선사는 석옥청공에게 임제종 인가를 받음.구산선문 통합, 간화선 중심으로 선문을 확립함.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는 700년 전 석옥청공(石屋淸珙)을 인연으로 고려 말의 고승 태고보우(太古普愚)와 백운경한(白雲景閑) 선사가 구법한 땅. 하무산(霞霧山)은 호주시 서남쪽 25km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1200m 정도의 고봉이다. 산봉우리에 호수가 있고 거기서 내려다 보면 산이 물결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안개가 많고 비가 자주 오므로 하우산(霞雨山) 또는 하무산이라고도 한다. 마치 안개가 병풍처럼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산봉우리에는 천호암(天湖庵)이 있는데 거기서 석옥청공 큰스님이 나서 유명하게 되었다.
호주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절강성 북부 태호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중요한 성시(城市)이다. 이곳이 유명케 된 데는 당대의 다성(茶聖) 육우(陸羽)가 30년 동안 거주하면서 『다경(茶經)』을 저술했던 차문화의 보고일 뿐 아니라 원대 불교를 주도한 임제종(臨濟宗)의 고승 석옥청공이 불법을 휘날렸던 곳이다. 또한 고려의 태고보우 국사가 찾아가 불법을 토로했던 곳이기도 하다.
석옥청공선사어록』내용인즉 급암(及菴) 선사가 석옥에게 부촉하길 “그대는 법해(法海) 가운데 그물을 뚫고 나오는 금린(錦鱗)을 투과하라”고 말씀했다. 그 뒤 고려의 한 스님(태고보우)이 원나라의 고승 석옥청공을 찾아온다. 이 스님은 석옥청공 선사의 탑비에 등장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석옥은 그를 인가(印可)하면서 “금린이 곧은 낚시에 올라온다”라는 시구를 주면서 “나의 법이 온통 해동으로 가는구나”라고 일렀다. 그처럼 석옥은 태고보우가 일찍이 법기임을 간파하고 그에게 그물에 걸린 보물창고를 건져 올리라는 시구를 주었다. 그 보물은 다름 아닌 깨달음의 말씀을 가리킨다.
“석옥청공은 마조도일의 ‘마음이 아니고 사물이 아니다’라는 심법륜(心法論)과 관계된 사상을 직접 계승한 기초 위에 ‘무심처용심(無心處用心)’이란 중요한 선학 명제를 제기한 사람이다. 이는 혜능(慧能)의 ‘무심(無心), 무상(無相), 무주(無住)’의 삼무(三無)사상에서 발전했다”
호주에서 활약한 교연(皎然)과 청공(淸珙)의 선다 심인사상을 발표한 소옥(邵鈺)은 다성 육우에게 제일 깊은 영향을 미친 시승 교연, 그로부터 500년 후 석옥청공 선사가 나와 그 밑에 태고와 백운경한이 마음과 마음을 이으면서 한·중의 우의는 마치 물결처럼 이어져왔다고 피력했다. 당대 한국불교의 중심메카가 강서였다면 다시 그 등불은 절강성 호주에서 원나라 시대의 고승 석옥이 나와 그 맥을 태고, 백운이 이어가면서 찬란한 법등을 밝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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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대 까지 중국 스님
57부터는 한국스님들이 법맥을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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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대(선불교 30조, 한국 선불교 1조)(1302~1382)태고보우(太古普愚)
태고 보우 국사는 고려 충렬왕 27년(1301)에 양근에서 태어나 우왕 8년(1382) 용문산 소설암에서 입적하기까지 살다간 81년의 생애는 장엄하였다. 북한산 태고사는 태고보우국사가 계셨던 곳이다. 태고스님은 고려 말 최초로 중국 임제스님 법통을 이어 받으신 분이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話頭)를 혼자서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다. 그뒤 불경을 열람하면서 깊이 연구하였으나, 불경의 연구가 수단일 뿐, 진정한 수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선수행(禪修行)에 몰두하였다. 1333년(충숙왕 복위 2) 가을에는 성서 감로암(甘露庵)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7일 동안 정진하였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두 아이가 나타나서 더운 물을 권하였는데 받아서 마셨더니 감로수였으며, 그때 홀연히 깨친 바가 있었다.
1337년 가을에는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 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모든 지해(知解)를 타파하였다. 그뒤 송도의 전단원( 檀園)에서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으며, 1338년 1월 7일에 대오(大悟)하였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는 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렀다.
1347년 7월에 호주 천호암(天湖庵)으로 가서 석옥(石屋)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고, 40여일 동안 석옥의 곁에서 임제선(臨濟禪)을 탐구하였다. 그가 떠나려 하자 석옥은 <태고암가>의 발문을 써주는 한편 깨달음의 신표로 가사(袈裟)를 주면서,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 그것을 그대에게 전하노니 잘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1348년에 귀국하여 중흥사에 머물렀으며, 도를 더욱 깊이 하고자 미원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4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보임(保任)하였다.
이때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짓기도 하였다. 1363년에 신돈(辛旽)이 공민왕 의 총애를 받아 불법을 해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므로, 보우는 "나라가 다스려지려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얻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 살피시고 그를 멀리하시면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신돈의 횡포가 더욱 심하여졌으므 왕사의 인장을 반납하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태고 보우는 회암사에서 얼마 안되어 은사 광지 선사에게 작별을 고하고, 가지산 총림으로 가게 된다. 광지는 가지산파의 숨어있는 인물로 당시 회암사의 원로급 인물이었던 것 같다. 스승의 뜻을 따라 태고 보우는 가지산파의 총본사격인 회암사에서 먼거리에 있는 가지산 총림에 자리잡은 남도지방의 보림사를 찾게 된다. 태고 보우는 비로소 보림사에서 선의 길에 들게 된다. 그가 참구한 화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 라는 화두이다. 암도 스님은 회암사와 태고와의 관계에 대해 “회암사는 태고보우가 광지 선사와의 인연으로 불문에 들게 한 인연터로 만족했을 것으로 본다”며 “더욱 큰 발심을 위해 가지산 보림사로 찾아간 것”이라고 말했다.
불문에서의 스승과 제자 관계는 법사의 개념보다도 깨달음이 우선한다. 환암 혼수의 경우 나옹의 제자였으나 태고 보우의 제1의 문도가 됨으로써 태고 보우 선풍을 계승한다. 그러므로 환암 혼수는 태고 보우의 임제선을 이은 인물이라 볼 수 있다. 회암사는 지공 ․ 나옹 ․ 무학의 3대 화상으로 이어지는 나옹의 세력에 의해 전성기를 누렸던 선종사찰이었으나 나옹의 제자인 환암 혼수가 태고의 전법제자가 됨으로써 태고의 법향이 가득한 임제선의 고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회암사는 태고의 출가 본사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고려불교계의 큰스승 나옹과 태고의 세력 싸움은 치열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승자는 역시 태고 보우다. 그는 단절된 법맥을 복원, 당시 고려불교계를 주도함으로써 나옹의 시대에서 태고의 시대로 탈바꿈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권근이라는 인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근은 태고 보우의「소설암 원증국사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태고 제자 환암 혼수의 비인「보각국사탑명(普覺國師塔銘)」까지 지은 인물이다.
공민왕 19년(1370) 7월, 공민왕이 공부선장(工夫選場)을 설치하여 선교의 선문납자에게 응시케 했다. 그때 나옹 화상이 주시(主試)케 했는데 환암 혼수가 응시하였다. 그때 나옹은 혼수의 그릇됨을 크게 인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암 혼수와 나옹과의 관계이다. 분명 선사는 태고 보우의 법맥을 잇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공, 나옹, 무학이 거쳐간 회암사는 태고 보우 스님의 자취는 없으나 스님의 득도처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보우의 법손인 환암 혼수의 법향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태고 보우 선사의 오도의 과정을 살펴보면 보림사에서 6년, 이후 용문산 상원사와 상서의 감로사, 불각사 등에서 피나는 정진을 통한 깨달음과 개성 전단원에서의 돈오의 과정을 거치면서 태고 보우의 뚜렷한 선(禪)철학이 성립된 것 같다. 가지산 보림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문을 크게 일으킨 도의 법사의 법손 보조 체징 선사에 의해 선풍을 일으킨 선종사찰로 최형미(崔逈微) 스님을 거쳐 고려말의 고승 태고보우가 수선했던 곳이다.
보림사를 주목하는 것은 보우 선사가 보림사에서 6년간 수선안거 뒤 중국에서 임제의 법맥을 받아와, 희양산 봉암사를 거쳐 보림사 주지로 추대되어 개당법문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보림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중흥지이며 고려말 불교계의 리더 태고 보우에 의해 임제선으로 복구, 한국선불교 부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곳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조계종의「종헌과 종지」편에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신라 도의 국사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 국사의 중창을 거쳐 태고 보우의 제종 포섭으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한 것이다’ 하였다.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 화순 쌍봉사의 사자산문 등이 개산조 혜철, 홍척, 철감에 의해 탄생된 것에 비해 가지산 보림사는 가지산파의 3대 법손인 보조 체징에 의해 탄생된 남종선으로, 신라말 원표 ․ 체징 ․ 최형미 ․ 고려말 보우 선사까지 2대 왕조에 이르기까지 남종선의 뿌리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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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대(선불교 31조, 한국 선불교 2조)(1320∼1392)환암혼수(幻庵混修)/
59대(선불교 32조, 한국 선불교 3조)귀곡각운(龜谷覺雲)고려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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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선불교 33조, 한국 선불교 4조)벽계정심(碧溪正心)
조선조 태종 때 불교 탄압이 극심해지자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여 금릉군 황학산(黃鶴山)으로 처자식과 함께 들어가 물한리에 숨어 지냈다. 뒷날 벽송 지엄(碧松智嚴)에게는 선(禪)을, 정련 법준(淨蓮法俊)에게는 교학을 전하여 선․교의 두 법맥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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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1435년(서울) ~ 1493년 (향년 58세) 세종 문종 단종 세조(생육신의 한 사람).
초암차를 행함. 조선 초기의 문인.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三角山 中興士)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南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37세에 서울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올곧게 하기 위한 노력은 유·불·도 삼교(三敎)를 원융적(圓融的) 입장에서 일치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조동종(漕洞宗)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불교의 종지(宗旨)는 사랑(자비)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또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神仙術)을 부정하면서도 기(氣)를 다스림으로써 천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즉 음양(陰陽)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이런 철학적 깨달음은 궁극적으로는 현실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저(遺著)로는 〈금오신화〉·〈매월당집 梅月堂集〉·〈매월당시사유록〉 등이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초암차(草庵茶)
한.일 양국의 다도계가 숙명처럼 여기고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초암차이다. 이 말이 한국차문화나 일본다도를 말할 때 맨 처음에 등장한다. 초암차가 한.일 두 나라의 다도의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다도를 정착시킨 무라다슈코(1422~1502)가 초암다법을 창안하면서 그 정신을 다케노죠오(1502~1555)와 센 리큐(1522~1591)가 이어 와비차로 대성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초암차라는 말을 처음 창안한 사람이 김시습이라는 사실은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일본 다도계에서는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초암다법은 베일에 싸이 블랙박스가 되어 갔으나 점차로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매월당집>의 <유금오록>에 수록된 (일동순장로와 이야기하며)라는 시를 근거로 준장로가 매월당을 울산 염포 영성의 불일암에서 만난 사실을 내세워 그 영향이 일본에 전해졌고, 무라다슈코가 영향을 받아 초암차를 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차의세계 발행인인 최석환님이 센리큐의 유파인 우라센케와 모모테센케 종장을 만났을 때 그들은 초암차는 매월당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최석환님은 10년전부터 일본 오산(남선사, 청룡사, 상국사, 건인사, 동복사)을 답사하기 시작하여 매월당의 초암차가 일본차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적하기 시작했다.
발단은 재야 차연구가로부터 두루마리로 된 일본 극비 문서 속에 매월당과 준장로가 만난 사실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부터이다. 그러나 문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10여년 전 최석환님은 알본 도쿄대 도서관에 비장되어 오던 사전 속에서 무라다슈코가 매월당의 영향을 받았다는 구절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자료의 근거를 화엄학의 대가인 김지견박사에게 보여주었다. 그 자료를 근거로 '매월당의 초암차가 일본 차계에 미친 영향'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여 다시한번 매월당의 초암차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김지견 박사는 매월당의 초암차에 대한 연구를 완성하지 못하고 고인이 되셨고, 그 후 이렇다 할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던 중 최석환님은 매월당의 초암차 산실인 울산 옛 염포 영성을 찾았는데, 현대자동차 경내에서 자동차 하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불일암터는 작은 공원으로 유지로 남겨놓았다.
우라센케와 모모테센케 종장은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에 차가 들어왔다고는 말하지만 초암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거부했지만,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가 초암차가 일본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기수가 쓴<조선통신사왕래>에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바뀌면서 불교에서 유교로 음다풍도 바뀌었다고 말하였다. 그 시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책을 불살라 버리고 한평생을 방랑으로 지냈다. 매월당이 1460~1470년경 금오산 용정사에 은거하면서 <금오신화>를 쓰고 있을 무렵 일본의 준장로가 찾아와서 둘은 다담을 나눈다. <매월당집> 의 12권 <유금오록>에 '일동순 장로와 이야기하며' 라는 시가 전해온다.
" 고향을 멀리 떠나니 뜻이 쓸쓸도 하여
옛 부처 산꽃 속에서 고적함을 보내누나
쇠 다관에 차를 달여 손님이 마시도록 제공하고
질 화로에 불을 더해 향을 태우네
봄 깊으니 해월이 쑥대 문에 비치고
비 멎으니 산 사슴이 약초 싹을 밟아 대네
선의 지경 나그네 정이 모두 아담하니
오순도순 밤새도록 말하여도 무방하리라 "
시를 살펴보면 쇠 다관에 차를 달였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차를 우려 마신 것이 아니라 팔팔 끓는 물을 부어 차를 마셨던 것 같다. 여기서 초암차가 시작되었음이 짐작된다. 조선왕조의 음다풍이 바뀌게 된 것은 470여 년간 이어져 온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하면서 말차 중심에서 잎차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매월당의 시에서도 펄펄 끓는 물을 부어 차를 우려 마시는 풍습이 나오는 것만 보아도 1460년경 완전히 차가 잎차 중심으로 바뀐 것이 분명하다. 준장로와 매월당은 경주 금오산의 용장사와 염포 불일암을 오가며 깊은 다담을 나웠던 것 같다. 차 연구가인 자영동 씨 역시 울산과 경주가 그리 멀지 않은 점을 미루어 준장로와 매월당이 자주 만나서 다담을 나누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준장로가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방문한 것은 분명하다. <세종실록>에 보면 세조 10년 2월 17일경 자조에 왜국사자 가운데 '준초'라는 승려가 나온다. 이 준초라는 일본 승려가 일동승 준장로가 아닐는지. 두 승려가 조선에서 활동한 시기와 매월당과 준장로가 만난 시기가 일치한다. 준초는 1463년 조선에 왔다가 태풍을 만나 이륙해 조선에 머무는데 준장로가 조선에 머물렀던 1460~1470년과 거의 일치한다.
초암이란 작고 소박은 공간을 말한다. 이른바 선방의 텅빈 공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유마 거사가 살던 사방 한 장 짜리의 방장을 말한데서 연원한다. 매월당은 그 방장을 차실 공간으로 이끌어 냈고 그 공간을 초암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무라다슈코는 다다미 4조 반의 공간으로 구체화시켰고 센리큐는 3조, 2조 반으로까지 축소시켰다. 매월당의 초암차 다법은 서원식 다도로 발전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비차를 이끌어 냈다.
61대(선불교 34조, 한국 선불교 5조)벽송지암(碧送智岩) 1464∼1534 성종때 불교탄압이 심할 때 출가함.벽계 정심스님 등에게 수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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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대(선불교 35조, 한국 선불교 6조)부용영관(芙蓉靈觀)1485(성종 16)~ 1571(선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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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대(선불교 36조, 한국 선불교 7조)청허휴정(淸虛休靜)
부용영관서사의 제자.1520(중종 15)~1604(선조 37).
당시 불교는 조선왕조의 계속된 억불정책으로 사회경제적인 토대를 박탈당했으며, 사림의 등장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가 재편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국가제도권에서 탈락하여 산간총림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휴정은 이러한 때에 불교교단의 존립과 국가 전체의 안위를 의식하고 이에 대처했다. 그는 선종 가운데서도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가장 중시했으며, 화두로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강조했다. 교학에 대해서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만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사교입선(捨敎入禪)적 입장에서 그는 종래 선종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중시해온 〈능엄경〉과 〈반야경〉을 비판했다.
또 휴정은 염불을 인정했는데, 이때의 염불은 사후에 서방극락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아미타불을 찾는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차원이었다. 즉 염불도 선 수행의 일종이었다. 실천으로서 그가 인정한 경전공부와 선 수행 및 염불은 조선 후기에 불교교단의 공통된 수행방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유(儒)·불(佛)·도(道)의 3교는 명칭만 다를 뿐 그 가르침의 근본은 같다는 3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에 대비되는 불교의 법통관을 새로 제시하여 임제종의 전통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의 4대 제자가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서산대사의 제자로는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의 4대 제자가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
해남 대둔사는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이후 의발을 이곳에 전하고 나서 사세가 크게 일어난 곳이다. 그 후로 대둔사는 원교 이광사(1705~1777),정조 이산(1752~1800),창암 이삼만(1770~1845),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가 남아 있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의 차연이 서린 일지암이 있다. 초의선사에게 화법, 시학, 불경과 차를 익힌 소치 허련(1809~1893)은 후에 추사 김저희의 제자가 되어 한국 남종화의 선구자가 되었고 미산, 남농, 임전 등으로 이어가게 된다. 초의선사와 대둔사, 초의선사와 일지암은 훗날 한국차문화의 전성기의 요람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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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선불교 37조, 한국 선불교 8조)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
**유정(사명대사)
1544(중종 39) 경남 밀양~ 1610(광해군 2). 그는 휴정의 4대 제자의 하나였지만, 불교승려로서의 독창적이며 체계화된 사상은 남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병장(僧兵將)이나 외교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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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대(선불교 38조, 한국 선불교 9조)풍담의심(1592 ~ 1665)/ 66대(선불교 39조, 한국 선불교 10조)월담설제(1632 ~ 1704) / 67대(선불교 38조, 한국 선불교 11조)환성지안(1664 ~ 1729)/ 68대(선불교 39조, 한국 선불교 12조)호암체정(1687 ~ 1748)/ 69대(선불교 40조, 한국 선불교 13조)청봉거안(1738 ~ 1823)/ 70대(선불교 41조, 한국 선불교 14조)율봉청고(1855 ~ 1894)/ 71대(선불교 42조, 한국 선불교 15조)금허법첨(1824 ~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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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대(선불교 44조, 한국 선불교 17조)영월봉율 ( 1738 ~ 1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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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대(선불교 45조, 한국 선불교 18조)만화보선 고종 원년인 1864년에 동학사 를 크게 중창.
**정약용1762(영조 38) 경기 광주~ 1836(헌종 2).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2]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요한,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다산의 고향 마현마을, 다산이 열수(洌水)라고 부르던 한강물이 넘실대고, 멀리 운길산의 수종사가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여 나라의 개혁과 인민의 해방이 완성되는 희망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산은 눈을 감고 지하에 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역사의 땅이다. 정약현·약전·약종·약용 등 4형제의 뛰어난 학문과 사상이 피어나 형성된 곳이다. 천주교의 초기 신앙인들인 이벽·이승훈·황사영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곳이다. 정약종과 그의 두 아들 정철상·정하상, 그의 조카사위이던 황사영이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의 수호를 위해 장렬하게 순교한 피가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정약용과 그의 중형 정약전의 실학사상이 자라났고, 다산의 두 아들인 정학연·정학유 등의 계승, 다산의 외손자 윤정기가 외가를 드나들면서 실학사상을 꽃피게 했던 곳도 그곳이다.
임금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천주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신유박해(辛酉迫害)라고 부른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鐵身)·이승훈(李承薰)·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 등이 연루되었으며,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되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장형을 받던 중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음력 2월 22일에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에서 버티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다산이 해배한 뒤, 1818년에서 세상을 떠나던 1836년까지의 18년 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당대의 석학들이 그곳을 출입하면서 다산과의 교유를 통해 학문의 범위를 넓혀갔다. 석천 신작과 대산 김매순의 학문논평의 서찰이 수없이 오고갔고, 홍석주·길주·현주 3형제와 다산과의 교유가 이어졌다..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또 정조대왕의 외동사위인 해거도인 홍현주의 마현출입은 외로운 다산의 노년에 위로가 되었다.
18년의 귀양살이에서 유배 초기 강지읍내의 사의재(四宜齋)라는 주막집 방에서 연구하고 강진읍내의 뒷산에 있던 고성사에서도 연구는 계속했지만,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의 뒷산인 다산에 있던 윤씨들의 서재인 ‘다산초당’에서 다산학이 완성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이며, 행위와 실천보다는 이론 위주의 학문인 성리학에서 관념과 사변적인 것보다는 실용적이며 실천적인 다산학을 연구했음은 조선 500년 온갖 학문 중의 금자탑이었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 경세학이 이룩되고 경학인 다산학이 수립된 다산초당이야말로 다산학의 산실임에 분명하다. ‘다산초당’은 생가인 ‘여유당’과 함께 조선 학문의 금자탑인 다산학의 양대 보금자리였다.
다산초당은 소유권도 연고권도 전혀 없는 남의 산정(山亭), 다산은 그 산정을 자신이 소유주인 양 경관을 참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물을 끌어다가 비류폭포인 인공폭포도 만들고, 그 물이 고이는 곳에 연못을 파서 경치를 아름답게 단장했다. 흐르는 물을 받아 산자락에 계단밭을 일구어 미나리를 가꾸며 용돈도 벌고 반찬감도 장만했다. 바위 절벽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겨 징표로 삼았고, 약천·다조 등 아름다움의 최상을 만들어 선비의 연구처로 삼았다. 귤동마을에는 가을이면 노랗게 유자가 익어가고, 마을 앞까지 밀려오던 구강포의 바닷물은 빠져나가면서 다산의 시름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초당의 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학승 혜장선사가 거처하던 백련사 절이 있어 답답한 가슴을 식히기에 넉넉하였다. 초의선사와는 이때 차인연을 맺게되어 사제지간이 되었고, 그 인연은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 정학유, 추사 김정희, 해거도인 홍현주까지 이어졌다.
다산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강진읍내의 사의재에서 낮은 신분의 제자를 가르쳤다면 다산초당에서는 양반신분의 자제 18명을 가르쳐내, 이른바 ‘다산학단’이라는 학파를 형성해냈다. 쟁쟁한 제자들이 다산의 학문을 계승하여 망해가던 나라에 온갖 방법으로 복무(服務)했던 점은 또 다른 다산의 공로였다.
**추사 김정희 1786(정조 10) 충남 예산~ 1856(철종 7)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이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흥선대원군 역시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정희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로 여겨진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 계속 글과 작품을 썼다.
1850년(철종 1년) 또는 1851년에 실수한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글씨로는 해남 대둔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무량수각',현 판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대팽두부(大烹豆腐 )', 봉은사의 '판전', 초의선사에게 보낸 '명전(茗禪)', '선탑록명(禪榻綠茗)'
그림으로는 세한도, 불이선란도, 영영백운도(英英白雲圖), 고사소요(高士逍遙), 소림모정(疏林茅亭), 세한도(歲寒圖)
추사의 일생은 보통 다섯단계로 나뉘 어진다.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 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
백석신군비와 명선
추사 김정희가 필의했다는 백석신군비는 2007년 9월 4일 신문지상을 통해 보도되었다. 추사에게 백석신군비의 탁본을 전한 이는 청의 학자 유희해아다. 유희해는 운석 조인영을 통하여 추사의 아우 김명희와 조선의 금석문을 <해동금석원>으로 엮은 저자이다. 유희해는 조선과 청의 금석문화 교류사에 중요한 역학을 했던 금석학자이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당시 <백석신군비>탁본을 정성껏 살피다가 초의가 차를 보내준 것에 고마움의 표시로 "명선"이란 두 글자를 써서 보냈다. 그 글을 쓸때 추사는 <백석신군비>의 필의로 썼다고 했다. 이는 스승 옹방강을 존경한 나머지 <백석신군비>를 한나라체로 비정한 뒤 <명선>을 필의한 것 같다.
<백석신군비>원석 발견은 추사 사후 150년만에 처음으로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청조의 고증학을 받아들이고 옹방강을 스승으로 모셨다는 추사는 <백석신군비>에서 '명선'만을 필의한 것이 아니라, 추사의 시 중에서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라는 시 또한 황산곡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홍준전문화재청장은 "해동의 유마거사라는 평을 받앗던 추사가 만년에 남긴 '판전'이란 글씨를 보면 마치 어린애 글씨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본래 어린애 글씨는 아무 구밈없이 천진한 것인데, 추사가 추구한 천진무구함이란 단련된 천진성이라는 데 중요한 미덕이 있습니다. 추사는 70평생 벼루 10개와 일천 자루의 몽땅붓으로 추사체를 형성했고, 이는 판전이라는 글씨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판전 글씨는 추사체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의스님1786~1866(고종 3년)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린다. 초 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의 일상 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차 한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은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는 것으로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차(茶)의 고전이라할 수 있는 『동다송(東茶頌)』은 다승(茶僧)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가 해거도인 홍현주의 요청을 받아 1837년에 완성한 글이다.
동다송 1책. 필사본. 7언시로 총 31송이며 송마다 주를 붙여 본문을 보충했다. 내용은 차의 역사, 차나무의 품종, 차 만드는 법, 차를 끓이고 마시는 법, 차의 생산지와 품질 등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나라 토산차에 관한 것은 6송이 있다. 토산차가 중국 것에 못지 않음을 찬양하고, 토산차를 따는 시기도 중국과 달라 중국책인 〈다경 茶經〉에서 말한 곡우(穀雨) 뒤가 아닌 입하(立夏) 다음이 적당하다고 했다.
다신전 차의 수확과 다도에 관한 저술인 〈다신전 茶神傳〉(8장, 필사본)이 있는데, 내용은 중국의 〈만보전서 萬寶全書〉에서 뽑아 엮은 것이다. 우리나라 차의 역사와 전통다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75년 최범술(崔凡述)이 보련각(寶蓮閣)에서 간행한 〈한국의 다도〉에 두 책의 원문과 번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다선을 지켜온 조정, 대흥사 선다일미 원류
조선의 차문화를 말할 때 초의 선사(艸衣禪師ㆍ1786~1866)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초의 선사는『동다송(東茶頌)』이란 책을 지어 고래(古來)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차문화(茶文化)를 살리면서 그 정신을 중정청경(中正淸境)으로 정립, 중국이나 일본다도와 확연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한국 차문화를 중흥시킨 초의 선사가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다선불이(茶禪不二) 정신을 이끌어 냈던 한국다선의 조정(祖庭)인 해남 대흥사의 다풍(茶風)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13대 종사(宗師)와 13대 강사(講師)를 배출해 낸 대흥사는 서산문도(西山門徒) 중 가장 번창한 소요태능계(逍遙太能系)와 편양언기계(鞭羊彦機系)가 함께 살면서 서산문풍을 드높였던 곳이다. 청허휴정(淸虛休靜ㆍ1520~1604)의 법맥을 잇는 제자만도 천여 명에 이르고 있으니 한국불교계 모든 승도(僧徒)가 청허법손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청허의 적손은 사명유정(四冥惟政) - 편양언기(鞭羊彦機) - 소요태능(逍遙太能) - 정관일선(靜觀一禪)으로 이어졌다. 대흥사는 편양언기(鞭羊彦機ㆍ1581~1644)에서 연담유일(連潭有一)을 거쳐 한국 차문화의 중흥조인 초의의순(草衣意恂)과 아암혜장(兒菴惠藏), 범해각안(梵海覺岸) 등 유난히도 많은 다승을 배출했다. 한국다선의 원류는 임제의현(臨濟義玄) 문하에서 양기방회(楊岐方會)가 나와 임제의현(臨濟義玄) - 황룡혜남(黃龍慧南) - 양기(楊岐) - 백운수단(百雲守端) - 원오극근(圓悟克勤) - 호구소륭(虎丘紹隆)을 거쳐 석옥청공(石屋淸珙) - 태고보우(太古普愚)로 이어져 왔고, 그 뒤 서산문도로 이어져 편양언기(鞭羊彦機) - 풍담의심(楓潭義諶) - 월담설재(月潭雪齋) - 환성지안(喚醒志安) - 호암체정(虎巖體淨) - 연담유일(蓮潭有一)을 거쳐 완호윤우(玩虎尹佑) - 초의의순(草衣意恂)으로 대흥사의 다풍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원오극근 선사가 일본인 제자에게 네 글자로 써 준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진결(眞訣)이 일본 나라의 대덕사에 보존되면서 일본 다도의 전유물처럼 되어왔다. 그러나 양기방회(992~1049), 원오극근으로 이어지는 다선의 정통맥은 한국으로 이어졌다. 원오극근에서 호구소륭(1077~1136)으로 이어지는 다선의 정통맥을 청허 선사가 이어와 초의의순에 의해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한국다선의 조정 대흥사가 차지하는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기 때문이었다.
전다박사로 불린 초의선사
18세기 후반 차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자하신위(1769~1845)와 금령 박영보(1808~1872)같은 어른이 초의선사에게 '전다박사'의 칭호를 부텨 주었다. 전다박사란 요즘처럼 박사학위를 받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차품(茶品)을 겨루는 박사'를 말한다. 서한 말년 왕포의(동약>(부)에 나오는 편료가 첫번째 차박사라면 초의선사는 전다박사라는 호칭을 얻은 첫번째 사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초의차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자 사대부들은 초의에게 차를 선물 받는 일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18세기 후반 초의를 중심으로 자하 신위, 해거도인 홍현주, 추사 김정희, 그의 아무 김명희, 다산 정약용, 그의 제자 황상을 통해 초의 차의 진가가 밝혀지면서 초의는 중정(中正)의 도(道)로써 대중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하게 되었다. 차가 중국을 통해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초의는 일본 다도정신을 이룬 화경청적을 뛰어넘어 일본다도와는 다른 '중정의 도'를 들고 나왔다. 예부터 차는 군자와 같아서 성품에 삿됨이 없다고 말해왔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차품을 겨루는 품다가 이루어지면서 차문화가 활짝 꽃을 피웠던 것에는 전다박사 초의의 공로가 크다 할 것이다.
*대둔사의 다승들: 청허휴정,월저도안,설암추봉,환성지안,상월새봉,함월해원,연담유일,아암혜장,범해각안,보제심여,금명보정등은 다시를 통해 다맥을 잇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해거도인(海居道人)홍현주(洪顯周, 1793∼1865)
정조(正祖)의 따님인 숙선옹주(淑善翁主)의 부마(駙馬 : 임금의 사위)이다. 영명위(永明尉) 영의정 낙성(樂性)의 손자이자 우부승지(右副承旨) 인모(仁模)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영수합(令壽閤) 서(徐)씨이고, 좌의정(左議政) 홍숙주(洪奭周)는 그의 형이며, 홍현주의 집안은 홍석주를 포함한 그의 형들과 어머니, 그의 아내인 숙선옹주도 다시(茶詩)를 여러 수(首) 남긴 다인(茶人) 집안으로 저서(著書)로는 [해거재시초(海居齋詩抄)]가 있다.
<납설수팽다臘雪水烹茶 : 섣달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이다>
동십이월계미납(冬十二月癸未臘) 계미년 겨울이라 섣달 12월에
일고수족남창탑(日高睡足南窓榻) 중천에 해 뜨도록 남창 침상에서 실컷 잤네
운소죽관무박탁(雲銷竹關無剝啄) 대나무 사립은 구름에 잠겨 문 두드리는 사람 없고
설옹매려절진잡(雪擁梅廬絶塵雜) 눈 덮인 매려에는 세상 잡사 아예 없다.
염취구협백견봉(拈取舊篋白絹封) 북은 상자 뒤져서 흰 깁 봉함 접어드니
보이차고월단탑(普洱茶膏月團榻) 보이차 덩어리에 둥근 달이 박혔구나 개함완견천리면(開緘宛見千里面) 봉함 열자 완연히 천리 면목 본 듯 하니
연남고인정주잡(燕南故人情周匝) 연남 사는 옛벗은 그 정이 깊고 말고
방규원벽수처옥(方珪援璧隨處沃) 방규와 원벽이 곳곳에 넉넉하여
고송노괴신수랍(枯松老槐信手拉) 마른 솔과 홰나무를 손길따라 꺾는다네
전로수탄화후활(甎爐獸炭火候活) 벽돌화로 수탄 피워 불기운이 살아나니
석조어안송풍삽(石銚漁眼松風颯) 돌 냄비에 어안 일고 솔바람 불어온다
자전불감부동복(自煎不敢付童僕) 하인 아이 못 맡기고 내가 직접 차 달이니
두상반의오사암(頭上半欹烏紗匼) 머리 위에는 오사모(烏紗帽)가 반쯤은 기울었네
화자성래유가색(花瓷盛來有佳色) 화자잔(花瓷盞)에 담아내자 고운 빛 어리더니
일완돈개금격탑(一椀頓開襟鬲闒) 차 한 잔에 갑자기 막힌 가슴이 뻥 뚫린다
통정미천유제이(桶井尾泉猶第二) 통우물과 미천 물을ㄴ오히려 두 번째라
한영정여갈후합(寒英正與渴喉合) 한영이 참으로 마른 목에 합당하다
다병소수유명음(多病所須惟茗飮) 병이 많아 필요한 것은 다만 차를 마시는 일
유대명년잉저납(留待明年剩貯納) 내년을 기다려 남은 것을 간직하네
위의 싯귀를 보면 이미 조선시대에도 보이차가 차를 즐기는 사대부나 차인들 사이에 음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고려의 차인들 시에도 보이차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다른 차인의 시나 글에 보이차가 등장하는 것을 찾아서 다음 번에 올리도록 하겠다.
9句의 방규원벽(方珪援璧)은 송나라 때의 시인 진관(秦觀)이 “북원의 원차는 방규원벽이라 만리의 이름이 서울에 울렸다(원문 생략)”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북원차(北苑茶)를 지칭하는 말이며 18구(句)의 한영(寒英)은 설화(雪花)를 말하는 것으로 시제(詩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설수(雪水 : 눈 녹인 물)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리고 남은 차를 비단에 꼭꼭 싸서 보관한다거나 화후(火候)를 직접 살핀다는 것을 볼 때 홍현주의 차에 대한 식견은 초의선사에게 차에 대해 묻기를 청하기 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에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초의스님은 1831년(순조 31), 스승 완호(玩虎)스님의 삼여탑(三如塔)을 건립하며 명시(銘詩)를 홍현주에게 부탁한 일이 있다. 홍현주는 이 일을 계기로 초의스님의 차를 맛본 후 부쩍 우리 차에 관심을 가졌다. 홍현주는 1817년(순조 17) 변지화(卞持和)를 통해 초의스님에게 다도를 물었고, 초의스님은 그 대답으로「동다송」을 지었다. <동다송>은 다도(茶道)를 시로 설명한 글이다.
<동다송>의 첫구절을 보면,
' 一傾玉花風生腋 身輕已涉上淸境 ' 옥화같은 차를 한잔마시니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75대(선불교 46조, 한국 선불교 19조)경허성우(1849 ~ 1912 ) 철종1년에 출생했고 순종사후 2년에 열반,
제자들은 만공월면,한암중원,제산정원,수월음관,침운현주.
경허(鏡虛, 1849년~1912년)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다는 대선사이다.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났고,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 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속가의 이름은 송동욱(東旭)이고, 아버지는 송두옥(斗玉)이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1879년 11월 15일[모호한 표현],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진사인, 이처사(李處士)의 한 마디,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이 한마디를 전해듣고는, 바로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1대 조사인 인도의 마하가섭존자 이래 75대 조사이다.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 우무비공처)는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의 어록에 실려 있는 선어다. 당시 경허의 시봉을 받들던 사미승 원규는 경허의 사제인 학명의 제자였고, 이처사는 사미승 원규의 속가 아버지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년 - 1937년), 수월(水月, 1855년 - 1928년)ㆍ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선사가 있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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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대(선불교 47조, 한국 선불교 20조)만공월면 / 혜월혜명 ( 1862 ~ 1937 )
만공(1871년 ~ 1946년)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이며,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이다. 속세의 성은 송씨로, 송만공으로도 부른다. 경허(75대) - 만공(76대) - 전강(77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춘성은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13세에 어머니와 금산사에 다녀온 바우(만공스님의 속명)소년은 미륵부처가 업어주는 꿈을 꾸고 나서 식구들 몰래 출가의 꿈을 키운다. 14세에 공주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해 진암(眞巖)스님 밑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다니러 온 경허스님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경허를 따라가라는 진암스님의 말에 처음엔 "싫다"고 거부하지만, 경허의 법문을 듣고난 후 그 자리에서 마음을 바꿔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경허스님은 그의 형 태허스님과 어머니가 머물던 천장암에 바우소년을 데리고 가 월면(月面)이라는 법명을 준다.
바로 이때가 경허의 세 '달'이 모두 함께 천장암에 거하던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훗날 백두산에서 나그네들에게 짚신을 삼아주던 무주상보시로 유명했던 '북녘의 상현달' 수월(水月)스님은 땔나무를 해오는 소임인 부목을 맡고 있었고, 아이같은 천진불로 유명했던 남녘의 하현달 혜월(慧月)스님은 이곳에서 경허스님에게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수월은 30세, 혜월은 23세, 만공월면은 14세였다.
1905 년 이후 주로 덕숭산 수덕사에서 주석한 만공스님은 1931년 금강산 유점산 금강선원 조실, 1933~35년 마하연 조실, 1936년 마곡사 주지를 잠깐 맡았을 뿐이다. 만공스님이 마곡사 주지로 있었던 1937년 3월, 총독부는 전국 31본산 주지와 도지사를 모아 미나미 총독의 주재로 '불교진흥책 마련'이란 미명하에 한·일 불교 합병을 획책하는 회의를 주최했다. 이 자리에서 미나미가 "전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자, 만공스님은 벌떡 일어나 "데라우치는 조선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처럼 파계하도록 했으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분연히 소리 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미나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이날 밤 만공스님의 둘도 없던 친구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찾아와 "잘했다"면서 "이왕이면 주장자로 저 쥐새끼같은 놈들을 한방씩 갈겨 주지그랬나"라고 하자, 만공스님은 "미련한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큰 사자는 원래 할(喝, 깨달음을 주기 위해 크게 소리침)을 하는 법"이라고 응수했다. 이때만큼은 한용운도 잠시 말을 잊었다.
만공스님의 시봉이었던 원담스님(덕숭총림 방장)은 "만해 한용운 스님과 김좌진 장군은 자주 수덕사로 놀러 오시곤 했다"면서 "만공스님은 한용운을 가리켜 '내 애인'이라고 종종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만공스님은 거구에 육척장신으로 힘이 장사여서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이길 때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만공스님 주위에는 항상 글쓰고 그림 그리고 소리하는 예인들이 많았다. 남농 허건, 허백련 등 화가들을 비롯해 소리 잘하는 풍류객들도 종종 만공을 찾았다. 만공스님은 그럴 때면 늘 옆에 끼고 있던 '공민왕 거문고'를 타며 함께 풍류를 즐겼다.
만공스님은 말년에 덕숭산에 전월사를 짓고 지내다가 1946년 10월20일 나이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입적하던 봄, 스님은 시봉하던 원담스님을 불러 "더 살면 험악한 꼴을 볼 것이니 올해 시월 스무날쯤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침 목욕 후 거울을 들여다 보며 "자네 나와 이별할 때가 되었네 그려" 하더니 춘성스님에게 법상을 맡긴 후 열반에 들었다.
만공스님의 제자로는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古峰) 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스님, 비구니로는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스님을 들 수 있다.
혜월혜명 ( 1862 ~ 1937 )
속성(俗姓)은 신씨(申氏). 호는 혜월(慧月). 11세에 예산 정혜사(定慧寺)의 안수좌(安首座)에게 출가했다. 1884년(고종 21) 경허성우(鏡虛惺牛)로부터 보조국사(普照國師)의〈수심결 修心訣〉을 들어 깊은 뜻을 깨닫고, 1901년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1908년부터 도리사(桃李寺), 파계사(把溪寺), 성전(聖殿), 울산 미타암(彌陀庵), 통도사, 천성산 내원사(內院寺) 등으로 다니면서 종풍을 크게 선양했다. 1921년 부산 선암사(仙巖寺)에서 주지하면서 산지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었다. 부산 양안암(養安庵)에서 입적했다. 언제나 보시를 행했으며 꾸밈이 없었고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 혜월 혜명(1862~1937) 스님은 12세에 출가하여 글 한 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다가, 은사(恩師) 스님의 퇴속(退俗)으로 경허 선사와 인연이 되어서 참선의 관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근세 한국불교 중흥의 씨앗을 뿌린 경허스님 법제자인 혜월혜명(慧月慧明,1862~1937)스님은 무심도인(無心道人)이다. 일제 강점기. 부산 선암사에는 많은 대중이 모여 들었다. 남방의 도인인 혜월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혜월스님 열반 상황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백양산에서 솔방울을 주워 자루에 담고 내려오는 길에 산기슭에서 입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솔방울을 주워 올 때면 백양산 중턱 길에서 한 번씩 쉬었는데, 그곳서 입적했다는 것이다. 1937년 2월 어느 날. 그날도 스님은 평소처럼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쉬어가던 곳에서 한숨 돌린 스님은 백양산과 마을을 한번 바라본 후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는 자세를 취하다 원적에 들었다. 가고 옴이 따로 없는 선지식의 열반을 혜월스님이 보여준 것만은 사실이다. 길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처럼 혜월스님은 집착하지 않는 삶의 가르침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었다. 혜월스님의 법맥은 운봉스님을 통해 향곡.진제스님에게 계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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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대(선불교 48조, 한국 선불교 21조)혜암 현문(慧庵玄門) 만공선사의 제자/
운봉성수( 1889 ~ 1944 ) 혜월선사가 인가, 혜월선사의 제자
혜암 현문(1886∼1985)
근현대 한국불교의 선지식이며 중흥조인 경허.만공스님의 선풍(禪風)을 계승하고 덕숭총림 수덕사 초대 방장을 역임한 혜암현문(惠菴玄門)스님. 혜암스님은 1886년 1월5일(음력은 1885년 12월 21일) 황해도 배천군 해월면 해암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사홍(崔四弘) 선생과 모친 전주 이 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세속의 이름은 최순천(崔順天). 본관은 강릉. 11세에 부친상을 당한 후 이듬해 수락산 흥국사에서 삭발했다. 은사는 보암(保菴)스님. 계사는 금운(錦雲)스님. 이때 받은 법명이 현문(玄門)이다.17세에 모친마저 별세한 후 스님은 운수행각에 나섰다.
1911년 해담(海曇)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만공(滿空).혜월(慧月).용성(龍城)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공부에 몰두했다. 이무렵 오대산 상원사 주지와 태백 정암사 주지 소임을 잠깐 보았다.
혜암스님은 1929년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았다. 이때 만공스님이 혜암이란 법호를 내렸다. 이로써 스님은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은 법제자가 되어 ‘경허.만공의 선풍’을 세상에 보였다.
1956년 수덕사 조실로 추대된 혜암스님은 20여 년간 후학을 지도했다. 1984년 덕숭총림 개설시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어 사부대중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 혜암스님은 1985년 5월 19일(음력은 3월30일) 수덕사 염화실에서 열반에 들었다.
원적에 들기 전에
“모든 존재는 변화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허망한 것도 아니고 허망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는 내용의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스님의 세수 101세, 법납 89세였다.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천명을 다한 스님의 별칭은‘장수도인(長壽道人)’이었다.
혜암스님은 1976년 그동안의 법어를 모은 <선관법요(禪關法要)>를 발간했으며,
1980년에는 <선문촬요(禪門撮要)>를 직접 편역(編譯)해 후학들에게 지남(指南)을 보여주었다.
운봉성수( 1889 ~ 1944 ) 13세에 출가하여 경율론삼장(經律論三藏)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진리의 본체(本體)에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것임을 통감하여 참선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그리하여 전국의 명산제찰(名山諸刹)을 두루 행각(行脚)하며 선지식을 참예(參詣)하고 공부에 혼신을 기울였다. 그렇게 참선정진에 전력(全力)하기를 10여 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일념(話頭一念)이 현전(現前)되는 경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님의 세수 35세 되던 1923년, 심기일전(心機一轉)하기 위해 부처님전에 대발원을 세워 백일기도를 한 후, 사생결단의 각오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동안거 정진에 들어갔다. 밤낮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대분심(大憤心)이었던 터라 자연히 화두 한 생각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섣달 보름이 되어 우연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문 밖에 나서는데 그 순간, 홀연히 마음 광명이 열려 가슴에 막혀 있던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리하여 깨친 바를 점검받고자 당시 남방 제일의 선지식으로 알려져 있던 혜월 선사를 참예하여 여쭈었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은 어는 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하고 계십니까?" 이에 혜월 선사께서 양구(良久)하므로, 스님이 냅다 한 대 치면서 다시 여쭈었다. "산 용(龍)이 어찌하여 죽은 물에 잠겨 있습니까?" "그럼 너는 어찌하겠느냐?" 스님이 문득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니 혜월 선사께서는 짐짓, "아니다."라며 부정하셨다. 이에 다시 응수하기를, "스님, 기러기가 창문 앞을 날아간지 이미 오래입니다." 하자, 혜월 선사께서는 크게 한바탕 웃으시며 "내 너를 속일 수가 없구나." 하고 매우 흡족해 하셨다. 이후 제방에서 납자를 제접하시며 선(禪)의 종지(宗旨)를 크게 떨치시니, 도법(道法)의 성황함이 당대의 으뜸이 되었다.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라일체의 유의법은 본래 진실상이 없음이니 저 산 가운데 상이 없으면곧 견성이라 이름하나니... 이렇게 혜월선사에게서 전법게를 받으셨다. 이후 제방에서 납자를 제접하시며 선(禪)의 종지(宗旨)를 크게 펼치시니, 도법(道法)의 성황함이 당대의 으뜸이었습니다. 선사께서 내원사(內院寺) 조실로 계시던 중 1929년에, 훗날의 법제자인 향곡 혜림 스님을 만나셨습니다.
***경봉선사(1892~1982)염다래 고종때 태어나서 일제시대를 거쳐 1980년대까지.
만해·용성·한암선사등과 같은 시대를 살았음. 혜월스님 제자.
경봉선사는 통도사 극락암에 머물면서 승속을 가릴 것 없이 찾아오는 사람에게선다일미를 실천해 온 선승이었다. 조주의 다풍을 선가의 가풍으로 진착시킨 스님은 츠차취(喫茶去)를 염다래로 이끌어 냈다. 이는 더 나아가 경봉의 다선에서 영향을 받은 금당 최규옹 옹의 끽다래(喫茶來)로 이어져 오면서 근세 선차문화를 이끌어 냈다.
스님의 차의 인연은 깨달음을 이룬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36세되던 해인 1927년 11월 15일 스님이 법주 겸 설주가 되어 화엄산림법회를 시작햇을 때였다. 나흘재 되던 날 갑자기 별이 무너지듯 시야가 넓게 트이면서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그렇게 깨닫던 순간을 선필에 담아 일원상을 담아냈다.그것을 간직한 다우들이 족자로 차실에 다괘로 걸게 되면서 경봉선사는 다선일미를 올곧게 지켜 온 참 스승으로 자리 잡았다. 경봉선사는 늘 '"시자야, 염다래(拈茶來, 차 달여 오너라)" 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를 찾아오는 이에게 "자네 차 몇 잔 마셨나"로 경책을 늦추지 않았다.
근래 편찬한 <선원청규>에서도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선수행과 다도를 일치시켜 선다일미의 선풍을 진작시켰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찰에서 선차가 사라져 가고 있을 때 경봉선사와 효당스님이 나와 꺼져 가는 선차의 맥을 이어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경봉선사는 근세 선차를 논할 때 맨 먼저 거론된다. 선사는 일원상을 시작으로 츠차취, 선차,조주차,운병법,다선일미,염다래 등 수 많은 선어를 남겨 지금은 다괘로 명성이 후세까지 전해지고 있다.(한편으로 드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모든 선어는 선차로 정리될 수 있을 듯 하다. 선차에서 다양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낸 것이므로 모두 선차로 환원될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다양한 다도는 선차지법(禪茶之法)으로 환원될 수 있을 듯하다. 하나에서 모든 것이 나온 것이므로...그러나 각자 운용하는 묘미가 있으므로 다양함을 유지해가며 자기언어로서 그 운용의 묘미를 살리며 자기스타일화 시키는 것도 중요한 듯 하다. 하나에서 다양함으로, 다양함은 하나로 환원될 수 있는 것. 즉 소통의 통용이자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것.)
차와 선에 대해 경봉선사가 말씀하시길 "무릇 선이란 마음 가운데 망상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물 가운데 화기를 내려가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상을 쉬면 물 기운이 오르고 망상이 가라앉아 물과 마음이 한 겹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여진다"고 하셨다.
**응송 박영희 스님(1893년 ~ 1990)고종때 태어나서 일제를 거치고 .6.25동란을 거치고 1990대까지.
차를 뜨겁게 우려 마심.(열탕차) 열일곱살에 일본헌병의 눈을 피해 대흥사에 들어가 서호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다. 그 후 현대 다성으로 추항받고 있는 초의스님의 법제자인 서암스님의 문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서암스님으로부터 사후법계를 받아 초의스님 문중에 들게되어 자연히 초의스님의 종법손이 됐다. 종법손이란 직계가 아닌 방계의 손이다.
초의스님이 입적한 지 17년 후에 응송스님이 태어났고 또 그 17년 후에 머리를깎았지만 초의스님의 문중에 들 수 있는 것이 불법의 법이기도하다. 아무튼 응송스님은 수계를 받고부터 절에서 차만을 맡아 심부름하는 다각생활을 20년간 했다. 또 20년간 대흥사주지도 했다. 소위 대흥사 다법이나 초의다법을 그대로 계승한 살아있는 증인이다.
뜨거운 차(茶)는 선종 본래의 다법(茶法)이다. 초의·응송 음다법 중국 선종 영향받았다. 응송스님의 제다법도 솥에 덖은 방법이니 초의스님의 제다법이 응송스님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응송스님의 제다법은 뜨거운 화후에서 생잎을 살청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차가 가지고 있는 영양, 식물적인 요소, 일시에 갈무리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뜨거운 탕수에 견딜 수 있는 비법이 여기에 있다. 이 유형의 제다법은 선종이 들어오면서 함께 유입되어 우리나라에 면면히 이어오던 고유의 제다법이 가미된 형태는 아닐지….
중국 선종의 제다법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는 중국 강서성 영수현에 소재한 선종사찰 운거사의 제조법이 응송스님의 제다법과 가장 유사하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강서성 운거사의 제다과정을 조사한 결과 뜨거운 불에 달구어진 무쇠솥에서 생잎을 덖을 때 쓰는 대나무로 만든 차손, 차를 유념하는 방법, 유념한 후 약하게 발효를 거치는 방법이 대흥사의 응송스님의 제다법과 같다.
남종선과 함께 유입된 제다법이라면 1천 년의 역사 흐름 속에서 우리의 심성과 환경에 맞추어 얼마만큼 변화되고 발전되었는지 면밀히 연구하면 그 실체가 자명히 드러날 수 있다. 운거사는 구법승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고 또 우리나라와 같이 쌀을 주식으로 하며, 차나무의 종류도 소엽종으로 우리의 차종과 같다. 실제 강서를 답사했을 때 운거사를 찾아가는 산하는 마치 우리나라의 어느 곳에 온 착각이 들 정도로 비슷했다. 나지막한 산들과 논, 그리고 소나무들, 우리의 선조들이 강서의 문화적 특성을 선호함은 이런 조건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차제조법은 수종이 중요한데 운거사의 수종은 소엽종으로 우리나라 옛 절터에 자생하는 수종과 같았다. 운거사에서 제조되고 있는 차품은 그 형태도 우리와 같다. 실제 처음 입산하여 삼여 년 동안 제다과정을 거쳐야 정식 승려로 인정된다 하니 선종에서 제다는 한 수행의 과정이다.
허운대사가 득도하는 과정은 선종에서 뜨거운 차를 마셨다는 방증자료가 되기에 충분한 것인데, 허운대사가 방선중 다관에 따라 주는 뜨거운 찻물이 손에 튀는 바람에 잔을 떨어트렸고 잔이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에 득도하여 오도송을 읊었다는 사실이 있다. 또 회화 속에 나타난 팽다(烹茶)는 동자가 소나무 아래에서 풍로 위에 다관을 얹어 부채를 부치면서 차를 달이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차가 뜨거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며 적어도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차는 뜨거운 차이며 특히 선종에서 차는 뜨거워야 하는 당위성을 운거사의 유품에서 증명한 셈이다. 차는 찬 것인데 뜨거운 것은 차(茶)뿐이라는 응송스님의 지론은 곧 초의스님의 차품에서 나온 것이며, 전통적인 차품은 뜨거운 차가 원형이라는 사실은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응송은 침 공양 뒤, 점심 공양 전에, 점심 뒤 오후에, 식 간에, 저녁 뒤, 잠자리 전에, 낮에 주변서 권하면, 손님이 오면 그때 그때, 그렇게 마치 호흡하는 공기처럼 차를 마셨다.
응송은 차문화운동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대신 선종(禪宗)에서 차를 어떻게 다뤘는지에 대한 원형질을 간직하고 싶어했다. 그는 차를 짜게(진하게) 마셨고, 찻물을 일정온도(우전차의 경우 60~70℃)로 식혀서 마시는 일반의 다법과 달리 초의선사 다법 그대로 펄펄 끓는 물(95℃ 가량)에 순간적(3인기준 40초 가량)으로 우려마시는 열탕을 고수했다. 고온의 물에 견디면서 차의 본래 색과 향, 기운, 맛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다법이 달라야 한다. 일본차는 고온에서 문드러진다.
응송 스님의 제다법은 초의 스님 그대로 솥에 덖는 방법이다. 뜨거운 화후에서 생잎을 살청하면 차가 가지고 있는 영양, 식물적인 요소를 일시에 갈무리할 수 있다. 뜨거운 탕수에 견딜 수 있는 비법이 여기에 있는 것. 초의 스님 다풍은 현장성이 중요하다. 초의 스님이 문자로 기록한 '동다송(東茶頌)'이 문헌 자료로 남아 있고 실증적 형태의 제다법이 남아 있다. 응송다맥의 미묘한 맛은 '선고회감(先苦回甘)'. 처음엔 씁쓸한 듯하다 서서히 맑은 느낌을 주며, 두세 잔째에 우러난 제맛은 몇잔이 돌아도 끊어지지 않고 유지된다.
**효당 최범술 스님(1904~1979) 고종때 태어나서 일제를 거치고, 6.25동란을 거치고 1970년대 후반까지.
스님은 사천 지역에서 자생하고 야생차 씨앗으로 다솔사 후원에 다원을 조성해 손수 ‘반야로(般若露)’라는 정제증차(精製蒸茶)를 만들었다. 73년 한국 차도의 입문서로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차도>를 집필했고 77년 1월 15일 국내 최초로 차인들의 모임인 ‘한국차도회’를 발족시켜 우리 차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어떤 규범이나 격식, 계층에 얽매임 없이 누구나 차를 즐길 수 있다는 ‘차도무문(茶道無門)’과 다기를 다루는 행위와 그 마음자세를 일컫는 ‘차도용심(茶道用心)’을 바탕으로 한 선차(禪茶)수행을 확립한 효당 스님은 79년 7월 10일 7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차도무문을 찻자리로 이끌어낸 효당 최범술 스님은 근세 우리차의 중흥조로, 진주의 다솔사에서 원효학에 몰두하던 중 80년대 초 우리 차문화 운동이 싹틀 무렵 서울에 올라왔다. 그에게 차도의 진리를 묻자 '차는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 진리를 음미하면서 생활화하는 데 그 원리가 있다' 고 피력한 바 있다. 스님은 차 생활화의 하나로 차도무문을 주장했다. 차도무문이란 말은 <무문관>의 첫머리의 '대도(大道)는 문(門)이 없다' 라는 말에서 연원하여 그 말을 근거로 다도의 원리를 이끌어 낸 것 같다. 그 밖에도 '차도용심(茶道用心)이란 말도 즐겨 쓰셨다. 그 말은 차생활을 할 때, 실제 다기를 다룰 때 도(道)와 그에 운용하는 마음자리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효당 스님은 차맛을 감윤(甘潤)하는 것을 최상으로 하고, 가볍게 쓰면서 달고 떫은 것을 그 다음으로 여기고, 쓰거나 떫은 것은 좋은 품미가 못된다고 하였다. 또한 차를 이야기할 때 참 나에 바탕을 두어야 차선에 이른다고 말했다.
선가에는 선필에 선기가 흐른다는 말이 있다. 효당스님은 차도무문, 차도용심, 대도무문이란 차어로 이끌어 냈다. 조주의 끽다거와 견줄 정도로 차도무문에는 모든 것을 초월한 청정무구한 차의 세게가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금당 최규용 옹: (1903~2002년 4월 5일) 순종때 태어나서 일제를 거치고 ,6.5동란을 거치고 2002년까지.
최규용 선생은 대한민국 근현대 부산에서 활동한 통영 출신의 차문화연구가였다.
일본 유학 시절 차를 접한 이후 차 문화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가졌고 평생 동안 반려로 삼았다. 1938년 중국 상해서 사업을 하던 중 명차(名茶) 산지를 여행하며 한·중·일 차 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대륙에 머물며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부춘(富春), 난계(蘭溪), 강소성(江蘇省), 천진(天津), 북경(北京), 천목산(天目山)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쌓았다.
1946년 귀국하여 한국의 차 역사를 공부하며 우리 차산지를 돌아다니면서 차와 관련 문헌 등을 찾아 본격적인 차 문화 연구에 몰두했다.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선방(禪房)에서 2년 동안 참선수도하며 차 문화가 불가(佛家)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알고 사원차(寺院茶) 연구에 심취하여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기도 했다. 1952년에 해인사 경판고, 장경각, 퇴설당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고건축, 고미술, 민예품 등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1965년 부산에 고려민속공예학원을 설립하여 회장을 역임했다.
1978년에 금당차회(錦堂茶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차 문화 교육을 시작으로 1983년 한국차인연합회(韓國茶人聯合會) 고문을 맡으면서 전국적인 전통문화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87년 중국 항주 절강대학과 한중 문화교류에 앞장섰으며 1987년에 창립된 한국차문화회(韓國茶文化會) 상임고문을 비롯한 여러 차 문화 단체에 관여하여 한국 차문화계의 정신적 지주로 숭앙받았다.
1988년에 한국육우다경연구회를 창립하여 중국의 다성(茶聖) 육우(陸羽)가 지은 『다경(茶經)을 연구하며 동양 차 문화의 근본을 정리하기도 했다. 1989년에 중국차문화연구회로부터 다성(茶星) 칭호를 받았다. 금당은 한국 뿐 아니라 중국 국제차문화교류회 등의 중국 차 문화 단체에도 고문을 맡아 국제적인 차인(茶人)으로 인정받았다.
현대 차 문화의 산실이자 중흥지인 부산 지역은 여러모로 오늘날 한국의 차문화사(茶文化史)에 큰 자리를 차지함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그 정신을 이어오던 한국의 차 문화가 조선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등 우리 민족의 아픔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다산(茶山), 초의(艸衣), 추사(秋史)등 옛 차인(茶人)들에 의해 그 정신과 다법(茶法)이 이어졌던 일은 우리의 은근하면서도 끈질긴 민족성과 함께한다. 그러다가 현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한 번 차 문화의 불꽃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영호남을 중심으로 전통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근현대 차인들이 부산에 거주하며 차 생활 운동을 펼쳐나갔던 것이다. 그 운동의 앞장 선 이가 금당이었다.
錦堂은 1978년에 『錦堂茶話』라는 책을 시작으로 송도의 ‘금당다우(錦堂茶禹)’에서 많은 제자를 기르고 오늘날 한중일 국제 차문화의 기틀을 세웠던 어른이다. 금당 최규용은 한평생 차를 즐기며 정행검덕(精行儉德)의 차정신(茶精神)으로 살다가 2002년 4월 5일 청명(淸明)날 부산 송도 바다가 보이는 금당다우에서 백세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부산차인연합회장(釜山茶人聯合會葬)으로 치러졌고 사리 36과를 수습했다. 유골은 유언대로 통영의 선산에 뿌려졌다.
금당의 ‘끽다래(喫茶來)’ 화두(話頭)
1988년 해인사에서 일타(日陀)스님, 석정(石鼎)스님과 함께 중국 당나라 조주선사(趙州禪師)의 화두(話頭) ‘끽다거(喫茶去)’와 대거되는 ‘끽다래(喫茶來)’란 신조어를 만들어 평생을 차(茶)마시기 운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일타스님은 그가 팔만대장경 경판고 보수공사 때 퇴설당에서 참선하던 스님을 처음 만나 평생의 지기로 삼았다. 그리고 석정스님은 그가 해인사에서 참선 수도할 때 진주 의곡사(義谷寺)에서 해인사로 가끔 와서 달마도를 그리던 스님의 화필에 감탄하며 가깝게 지냈던 인연이었다.
2005년 가을에 중국 하북성(河北省) 백림선사(栢林禪寺)에서 열린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世界禪茶文化交流大會)’에서『 조주의 喫茶去와 금당의 喫茶來 』라는 주제의 짧은 논문을 발표하여 여러 나라 차문화인들에게도 ‘끽다래’의 정신이 알려졌다. 오늘날 백림선사는 조주가 ‘끽다거’의 화두를 남겼던 그 유명한 관음원이다.
이 ‘끽다래’란 금당(錦堂) 최규용의 인사는 유명한 차이야기가 되어 그 글귀가 새겨진 기념비가 1997년 부산 초읍의 삼광사(三光寺) 뜰에 세워졌고 1999년 합천 해인사 지족암에도 건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국제 차 문화 교류의 다리를 놓은 업적으로 중국인들에 의해 차문화 교류 공덕비가 세워졌는데 1998년 10월 8일 중국 항주시 서호(西湖) 부근의 차인지가(茶人之家)에 건립되었고 또한 2000년에 호북성 호주시에도 ‘끽다래’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한국의 제자들에 의해 2008년 부산시 구덕문화공원에 끽다래 기념비가 세워져 매년 추모 헌다례가 진행되고 있다.
현대 茶문화의 꽃이 피기 시작한 80년대엔 전국의 茶문화를 주도하는 곳이 영남과 호남이었다. 1988년에 ‘영호남차인들의 만남을 위한 모임 추진위원회’가 부산의 몇몇 뜻있는 차인들에 의해 기획되어 광주 ‘작설헌(雀舌軒)’에서 호남 지역의 대표 차인들을 만나 한국의 茶문화 진흥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행사장에 가기 전에 우리들이 기획한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군사독재시절에 입에다 담는 것조차 꺼리던 광주 망월동 묘역에 누워있는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넋들을 기리기 위해 먼저 차 한 잔 올리는 헌다식(獻茶式)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부산을 비롯한 영남지역 차문화인들의 대표들과 대학차회 동아리 회장단과 그리고 한국차문화회와 여천차문화회회원들과 함께 부산역을 새벽에 출발했지만 망월동참배에 대한 인식 부족과 비바람 치는 궂은 날씨에 행사 책임을 맡은 필자의 마음을 착잡하게 했을 때, 행사 고문을 맡아 기꺼이 참여하여 그곳 망원동에서 즉석 추모사를 통해 보여준 그 의연함에 참석한 모두들에게 큰 힘이 되어준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곳에 참여한 영남지역 차문화인들과 광주의 민주인사들과 차 문화를 사랑하는 호남지역 대학생들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범국민적인 ‘정신대해원상생굿’ 행사를 부산 해운대 바닷가서 펼치려고 할 때 부산 문화계의 최고 어른인 요산(藥山) 선생과 함께 첫 번째 행사 공동 대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행사 관계자들과 함께 찾아갔을 때, 행사 취지를 들은 그가 정중히 “나는 일제 때 그들을 위해 일을 했던 사람이오. 그런 자리는 맡을 자격이 없소”라고 사양을 하며 차인의 양심을 보여주었던 어른이었다. 필자기 부탁한 일 중에 사양한 것은 그 일이 처음이었다.
최규용은 생전에 육우 다경(茶經)의 근본정신인 ‘정행검덕’의 사상을 바탕으로 차 생활을 하였으며, 평소 차 마시는 이들에게 “천천히·살그머니·조용히․ 환담하면서 ․그 향기를 맡으며 한가한 경지에 자연히 이르게 된다.”(『금당다화』)고 말했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생활차 운동을 이끌며 또한 매화가 필 무렵이면 반드시 다우(茶友)들을 초청하여 풍류차(風流茶)를 즐겼던 차인으로 근현대 동양차문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초의선사의『동다송(東茶頌)』『다신전(茶神傳)』등을 연구하면서도, 차 문화 시원 탐구는 마땅히 육우『다경』으로부터 비롯되어야하며 이는 어느 학문이든 그 원류를 밝히지 않고서는 대중화가 불가능하듯 차 문화 연구 역시 『다경』 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신념으로 다도문화를 주도했던 한국 근현대 시기의 저명한 차문화운동가였다. 금당다우(錦堂茶寓)를 찾아 공부하러 오는 이들에게 손수 찻물을 끓이며 차를 우려내면서 다례(茶禮)의 모습을 보여주며 평등과 검소함의 다도철학을 가르쳤다.
포은(圃隱) 정몽주의 다시(茶詩)
“돌솥에 물이 끓고/ 풍로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구나./ 물과 불은 천지의 조화를 이루니/ 이 뜻이야말로 무궁하구나.(石鼎湯初沸 風爐火發紅 水火用天地 卽此意無窮)” 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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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대(선불교 49조, 한국 선불교 22조)청봉 청운(淸峯淸韻) / 혜암현문의 제자
향곡혜림(1912 ~ 1978) 운봉성수의 제자
청봉 청운(淸峯淸韻)
1937년 중국만주에서 출생. 해방후 경북안동에서 성장 (청소년기). 동아병원 원장 및 동아의료재단 이사장 역임(서울 광진구 소재). 수덕사 초대방장 혜암 대선사로부터 전법인가 (법호: 청봉). 1985년 출가( 무구스님을 계사로 석천스님으로부터 구족계 받음).
청봉 선사는 1980년 수덕사의 큰 스님이신 혜암 스님과 인연이 되어 그 문하로 들어가 참선정진을 하면서 공부에 큰 진전을 이루어 혜암 스님으로부터 전법 인가를 받았고, 홍법하라는 부촉을 받아 1985년 출가했다. 출가 이후 전국을 떠돌며 수행정진을 했고, 어느 날 새벽 천하와 내가 둘이 아닌 경계를 홀연히 얻어, 안심입명처를 득했다. 이후 보임과 전법으로 나머지 삶을 살았다. 청봉 선사는 특히 경기도 광주 불심정사에 주석하며 정릉 삼보정사, 인천 원명정사, 마산 정법사 정기법회를 챙겼고, 4천 명의 회원을 둔 ‘다음카페 장군죽비’를 개설하여 인터넷을 통한 포교에 앞장섰다. 손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문답하시고, <금강경오가해> <육조단경> <반야심경> 해설서와 <짚신은 있는데 사람은 어디갔나> <문을 나서지 않아도 풀밭이니라> 등의 법어집을 저술했다.
78대 조사 청봉스님은 출가하기 직전 서울 성동구 성수동 종합병원인 동아병원을 운영하며 부와 명예를 쌓았던 의사였다. 병원을 운영하면서도 평소 어려운 이웃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했던 청봉스님은 재소자를 위한 강연회와 무의촌 진료 등 사회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가 하면 모 TV의 프로그램을 통해 생계가 어려운 환자의 병원비 수백만 원을 받지 않았던 일화가 알려져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의 인생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낙마한 뒤 새롭게 전환되었다.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느낀 그는 미련 없이 속세를 떠나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향곡혜림(1912 ~ 1978)
법호는 향곡(香谷)이며 법명은 혜림(蕙林)이다. 16세 때 둘째 형을 따라 양산 내원사에 입산해 18세 때 성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930년 부산 범어사에서 운봉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향곡스님은 조선시대 500년간 숭유억불정책으로 위축된 선(禪)불교 중흥의 기틀을 다진 경허스님의 법맥을 잇게 된다. 즉 경허-혜월-운봉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어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선지식이다. 향곡스님의 법맥은 이후 법제자인 진제스님(현재 대구 동화사 조실)을 통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향곡스님은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 여러 선방의 조실로서 20여년간 계시며 법의 깃을 높이 세우고 종풍을 드날렸다. 특히 스님은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 청담, 자운, 월산, 혜암, 법전스님 등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하며 수행정진했다. 향곡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함께 한 성철스님과 세납이 같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한 도반이었다. 성철스님은 1978년 향곡스님이 세수 67세, 법납 50세로 열반에 들자 ‘곡향곡형(哭香谷兄)’이란 글을 지을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79대(선불교 50조, 한국 선불교 23조) 성철 (1912~199) /
진제법원 ( 1934 ~ )
성철 (1912~199)
운봉화상을 계사(戒師)로 보살계 · 비구계를 받았다. 향곡스님과 도반이자 운봉의 같은 제자임.
속명은 이영주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선불교 전통을 대표하는 수행승이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했다.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東山) 대종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화상을 계사(戒師)로 보살계 · 비구계를 받았고, 그 뒤 봉암사(鳳巖寺)에서 청담(靑潭) 등과 함께 수행하며 부처답게 살 것을 결사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시켰다.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하였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교리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다. 그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 · 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성철에 따르면, 앎과 행동이 일치된 단계의 앎만이 진정한 앎이며, 지눌의 돈오점수는 이론적 앎일 뿐 참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어렵다. 지눌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여 인생의 가르침을 폈으며, 성철은 수행승을 대상으로 했다.
《육조단경(六組檀經)》, 《전등록(傳燈錄)》 등 선문의 조사 어록을 중심으로 많은 법어를 이루었는데, 관념의 도그마에 빠지지 말 것과 견성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1993년 해인사에서 입적하였다. 저서로 《돈오입도요문강설》(1986) 등이 있다.
성철의 유명한 법어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수행하는 사람이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로 보이는 혼돈을 겪게 되지만, 깨달음의 수준이 자라면서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는 즉, 만물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지혜(반야 · 보리)를 갖게 된다는 법어이다.
진제법원 ( 1934 ~ ) 현재 제 13대 조계종 대종사이다.
1934년 경남 남해 산동면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20세 되던 1954년 정월 해인사로 출가, 석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57년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한 뒤 본격적인 참선 수행길에 올랐다. 석우 선사로부터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화두를 받고 감자로 끼니를 때우며 태백 각화사 동암, 선산 도리사 등의 선원에서 용맹정진하던 중 지견을 얻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정진하던 중 참공부의 의미를 깨닫고 1959년 전법스승인 향곡(香谷) 선사 문하에 입실했다. 향곡 선사는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내렸다.
1967년 향곡 선사로부터 깨달음에 대한 인가를 받고, 태고 보우 선사로부터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이어져온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을 부촉했다. 향곡 선사는 스님에게 '진제(眞際)'라는 법호와 함께 '付眞際法遠丈室 (부진제법원장실) 진제 법원 장실에 부치노라'라는 전법게를 내렸다.
1998년과 2000년 백양사에서 열린 무차선대법회의 초청법주로 회상을 열어 보였고 2002년에는 해운정사에서 국제무차선대법회를 열어 최상승 간화선의 선풍을 열어보였다.
2003년 간화선을 종지종풍으로 삼는 조계종의 원로의원에 올랐으며 이듬해 종단의 최고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조계종의 종정
종정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통을 승계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를 가진 종단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이에 대한불교조계종의 모든 종도들은 종정께는 ‘스님’이라는 호칭대신 그 가르침에 따른다는 의미로 ‘예하 猊下’라 칭하고 있다.
종정 예하의 자격은 승납 45년 이상, 세납 65세 이상의 대종사 법계를 받은 수행과 법력이 높은 비구스님으로 하고 있다. 종정 예하는 종단의 법을 상징하기 때문에 종단 행정에는 관여하지 않으나 종단의 주요 행사와 안거 등을 맞아 종도들에게 법어를 내리며 종단의 모든 스님들에게 계를 전하는 전계대화상의 위촉권을 가진다. 또한 종헌 종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포상과 징계의 사면, 경감, 복권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1,700여년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조계종은 현대에 들어 비로소 종단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종정을 모셔왔다. 대한불교조계종은 통합종단이 출범한 1962년 제1대 종정으로 효봉 대종사를 모셨다. 그후 청담 대종사(2대), 고암 대종사(3~4대), 서옹 대종사(5대), 성철 대종사(6~7대), 서암 대종사(8~9대), 월하 대종사(9대), 혜암 대종사(10대), 법전 대종사(11~12대)가 뒤를 이어 종단의 법을 상징하는 최고 어른으로 역할을 해 왔다.
현 종정이신 도림 법전 대종사는 2002년 당시 종정이셨던 혜암 대종사의 입적으로 인한 유고에 따라 그해 3월 26일 추대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고 2007년 재추대되어 연임하신 후 오는 2012년 3월 25일까지 그 본분을 다해 오고 계신다. 아울러 새롭게 추대되는 종정예하는 3월 26일 임기시작일 이후 종단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 후학들을 지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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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나 책을 홍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저 책의 리뷰를 쓰려고 하다보니 그냥 단순하게 책 리뷰로만은 별 의미가 없어서...차가 흘러온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서 필요해서 정리한 것이니...그렇게 알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차의 흐름을 알아두어도 나쁠 것은 없고..차의 흐름은 선불교와는 따로 분리해서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거의 2주일 걸려서 정리 한 것이예요. 그래서 ㅋㅋ..그냥 넘어가기 아까워서 올린 것이라고 여겨주세요.
차문화는 모두의 문화이니까요. 좀 길어요. 대략 윤곽만 살펴 보시면 되겠지요.^^;